종이 신문

[김현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작곡가, 김유신 집사

복음뉴스 0 2022.04.10 14:52

김현기 목사의 나의 인생 나의 노래 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작곡가, 김유신 집사(필그림선교교회)

인터뷰 및 정리 : 김현기 목사 (필그림선교교회 예배 및 미디어 담당)

 

 

Q.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유신이구요. 작곡가입니다.

 

Q.언제부터 음악을 시작하셨나요?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하게 되었구요. 저희 부모님이 개척 교회를 하실 때 금요 철야 예배를 하는데,저희 교회 성도님이 아닌 타교회 성도님이 오셨어요. 그런데, 그분이 피아노 학원을 하셨는데,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안시키면 안된다고, 본인이 운영하는 피아노 학원에 보내라고 권유를 하셨죠. 피아노 학원이 좀 멀었지만, 공짜로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Q.초등학교 2학년에 피아노를 배우는 게 즐거웠었나요? 

솔직히 말해 남자니까 피아노 보다는 태권도나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걸 더 좋아해서 피아노 학원 다니는 건 싫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께서 책을 읽거나 피아노를 배우러 가면 용돈을 주신다고 약속을 했죠. 그래서 그 용돈을 받을 마음으로 피아노를 꾸준히 배우게 된겁니다. 그 용돈받아서 생라면을 사서 과자 처럼 먹었거든요.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서 처음으로 작곡이란 걸 했습니다. 두곡을 만들었는데 한곡은 ‘주기도문’이었습니 다. 그 선율은 아직도 생각이 나네요. 또 한곡은 그냥 피아노 연주곡이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하이틴 드라마에서 비슷한 멜로디가 연주되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사실 피아노 연주 실력은 별로였는데, 어떻게 두곡의 악보를 그려냈는지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Q.그럼 계속 음악을 하면서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워 오셨나요?

아니, 그게 사실 전 음악을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니 에요.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전 너무 너무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자라온 지역에 부평고등학교라고 이천수, 최태욱 이런 선수들이 나온 축구로 유명한 학교가 있었고, 전 그 곳에 들어가서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죠. 그런데, 부모님께서 개척교회를 하며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운동선수가 되는 건 포기해야 했어요. 그 시점에 키도 어느정도 성장을 멈춘 것도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축구부에 들어가려면 장비, 용품, 합숙비, 전지훈련비 등 다양한 비용이 들어야 하는데, 그 걸 지원해 주실 형편이 못되었던 거죠. 그래서 축구부가 없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비용이 들지 않는 피아노 학원들만 전전하면서 음악을 하게 된겁니다.

 

Q.언제부터 목회자의 자녀가 되었나?

아버지께서는 군대의 장교 출신이고, 동아건설, 대한통운 이런회사에서 중장비 정비사, 자동차 정비사 등으로 일하셨어요. 한창 중동의 건설이 붐이 일던 시절에 리비아도 다녀오시면서 그곳에 교회를 두 개나 지으시고 예배를 드린거죠. 그랬더니 같이 있던 근로자분들이 자꾸 목사라고 부르시고, 또, 기도원에 계시는 어떤 목사님께서는 예언처럼 계속 도망다니지 말라는 싸인을 주셨다고 하더라구요. 결국, 제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대한신학교에 입학하셔서 신학을 공부하시면서 전도사로서 교회를 개척하셨어요. 믿지 않으시는 큰아버지께서 돈을 빌려주셔서 상가 건물에 저희 사는 공간과 교회공간을 직접 벽을 세우고 시멘트를 발라가면서 만들었죠. 그때는 그래서, 맨날 저에게 톱질, 벽돌을 쌓고 시멘트를 바르는 일들을 돕게 하셨는데, 그게 너무 싫었습니다. 한번은 크리스마스 등을 교회의 첨탑에 다느라고 저보고 올라가라고 해서 그 상가 꼭대기의 첨탑에 올라갔는데, 정말 너무 무서웠습니다. 제가 자는 방은 주일에는 항상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방으로 쓰였고, 누군가 저에게 준 장난감은 주일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일이 더 많았죠. 학교다니면서 친구들은 전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저는 상가 건물 꼭대기의 교회에서 살고 있으니 사실, 아버지의 목회가 너무 너무 속상하고 슬펐습니다.

 

Q.음악을 전공하고 유학을 오게 된 과정은?

원래는 악기를 전공하고 싶었습니다. 특별히 트럼펫이란 악기를 배우고 입시를 해보고 싶었는데, 다니는 학원에 트럼펫을 가르칠 선생님이 없었어요. 그래서 선택한 악기가 클라리넷이었죠. 그렇게 시작한 클라리넷이지만, 정작 하다가 포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소리는 너무 예쁘지만, 뭐랄까 악기하는 모습이 좀 예뻐보이지 않았다고 할까. 아무튼 악기를 포기하고 그냥 작곡으로 입시를 선택하게 되서 장신대에 입학했습니다. 사실 장신대에 합격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공부를 잘하 는 편이 아니어서 성적도 별로 좋지 않았고, 체계적인 레슨을 받아 온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큰 기대하지 않았는데 덜컥 합격을 하게 된겁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신학교가 좀 다른 대학교들과는 달리 조용하잖아요. 뭔가 다이내믹한 환경은 아니었는데, 마침 고모가 계시던 뉴저지로 오게 될 기회를 얻게 되었죠. 대학 졸업 후 뉴저지에서 좁지만 사촌들과 함께 지내며 피아노 레슨을 했는데 제법 나쁘지 않았어요. 그래서 차분히 학교들을 어플라이 하는데, 토플성적이 좀 안나와서 원하던 합창 지휘 명문 대학교인 미국 웨스트민스터 콰이어 칼리지에 입학 허가만 받고 정작 입학을 늦추게 되었죠. 그러던 중 누나의 결혼식 때문에 한국에 다시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지원할 수 있는 학교를 찾다가 보스톤에 있는 버클리 음악 대학에 지원을 하고 실기를 치루고 합 격할 수 있었습니다.

 

Q.버클리 음악대학은 뭐가 다르던가요?

입학시험을 볼 때부터 좀 달랐어요. 한국의 음대는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문제를 줍니다. 예를 들어 6개의 음을 한꺼번에 청음하는 거라던지, 멜로디 라인을 듣고 악보로 그리는데 너무나 복잡한 멜로디 라인이라던지, 또, 시험장의 분위기도 기침 한번 못하는 딱딱하고 긴장된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버클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당시 어깨를 좀 다쳐서 피아노를 치기 좀 어려웠는데, 치다가 힘들어 하니까 그만쳐도 된다고 말하면서 편하게 해주었고, 청음도 다양한 레벨을 측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입학해서 오리엔테이션을 할 때도 연주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힙합 모자 쓰고 나와서 피아노를 10분정도 연주하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실력의 소유자들이었어요. 그 연주를 듣고 있으니 가슴이 콩닥 콩닥 뛰는게 느껴질 만큼 대단한 연주자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Q.유학 생활 중 어려웠을 때?

수업을 들어갈 때마다 학생들의 연주를 들으면서도 과연 내가 여기서 버텨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학생들의 연주 수준이 상상을 초월했죠. 특별히 이 대학은 성적이 안 되면 학년이 올라갈 수 없다는 이야기 있었고 해서 입학하자마자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번개처럼 환상을 보여주셨어요. 화창한 날씨에 보스턴 거리를 걷고 있는 저를 보게 하셨죠. 사람들이 그렇게 오고싶어하는 미국의 그것도 꿈의 도시 보스턴에서, 음악가들이 그렇게 가고싶어 하는 버클리 음대를 내가 다니고 있으면서 내가 왜 행복하지 못하고 지금 걱정만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난 지금 10층짜리 빌딩을 오르고 있는게 아니라,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고 있는 거잖아. 그러니 중간에서 멈추더라도 10층 빌딩의 꼭대기보다 훨씬 높은 곳이야 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갑자기 저의 꼴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죠. 오늘부터는 이 학생들과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학교를 즐겁게 다닐 수 있었습니다.

 

Q.솔로 앨범도 2장이나 발매 하셨는데 ?

1집의 제목이 ‘Thankfulness’인데요. 이 앨범을 만들면서 감사하면 감사할수록 감사할 거리가 생기고, 원망하면 원망할수록 뭔가 세상이 다 꼬여 보이는 걸 깨닫게 되었죠. 2집 제목은 ‘나 의 길’인데요. 제가 제 길을 잘 걸어가는 고백을 하면 제 길이 다 열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사실은 제가 앨범을 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어려운 일만 맞이하게 되더라구요. 그러면서 다시한번 제 삶을 돌아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어디를 보고 가야 하는 지 알게 된 소득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를 읽으며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끄신 하나님께서는 비록 광야길을 가더라도 신발도 헤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걸 보고, 제 삶이 어렵고 험난해도 다 그때 그때 헤쳐나갈 길을 열어주시며, 나의 신발도 헤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신 겁니다. 그걸 모르고 하나 님을 원망하며 살았던 거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Q.앞으로의 비전이 있다면?

기회가 된다면, 앞으로도 음악선교는 계속할 생각입니다. 미얀마에 가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면서 참 많은 감동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음악을 계속 만들 생각입니다. 특별히 찬양도 물론 계속하겠지만, 제가 전공한 영화음악이나 대중음악을 통해서도 악한 세력과 대적할 수 있는 선한 음악들을 만들고 싶습니다. 마음의 혼돈 가운데 제가 만든 음악을 듣고 하나님의 평안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음악말입다.

 

Q.마지막으로 인생의 노래 한곡을 뽑는다면?

글쎄요. 이승철씨가 불러줬던 ‘마더’라는 곡도 물론 저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한곡이기는 한데요, 요즘은 ‘하나된 우리’라 는 곡을 뽑고 싶습니다.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아 만든 곡이기도 하고,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여러곳에서 전쟁과 반목을 종식시키고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으로 만든 노래에요.

 

김유신
Youtube https://www.youtube.com/user/ysggang79/videos

 

하나된 우리 

https://www.youtube.com/watch?v=vL9vcog7Ib8

 

[편집자 주 : 2021년 10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5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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