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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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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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건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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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이 세상의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부단히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컴퓨터에서 모든 기록이 save되어 남는 것처럼, 우리 일생의 모든 삶의 경험이 우리 기억에 고스란히 save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내용을 다 기억해내지 못해도, 사실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우리 뇌리, 우리 기억 속에 저장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우리가 다 기억하지 못했던 우리들의 언어, 행실이 모두 밝혀질 것이고, 그 save된 것에 의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기억은 우리 조상의 타락과 함께 현저히 약해졌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타락이전, 아담이 수 만가지 동물들, 식물들을 이름 지었다는 것은, 수만가지 대상을 기억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그의 기억력이 엄청났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을 배우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크고 작은 일들, 힘들고 즐거운 경험들은 세상에 대해, 우리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배우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괴로운 일들을 통해 삶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 세상은 우리 힘만으로 살 수 없는 투쟁의 현장이라는 것, 더 나아가, 우리는 위로부터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배우게 된다. 나이를 들면서, 이 생각이 더 깊어진다.
옛날 한국의 신학교에서 들은 강의 중에 유독 곽선희 목사님의 강의가 오래 남았다. 목회와 삶에 대한 그의 지혜로운 강의가 수 십년이 지나도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곽목사님은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만사는 배워야 합니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목회 생활, 학교에서 가르치는 생활을 살아오면서, 가장 즐거운 일은 배우기를 즐거워하는 교인, 학생들을 만난 일이고, 가장 힘든 일은, 마땅히 듣고 배워야 할 사람들이, 배우려는 자세 없이 자기 주장을 내세울 때였다.
성경, 특히 구약 성경에서는 "청종하라"는 말씀을 자주 한다. 믿음도 지혜도 "듣고 따르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겸손이 무엇인가를 쉽게 정의할 수 있다. 겸손은 듣는 것이다. 겸손한 사람은 "들을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킨다. 듣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목이 곧은 사람,"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로 부른다. 무식도, 교만도, 듣지 않음에서 시작된다. 듣고 배우지 않는 사람은 고난을 통해 가르치는 수 밖에 없어,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가 되지 말라"고 충고(호소)한다.
지난 배움의 삶을 통해 기억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대학교 교양과정부에서 철학을 배울 때, 나이드신 전상현 철학교수께서는 삶의 불확실성을 강조하면서, "내일 만나요"라고 말하지 말고 "내일 만나는 방향으로 해요"라고 말하라고 하였다. 농담처럼 여겨지는 말이지만, 사고와 재난이 깔린 세상에서 무엇을 확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자칫 무모한 말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모르는 체 살고 있지 않은가? 사고와 재난은 잠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살까? 인간이 무엇을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조심스럽다는 것이다.
말을 조리있게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을 보면 존경심을 갖는다. 옛날 대학 시절 영시를 가르쳤던 송욱 교수님은 언어에 천재성을 가진 분이었다. 영시를 번역한다는 것은 가장 적절한 언어를 찾음으로 그 시의 가치를 드러낸다 할 수 있다. 학생들에게 시를 번역 시키고 나서, 엉터리? 번역을 듣고 나서 교수님은 특유의 농담으로 말씀하셨다: "번역을 듣다 보니, 이 시는 내가 알고 있는 시가 전혀 아닌데..." 적절한 언어를 찾아 말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삶은 설교를 할 때도 몹시 필요한 은사라 할 것이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던 것이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다. 첫째는 어떤 주제를 어떻게 접근해서 그 내용을 파악하는가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 접근 방법에 따라 상이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올바른 방법으로 접근하는 일이 중요하다. 공부한다는 것은 "방법론(Methodology)"를 배우는 것이라는 동료 학생의 말이 오래 기억된다. 과학의 세계에서도 동일한 대상을 접근 방법이 다름으로 다른 결론을 얻게 된다고 한다. 내 생각, 내 주장을 넘어 객관적, 학문적 자료를 통해 대상을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인식론(Epistemology)에 대한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뇌리에 깊이 남는 교훈이었다. 그것은 Kant의 인식론에 관한 것으로 "사람은 대상 그 자체를 알 수 없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내 생각, 경험을 반영시켜, 결과적으로는 대상과 다른 어떤 이미지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 대상과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정말 그 대상의 실상이나 가치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사랑의 감정이나 편견에 휘둘려서, 대상과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갖고, 그 이미지를 사랑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삶의 경험에서 내 안의 이미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때, 그 관계는 파탄에 이르기 쉽다.
이 인식론에 관한 교훈은 우리 신앙 생활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배우는 신앙 생활에서, 정말 하나님을 아는지? 아니면 내 상상 속에서 하나님을 그려내고 있는지, 그 차이를 알아야 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상상 속에서 편견과 오해가 섞인 지식을 갖고 있다. (하나님을 우상화한다) 성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정말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사람이다. 그런 감사와 경배의 마음 없이 하나님이나 성경을 안다는 것은 아직 자기 상상 속에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성령의 가르침과 조명 속에서 하나님, 세상, 인간, 나 자신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부단히 성령의 지혜와 계시를 구하며 살아야 한다. 무엇을 바로 안다는 것은 우리 영혼에 등불을 갖는 것과 같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안다고 하는 사람의 특징은 겸손에 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말할지언정, 무엇을 안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설익은 지식으로 무엇을 가르치려 하기 때문에 정작 귀중히 여김을 받아야 할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이 작은 것, 별것 아닌 것으로 취급받는 것 아닌가,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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