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위상 회복을 위한 칼럼 (4)
은혜를 아는 자의 기준(4)
오래전 한국 총회에 총대로 참석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총회 상황은 잘 기억에 없었지만 총회 석상이 매우 시끄럽고 쌍욕이 오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무슨 안건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 같았는데, 그 옳고 그름을 떠나 욕을 하면서 싸움을 하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더욱 잊지 못할 상황은 그 뒤에 벌어졌다. 목사님 한분이 나와 마이크를 잡고 “목사님들 이게 뭡니까, 좀 수준 있게 놉시다. 서로 사랑하면서 회의는 할 수 없나요” 순간 목사님들이 환호를 하면서 박수를 치고 소리를 쳤던 총회 현장을 기억하고 있다.
사랑하자고 외친 목사는 졸지에 영웅이 된 듯한 느낌이라 할까. 과연 사랑하자고 외친 목사는 사랑하는 목사이고 싸우고 고함을 쳤던 목사들은 사랑을 할 줄 모르는 목사인가 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물론 싸우지 말자는 의도에서 한 말이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어찌 보면 말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고 그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은 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정죄되어 버린 것 아닌가 느껴진다.
언젠가 교회에 나이드신 여성도가 예배에 참석을 했다, 예배가 끝나고 강대상에서 내려와 인사를 하는데 느닷없이 나를 향해 “성령이 없구만, 기도가 약해,”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고 속으로는 감정이 상했지만 겉으로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신가 보네요” 그렇게 답변을 하고 넘겨 버렸다. 어찌 보면 기도한 본인은 의로운 사람이고 기도 안했다고 지적받은 나는 잘못된 목사가 된 것같은 느낌이 든 적이 있었다.
여기서 목사나 성도들이 실수하는 것이 있다. 사랑 안하는 목사들, 기도 안하는 목사들이라고 지적을 하는 목사나 성도들은 자기는 의롭고 올바르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사랑의 대상, 용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잘못된 목사로 심판해 버리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사는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들을 인도하고 보살피는 책무를 가지고 있다, 분명히 성경을 가지고 용서를 가르치고 사랑을 가르치고 온유함을 가르치는 것이 당연하건만 오히려 성경을 가지고 잘못된 사람을 심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성경이 사랑과 용서와 화목의 지침서가 아니라 잘잘못을 지적하는 율법서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물론 삶 속에서 맞고 틀림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힘의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면 법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고 맞고 틀림을 심판해 줘야 한다. 그래야 사회 질서가 유지된다. 그런데 그 법으로 심판하는 심판자가 사람이라는 것이다. 심판자가 어떤 유권해석으로 법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살인자가 되기도 하고 무죄가 되기도 한다.
똑같은 사건을 가지고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고, 환경과 시대에 따라 다르고, 남자냐 여자냐, 노인이냐 어린애냐에 따라 법적 해석이 다양하다, 한마디로 법도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법이 바뀌고 새로운 법이 나오고 법관의 도덕성과 합리성이 요구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목사라는 사람들이 자기가 기준이 되어 자기가 생각한 근거없는 논리를 앞세워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한다. 자기 성격에 맞는다거나 유익이 되는 목사라면 좋은 목사로 평가하고 나에게 조금이라고 해가 되는 언행을 했다면 목사 같지도 않은 인간이라고 심판해 버리는 기준이 전부 말씀하고는 거리가 먼 자기 자신 아니던가.
은혜를 아는 자는 자신이 배우고, 알고 느끼고 경험 것이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다.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다. 왜냐하면 난 죽었기 때문이다. 지금 살아가는 것은 전적인 은혜다. 그래서 내가 배운 지식이 기준이 될 수 없고, 내가 알고 경험한 체험들이 기준이 아니다. 만일 은혜를 놓쳐버리면 자기 것이 절대 기준이 되고 그 기준으로 상대방을 평가하게 되고 그 기준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만들었는가는 목사가 되기 전에, 은혜를 모를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기준이 되면 내가 배운 지식, 경험, 생각이라는 사상이 나와 틀린 저쪽은 죽여도 된다는 논리가 강해지고 그 논리가 죽고 죽이는 싸움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아닌가, 설령 우리가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얼마나 많은 목사들끼리 자신들이 배운 지식과 경험을 절대 기준으로 삼아 서로 옳다고 서로 심판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탄의 계략에 말려들었다, 우리는 선과 악을 몰랐다. 그런데 마귀가 우릴 유혹하여 선과 악을 알게 하였다. 그럼 과연 우리가 선과 악을 제대로 알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선이고, 어디까지가 악인가, 그 선과 악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선과 악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얼마나 하나님과 사람들을 정죄해 버렸는가, 하나님마저 심판해 버리는 심판자가 누군가, 바로 나, 내가 심판자요. 내가 하나님이 된 것 아닌가, 그래서 늘 나는 예외다, 바로 내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심판자이기 때문이다.
많은 목사들이 자신은 말씀을 전하는 자이기에, 하나님의 종이기에 얼마든지 잘못을 지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맞다 지적할 수 있다. 옳고 그른 것을 알려줄 필요도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잘못을 알려주기 전에 먼저 우리는 하나님 은혜를 깨닫고 세상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자로 살겠다고 세상 것 버리고 예수 믿고 목사가 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 인식이 없으면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았다는 목사들이 세상적 방법과 똑같이 서로 잘못되었다고 소리치고 서로 심판자가 되어 옳고 그름의 싸움을 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될 것이고, 또 이런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보면서 누가 목회자들이 지적하는 가르침을 받아드리겠느냐는 것이다.
은혜라는 기준이 없으면, 서로 싸우지 말고 서로 원수가 되지 말고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평화를 만들어야 할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싸우고, 한번 싸우면 화해할 줄 모르고 어쩌면 더 진영 논리에 빠져 세상보다 더 남남으로 갈라서는 목사들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목사라면 적어도 어떤 진영 논리의 옳고 그름보다 먼저 양쪽의 진영을 위해 희생하고 중재하고 더 나아가 죽음까지도 불사해야 할 목사들로 부름받은 자들 아닌가, 그런데 목사가 되어서도 세상과 똑같이 자신도 진영 논리에 빠져 자기는 옳고 저쪽은 틀렸다는 세상적 논리로 회귀한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목사들이 너무 많아 죄인은 없고 심판하는 목사만 있으니 어찌 목사들 위상이 높아질 수 있겠느냐 말이다
은혜를 모르면 당연히 자기 자신을 못 보는 목사일 수밖에 없고, 은혜를 모르니까 목사라는 까운만 입고스스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면서 사는 목사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과연 이런 뉴욕 교계의 목사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고 계실까,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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