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석 목사의 요한복음 살펴보기 ④ 율법은 하나님을 알려준다 - 요한복음 1장 17절 중심
글 : 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제일교회)
사람들이 기독교의 복음이 주는 큰 복을 깨 닫지 못하는 주요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나아가 축복과 은혜는 율법의 관점에서 볼 때에만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율법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삶과 교회의 삶을 생각할 때도 중요하지만, 온갖 불법과 도덕적인 문제들과 정치, 경제적인 문제들로 가득한 최근에 우리가 사는 곳의 전체적인 삶을 생각할 때도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율법을 아는 것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 시간도 세계가 직면한 가장 현실적이고 절박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비 그리스도의 삶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긴요하고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어야 하고 대답해야 할 질문이 있다. 그러면 율법의 실제적인 역할은 무엇이며 그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 율법이 구원보다 먼저 일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모세가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먼저 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을까?
1. 십계명의 첫째 들판과 두 번째 돌판
모세는 산에 올라가 율법을 받았고, 백성들에게 돌아와 그것을 반포하면서 이것은 자 신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분명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는가? 라는 기본적인 문제부터 알아보자.그 대답은 율법과 십계명에 아주 분명하게 나와 있다. 두 개의 돌판 중 첫째 돌판은 하나님에게서 출발하고 둘째 돌판은 인간관계의 문제들을 다룬다. 그래서 서기관이 주님께 질문한다: “주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주님의 대답이 무엇인가?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이다. 주님은 십계명과 같은 순서로 대답하셨다.
1) 세상 역사의 중요한 문제
세계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지금 이 시대에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돌판의 순서, 곧 주님이 서기관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신 순서를 깨닫는 것이다. 이 순서를 잊어버리거나 이 순서를 뒤바꾸거나 혹은 첫 째 돌 판의 존재를 아예 망각해 버린 것이 오늘날 세상의 문제이다.
우리가 왜 이렇게 순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혼동에 빠졌는가? 그 이유는 현대인들이 너무 바쁘고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교인들은 말한다: “우리는 신학이나 그런 교리가 필요하지 않아요. 실제적인 말들을 들려주세요. 우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말을 듣고 싶어요! 이렇게 요구한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말하는 그런 신학이나 정의같은 이론적인 문제를 말하지 마시오.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말이 필요해요. 세계의 긴장을 해소하고 나라가 일치와 평화 속에서 우호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말을 해야지요!”
2)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
물론 먼저 나라나 개인이나 다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사람의 방식이나 실제적인 방식보다 먼저 하나님의 방식으로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의 실제적인 접근법의 문제가 무엇인가? 항상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 문제다. 이것이 내 어려움이다. 나는 이것을 원하고 저것을 원한다” “나는 지도받기를 원하고 도움 받기를 원하며 치유받기를 원한다” 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매우 주관적이다. 온통 자기 생각으로 꽉 차 있다. 그래서 온갖 방법을 다 시도해 본 후에야 “혹시 하나님이 도와주실까? 라고 묻는다. 갈 데 까지 가고 나서야 하나님을 찾는다. 맨 마지막이 되어서야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기도한다. 예를 들어, 코빗 팬데믹으로 인해서 이러 저리 싸우고 지치다가, 마지막에 와서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그것도 귀한 일이다. 그러나 왜 처음부터 하나님의 마음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이처럼 사람들은 절박해져야만 하나님을 찾는다. 하나님을 첫 번째 피난처가 아니라 마지막 피난처로 찾는다. 그러니 이는 순서를 완전히 뒤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개인도 국가도 그렇다. 항상 자기의 문제와 상황에서 출발해서 자기 방식대로 해결하려 한다. 그 모든 방식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야 하나님을 떠올리고 찾는다. 이것이 온 세상이 이렇게 혼란하게 되어 버린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3) 이런 실패하는 접근법의 문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항상 첫째 돌판이 아니라 둘째 돌판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 이웃 나라와 관계가 주된 문제인가? 그 때 나오는 결론은 무엇인가? “아! 나와 이웃 간의 의견이 달라서 다툼과 긴장이 발생하고, 나라 간에 강대국 간의 장막이 가로막고 있어서 긴장이 발생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서로 우호관계를 증진하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느냐 하는 우정이 관건이 된다. 지금의 정치나 개인도 그렇지 않은가? 곧 율법의 둘째 판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최선의 관점은 ‘이런 것이 굉장히 도덕적이고 평화적인가?’이지만, 그것은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허튼 짓이라고 할 수 있다.
2. 그러면 무엇이 해결책인가?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몇 번째에 주셨는가? 둘째이다. 이웃을 사랑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먼저 그 전제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 부터 참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하셨다.
그런데 자신에 대한 진리를 모르면서 어떻게 자신을 먼저 사랑하겠는가?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또한 내 자신이 안고 있는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문제와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어떻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 럴 수 없다. 그러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으로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1) 나에 대한 진리는 무엇인가?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 가지 뿐이다.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는 곳은 한 군데 뿐이다. 그것이 바로 첫째 계명이다. 둘째가 아닌 첫째 계명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면해야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을 바로 대면하지 못하는데서 인생의 전적인 문제가 시작되고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늘 우리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자! 자신에게 출발하면 항상 자기 이익에 관심을 쏟게 된다. 자신에게서 출발하면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법정 소송을 보라. 남편은 남편 대로 자기에게는 잘못이 없고 아내에게만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저마다 남 탓을 하는 것이다. 나라들도 보라. 항상 다른 나라 탓을 한다. 선거를 보라. 다 다른 정당 탓이며 다른 정당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혹시 우리 자신도 이런 정치판의 경향을 따르지는 않는가?
2) 자신에게서 출발하면 자기중심성과 자기 정당화의 문을 여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시기와 질투, 증오와 악의, 원한과 전쟁의 문을 열어놓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냐(약4:1)!”라고 정곡을 찌른다. 세상은 항상 하나님 대신에 인간과 그 관계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자신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핵심 문제이다. 이럴 때 문제는 빛이 어두움에 비쳐도 어두움이 우리를 에워싸기 때문에, 우리의 바깥만 비추지, 우리 속까지 빛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라는 사람들마저도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요 1:11). 왜 그랬을까? 자기 정신이 어두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지성을 가져도 그렇다. 사람들은 이성보다 욕망의 지배를 훨씬 더 많이 받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상의 문제이다.
3) 교육이 문제를 해결할까?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외면한 채,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모들이 그토록 혈안이 되어 교육을 잘 시켜보려고 애를 쓴다. 그런 교육이 과연 전쟁을 끝낼 수 있는가? 오히려 부채질한다. 교육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아니다. 왜 그럴까? 각 사람 속에는 이성보다 강력한 것, 곧 근본적인 것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충동과 정욕과 욕망이다. 사람들은 이 분명한 사실을 잘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인간에게 출발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허황된 주장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금도 실패하고 있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결코 이런 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세상에 깨우쳐 주고, 그들의 접근법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이것이 마땅히 우리가 계속 해야 할 일이다. 반드시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 자신과 이웃이 아니라, 율법의 첫 째 판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3. 모든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문제 해결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신을 제대로 이해함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알라고 율법을 주신 것이다. 율법의 목적이 무엇이며, 율법의 역할이 무엇이며, 왜 주셨는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알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그 분의 빛에 비추어, 그분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게 해 주신다. 우리는 이 안목을 가지고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알려주시는 진리는 무엇일까?
1) 율법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심을 알려준다 율법은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6:4)”라고 말함으로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리석게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만들어 그것들을 좋아하고 섬겼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똑같이 좋아했다. 그래서 늘 곤경에 빠졌고 그때마다 들려오는 메시지가 무엇이었던가?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은 오직 한분 뿐임을 기억하라”는 것이었다.
2) 율법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심을 알려준다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 인즉...아무 일도 하지 말라...이는 엿새 동안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0-11)”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것을 혹시 우리의 것이라고 착각해서 살고 있지는 않는가? 세상은 결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얻고 일구어낸 것도 아니다. 진화된 것도 아니다. 모든 것들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만드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지금도 이것을 자기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오늘날의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20:2)” 성경의 표현대로 하나님께서는 높은 손으로 선민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셨다(출14:8). 그들은 아무 힘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그들을 이끌어 내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잊어버리고 산다. 왜 그럴까? 자기들이 우주에 인간을 보내고 인공지능(AI)을 만들어 내고, 인터넷을 통해 전지성을 향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더 놀라운 과학의 진보를 계속 이루어 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메뚜기에 불과한 존재이며, 그보다 훨씬 못한 존재와 활동일 뿐이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시90:1)” 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율법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떠는 자가 되어야 한다.
3)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붙잡고 계심을 알려준다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우주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만물에 비취고 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며 통치하고 계심을 인식하자. 하나님께서 잠시라도 영을 주시지 않고 거두어 가시면 짐승들은 다 죽을 수밖에 없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니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시104:29-31)”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하신 말씀처럼, 지금 이 시간에도 자신의 전능함을 이런 방면에서 나타내고 계심을 기억하자!
4) 율법은 하나님이 영이심을 알려준다.
율법은 하나님을 형상화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재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분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부정하는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거나 절하면서 하나님을 높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일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민들은 끊임없이 그 잘못을 저질렀다. 오늘날은 어떤가? 비슷하지는 않는가?
5) 율법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심을 알려준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도 자신의 거룩하심을 일깨우려는데 있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그런데 과연 누가 세상에서 거룩함을 규정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1:5)”,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악이나 죄나 무가치한 것들은 하나님께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오늘도 영원히 거룩하시고 영원히 정결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분이 얼마나 죄와 악과 그에 속한 모든 것을 미워하시는 거룩하신 분인지 제대로 깨닫고 살고 있는가? 그러므로 성도는 이런 율법을 깊이 대면해야만 한다. 율법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한다.
6) 율법은 예배를 요구한다.
율법은 하나님께 전적인 충성의 필요성을 알려준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출20:3,4)” 그 충성의 대상에 자기 자신을 두면 안 된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성취를 위하거나 예배하거나 하면 안된다.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아니다. 오늘날 자녀를 예배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자녀를 신처럼 섬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보다 자녀가 훨씬 더 중요한 것 같다. 교인들 중에도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을 위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 재산과 돈과 사회적 지위를 예배하며 그것을 위해 사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것들은 다 우상을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 우상을 두고 그것을 예배하는 것과 동일하다.
(1) 왜 그렇게 충성을 요구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출20:5). 하나님께서는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다른 신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우상은 전부 다 가짜일 뿐이다. 자신의 마음의 투영일 뿐이다. 시인은 말한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시 115:5,7)”. 우상에게는 능력이 없고 생명도 없으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지금 이런 말씀이 증명되고 있지 않는가! 아주 하찮은 코로나 바이러스만 생겨도 쾌락과 즐거움과 멋진 삶의 우상들이 무너지고 있지 않는가? 성도들은 이런 사태를 보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에게 있는 우상들을 깨닫고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오직 그분 만이 하나님이시오, 다른 신은 없기 때문에 그 분은 질투하신다. 똑똑한 서기관의 질문에 대답하며 지적하신 요점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 유대인들이 말하는 613개의 율법조항 중에서 첫째가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수백 년 동안 토론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즉시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막12:30)”. 이것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우리의 일부를 바쳐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다해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2)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강조하신다.
중요한 것은 율법의 구체적인 세부항목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이다. 우리의 모든 삶과 운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 전부를 원하 신다. 하나님께서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을 원하신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자신을 첫 자리에 두지 않아야 한다. 곤경에 빠지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께 달려가 삶의 끝자락을 조금 바치는 짓을 하지 말자. 항상 그렇게 살면서 곤경에 빠질 때만 하나님께 달려가서 미친듯이 부르짖지만 도움을 얻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도움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단정해 버리고 산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산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율법을 총괄하는 십계명을 다시 읽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안목과 사도들의 안목으로 새롭게 읽어야만 한다.
7) 율법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재판장임을 알려준다
율법의 강력한 강조는 하나님의 의이다.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 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20:5,7)”. 현대인들은 이 계명을 좋아하지 않고 믿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믿는다. 또 어떤 이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믿지 않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 주님은 공평하시고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죄악과 허물을 벌하시는 재판장임을 기억하고 살자.
(1)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세상을 심판하고 계신다
1, 2차 세계 대전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진노의 일부를 나타내고 계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당사자들과 그 후손들에게 일부 갚고 계신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난무하고, 탐욕과 정욕의 고삐가 풀려나고, 악행과 비행이 온 거리에 넘쳐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더러움에 내버려 두시기 때문이다(롬1:21-24). 지금의 코로나 바이러스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형벌의 일부로서 막아주시는 은혜를 내버려 두셨기 때문에, 인간 자신의 어리석음과 배교의 결과를 거두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 공평하신 재판장으로 지금도 세상의 죄를 벌하고 계심을 기억하자.
(2) 율법은 우리에게 최후의 심판과 형벌이 있음을 분명히 알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과 함께 끝내실 것이다. 성경의 전체 메시지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세상에 보내사 의로 심판하신다는 내용이다. 그 심판의 근거가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시금석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앞에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를 심판 하실 것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처럼,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인데,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즐거워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도 않고, 그를 사랑하지도 않고, 이기적이고 옹졸한 삶을 사는 사람 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모두 정죄 받을 것이다.
8) 그러나 감사하게도 율법은 하나님의 자 비하심을 선포한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음성을 들으며, 그 호소에 응답하는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되 풍성하게 베푸실 것이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들까지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분의 자비는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자신을 드리며 그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9)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알려주신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온 세상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버리지 않으셨다. 오히려 세상을 위한 계획을 세우시고 목적을 세우셨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게 이끌어 내사 나라를 이루게 하셨다. 그 나라를 통해 세상을 구속하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소망 없이 망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원수를 치셨다. 그리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창세기부터 신명기는 이런 계속되는 약속을 말씀해 주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언약이며,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하나님은 장차 임할 영광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신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자 백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해 결코 흔들리지 않는 계획과 목적을 세워 놓으셨다.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합2:14)” 그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나아가며>
구약의 율법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목적지까지 데려가실 것을 말씀한다. 지금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지금 순종하고 있는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는가? 지금 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매일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찾고 있는가? 율법의 첫째 돌 판은 우리와 온 세상을 우리 주와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영원하신 하나님 앞으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마음과 영혼을 다해 그 앞에 엎드리자. 가까운 이들과 이웃과 다른 이들을 향하여 늦기 전에 그 앞에 엎드리라고 호소하고 설득하고 전파하자.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철저히 알고, 그 관계가 견고하게 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편집자 주 : 2021년 9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4호에 실린 글입니다]
ⓒ 복음뉴스(BogEum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