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아침은 대체로 잘 먹는 편이다, 주로 과일과 견과류 그리고 달걀이 필수 음식이다. 점심은 가끔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많이 먹지는 않지만 푸짐하게 잘 먹는 편이다, 저녁은 주로 생선이나 야채 중심으로 아주 소량의 음식을 먹는다. 한마디로 영양이 골고루 함유된 음식을 골라 먹는 수준의 삶을 산다.
그런데 이렇게 적정 열량의 음식을 골고루 먹게 된 것은 얼마 안 된다. 전에는 그냥 무조건 많이 잘 먹었다. 한마디로 배가 터져라 먹고 후식으로 커피 마시면서 단팥 도너츠도 먹고 너무 배불러 소화제 먹고, 저녁때가 되면 갈비도 먹는 수준 높은 풍요로움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건강식으로 잘 먹고 잘 살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나, 과거 4-50년 전만해도 명절 때나 돼야 고기국에 쌀밥을 먹었고 결혼식장에나 가야 국수나 갈비탕을 먹었던 시절이 있었다. 정말 없어서 못 먹던 그때가 있었다.
언젠가 중남미 나라의 산골 빈민가에 선교여행을 다녀온 일이 있었다. 그때 초라한 모습으로 저녁을 먹는 애들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들이 먹는 음식은 또르띠야라는 옥수수 전병 같은 것과 멀건 스프가 그들의 저녁식사였다. 나는 그들이 먹는 음식을 보고 미안하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하였다. 먹을 것이 없어서 제대로 못먹고 사는 아이들을 보고 공평하지 않은 세상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런 현실을 경험하면서 세상이 불평등하다는 눈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로는 늘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염두에 두고 세상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난 하나님의 은혜로 잘 먹고 잘 산다. 그것으로 감사하면서 살면 되는 것인가, 그런 마음가짐만으로 사는 것으로 내 할 도리를 다 했다면 그건 스스로 착각하는 삶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신념이 생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불평등을 해결해보고 싶은 욕구가 일게 된 것이다.
불평등에 눈을 뜨고 보니 온통 세상이 다 불평등하다.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에 의하면 일년에 8억5천만명이 기아로 굶주리고 있다고 한다. 통계상으로 매일 25000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하니 1초에 5명이 기아로 죽어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난 먹고 또 먹고 좋다는 것들은 다 먹고 산다. 집안을 보니 먹지 않고 버리는 음식이 먹는 양보다 더 많은 것같다. 이렇게 버려지는 음식으로 불평등은 더욱 악화되고 있는 것 아닌가 느껴진다.
불평등하다는 눈을 가지게 되면서 얼마나 세상이 불평등한가 상상을 초월한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국에서도 불평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복지국가라고 하여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푸드스템프, 렌트비, 냉난방비 지원, 교통비, 등등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평등정책을 쓰고 있지만 수혜자격이 안 되는 사각지대에 있는 저소득층이 수백만 명이란다.
그래서 나라마다 복지 정책을 쓰고 있지만 아직도 너무나 많은 나라가 정치적인 인간의 욕심으로 불평등을 가속화시키고 있는 것도 한 몫을 한다.
더욱이 코로나19로 인해 굶주림에 허덕이는 나라가 더욱 심화되어졌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인해 극단의 빈곤자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각 나라마다 급증하는 불평등을 해결해 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우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뿐 아니라, 월드비젼, 국제기아대책기구, 유니세프 등 각종 후원단체, 복지단체들이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한마디로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으면 이 세상은 끊임없는 전쟁, 내전, 부패, 살인, 가난, 질병, 성폭행 등으로 인류전체를 위협하는 멸망의 길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기독교는 뭘 하고 있는가,
물론 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이 문제에 앞장을 서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보는 뉴욕에 한인 교회단체는 이런 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연합된 대책은 정말 미미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쩌면 평등은 중대사한 주님의 지상명령과 결부된 사안이 아니겠는가,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무슨 복음이 전해질 수 있을까, 굶주림에 죽어가는 사람들,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빵, 물, 약 등이 병행되지 않고 복음이 복음 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요로움에 은혜를 허락하셨다. 그 풍요로움이 이제는 차고 넘쳐 누리고 누리면서 산다. 과연 이렇게 풍요로운 삶을 우리들만 누리라고 은혜를 주신 것일까, 한번 우리들의 풍요로움 뒷면을 보자. 쓰레기더미에서 먹을 것을 구하고 있는 가난한 이웃나라 어린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먹는 것뿐이겠는가, 중남미에서 살고 있는 여자들은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여자들이 성폭행의 무법지대이고 억울하게 죽거나 실종되는 여자들이 수천명이란다. 우리가 그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있다면 받은 은혜로 뭘 한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요로움에 은혜를 주신 것은 받은 은혜를 공평하게 나누라고 주신 것이지 혼자 누리라고 주신 것이 결단코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 은혜는 나누라고 주신 것이다. 나눔을 실천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소멸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교회는 주신 은혜를 가지고 베풀어 줄 곳을 찾아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복음의 본질이 아닐까 여겨진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잘 먹고 잘 살도록 풍성한 은혜를 허락하셨을까, 생각해 보자.
이 풍성한 은혜를 은혜로 되갚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가 받은 풍성함을 평등하게 나누어 줄줄 알아야 한다. 생각해 보라, 내가 받은 은혜는 내가 받을 만한 것이기에 받은 것이고 넌 은혜를 못 받은 자이기에 못 받은 것이라면 은혜를 자기 공로로 여기는 미련함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의 이 풍성한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언젠가 당신도 풍성함이 없는 가난한 자로 전락하여 불평등을 한탄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유와 풍요로움은 있는데 평등이 없다면 기우러진 하나님 나라가 아닐까 보여진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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