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학기에는 종말론을 가르치게 되었다. 기독교 조직신학에서 맨 마지막으로 취급하는 것이 종말론이라 하겠다. 그런데 다른 분야와 달리, 종말론은 통일된 체계를 찾기 어렵다. 그래서 영국의 신학자 Richard Baukham은 종말론을 가리켜, "Imaginative painting of the unimaginable"이라고 말하였다. "상상 살 수 없는 것을 상상해서 그리는 것"이라는 뜻이다.
종말론을 말할 때, 신자들은 요한 계시록을 떠올릴 것이고, 요한 계시록도 한 가지 해석이 존재하지 않고, 무수한 해석이 있어, 이 책이 오히려 난해하게 여겨진다고 한다. 그 중에 천년 왕국에 대한 해석도 여러가지여서, 정작 이 책이 증거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분은 요한 계시록을 자기 관심 분야로 알고, 이 책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분도 있다. 어떤 한국의 목사님은 자기 자신이 이 분야에 최고라고 말하는 것도 들은 적이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이 책에 대해 무지한가를 보여 준다. 어느 누구도 성경의 master는 없다. 다만 성경의 제자일뿐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주장하고 내세울 수 없다.
성경 앞에 우리는 겸손한 제자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를 찾고 구하는 마음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오래 전 교회에서 새벽 기도회를 위해 처음으로 요한 계시록 강해를 시작했다. 그 강해에 앞서 10권 넘는 종말론을 구하여 읽고 읽었다. 그 책 가운데 가장 도움이 된 것은 Anthony Hokema의 The Bible and the Future와 LLoyd-Jones 목사님의 책 Great Doctrine of the Bible이었다. Millard Erickson의 종말론 책도 성경적, 복음적 내용이라 추천한다.
종말론에 관심이 있는 분은 이 책들을 읽을 것을 권한다. 요한 계시록 해석의 중요한 단서를 이 분들이 똑같이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종말론을 언급할 때,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관심을 갖는 분들도 있다. 이 나라 이 민족이 종말의 때, 주님의 재림에 앞서 무슨 특별한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 자신이 쓴 "종말론 소고"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오래 전에 어느 site에 실린 글인데 google에 들어가면 찾아 읽을 수 있다. 주석(foot note)도 함께 썼는데, 주석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종말론에서 첫째로 중요한 것은 먼저 우리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뜻 안에서 하루 하루 살고 있지만, 언제 주님이 우리 생명을 찾고, 우리를 부르실 지 모른다. 하루 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살자는 것이다. 우리 죽음 후에, 주님 앞에 서서 각자가 자신의 삶을 주님께 한 사람, 한 사람 보고하는 시간이 우리 앞에 있다(롬14: 12). 그날을 미리 바라보며 사는 것이 종말을 대비하는 삶이 될 것이다.
우리 주님의 재림은 도적같이 임하신다고 하셨다. 언제 다시 오실 지 모르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사는 것이 종말을 준비하는 삶이다. 초대 교회는 이런 점에 있어 두고 두고 본이 되는 삶을 살았다. 신앙 생활을 가리켜 "종말론적인 삶(Eschatological Life")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 있다. 종말을 준비하며 살자는 것이다. 이 종말은 우리 죽음을 통해서도 오고, 주님의 재림을 통해서도 경험하게 된다.
그 끝을 미리 바라 보고 준비하는 신자라면, 이 세상과 육체에 속한 어리석은 욕심을 좇아 살지 않을 것이다. 하루 하루 심령이 깨어 나서, 주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원할 것이다. 오늘 새벽 말씀에는 "주님의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에 대해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것을 읽었다. 그 사람들의 신은 자기 배(belly)요, 그 영광은 저희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한다(빌3: 19).
이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혹 지도자로 행세하면서도 그 마음은 세상에 있고, 자기 배를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 추구하는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라 한다. 자기 배를 채우는 삶, 자기 성취와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삶이 장차 주님 앞에 어떤 가치를 갖는지 신자들은 미리 알고 살아야 할 것이다. 참 신앙 생활은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그 종말의 때를 항상 의식하면서 영적으로 깨어 사는 데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