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사님 아버님이 입원을 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며칠이 지난 후 심방을 가보니 의외로 건강이 빨리 회복되어져서 내일 퇴원해도 된단다. 권사님 부친의 손을 잡고 질병을 빨리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분이시기에 예수님 영접하고 남은 인생 건강하게 사시라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회복되면 뭐해요. 살 의미가 있어야지요. 죽는 게 답 아닌가요” 이 말에 순간 당황했지만 살아계시는 동안 아프지 마셔야지요, 그렇게 대답해 주었다.
병원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살 의미가 있어야지요” 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다음날 새벽 권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단다. 아니, 회복되어 오늘 퇴원하기로 했는데... 그날 밤 권사님 부친은 팔로 투여될 약물을 빼버린 것이다. 약이 투여되지 않자 몇 시간 후 숨이 멈춘 것이었다.
왜 주사바늘을 빼버린 것일까. 많은 의문을 가졌지만 삶에 의미가 없다는 그 말이 뭘 말하고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한마디로 더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개척 초기,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던 집사가 생각난다. 나만 보면 “목사님 살아야 할 의미가 뭐죠”늘 자기 인생은 목표가 없다고 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살아야 할 이유가 뭔지 생각하면 할수록 죽고만 싶다고 했다. 만날 때마다 그렇게 기도해 주고, 말씀으로 용기를 주고 함께 해 주었는데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집사의 질문 “삶에 의미가 뭐죠”그 말에 제대로 해답해주지 못한 죄책감이 오랜 시간 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나에게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도대체 사는 의미가 뭔가? 목사가 되어 주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반평생을 달려 왔는데, 쓸쓸함이 엄습한다. 목회에 대한 매너리즘에 빠졌다 할까, 오랜 세월 목회에 대한 타성에 젖다 보니 신선함이 사라지고 부정적 감정과 함께 무기력함이 온 것 같다. 그래서일까 죽음이라는 것이 머릿속에 맴돈다.
운동도 하고, 열심히 책도 보고, 공부도 하고 말씀 준비에 온 힘을 다하는 내 삶인데 문득 이렇게 열심히 한들 달라지는게 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렇게 오랜세월 지금에 성도들을 데리고 가르치고 인도해 왔지만 그들도 달라진 게 없다,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동일하다. 내가 무기력해진 것이 성도들 때문일까? 내 무기력으로 성도들이 무기력해진 것일까? 목회가 의미 없이 무기력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목사님들과 월요일과 목요일이면 열심히 걷는다. 그런데 요즘 와서 걷는 것이 조금씩 흥미를 잃어간다는 것이 느껴진다. 아내가 함께 걷자고 해도 걸을 마음이 없다. 마음이 힘들어서일까, 몸이 힘들어 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그렇게 열심히 걸어도 건강해졌다고 느껴지지 않아서 인지 잘 모르겠다.
걷기 운동이 끝나고 식사를 할 때도 몸 생각해서 먹는 것에 신경을 쓰다 보니 입맛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식사 후 목사님들이 잡다한 이야기들을 하는데 도대체 귀에 안 들어온다. 다 아무 득이 없는 말장난으로 밖에 생각이 안 든다. 더욱이 목사들이 하는 말들이 세상 사람들과 하나도 다른 바 없고, 다른 목사 험담이나 하는 의미 없는 이야기들이 마음을 편치 않게 할 적이 많다. 하기야 그런 이야기로 웃고 즐기는 것이 그래도 사람 사는 것 같다고는 하지만 목사들이 웃고 즐기는 것이 그 정도뿐인가 하는 안타까움이 생기면서 인생 사는 것이 이정도 밖에 안 되나 싶어 우울하다.
목사이기 때문에 난 요즘 우울해, 살고 싶지 않아, 목회가 무슨 의미가 있고 삶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누구에게 질문해야 하나, 답이야 뻔하다. 하나님 말씀 안에 있고 주님과 교제하는 삶 속에서 그 답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어쩌면 알고 있기에 남들에게 질문할 수도 없다. 질문해 보았자 답은 뻔하다. 기도 생활을 안 해서 그렇다고 하고 성령 충만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할 거다.
과연 기도생활의 부족 때문일까, 성령 충만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나만 이런 우울함과 무기력함이 있는 것일까, 과연 많은 목사님들이 평생 이런 질문 한번 안 던지고 늘 성령 충만해서 늘 기쁨으로만 살아서 우울증이라는 것은 없는 것일까,
나는 이 무기력을 통해 무언가를 보게 되었다. 사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감정을 감추어야 만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딸같은 이쁜 여성을 보면 묘한 감정을 느껴도 느끼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목사들은 더욱 그렇다. 어떤 내면에 감정도 표출하면 안 된다는 목회자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싫은 감정이 솟구쳐도 내색하면 안 된다. 분노를 표출하는 순간 목회는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목사님들이 성령 충만해서 감정이 솟구쳐도 돌부처처럼 있어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과연 그렇게 표출하지 않았다고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내면에서는 오히려 더 분노하고 더 욕정이 일고 더 우울함이 엄습하지 않았던가,
아!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우울하기도 하고, 열 받았으니 바닷가에 가서 쌍욕도 해보고, 성적인 욕구가 있는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도 인정해 보자, 그런 삶이 하나님 앞에 솔직한 내 모습 아니었든가,
목사는 인생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자신 안에 감춰논 사람들이 아닌가 보여진다. 목사의 옷만 입고 사는 그런 삶을 살면 언제든지 인생에 무기력함과 우울함이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 보자. 그냥 솔직히 벌거벗은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 앞에서도 또 스스로도 들어내 보자. 목사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것을...
삶의 의미를 목사라는 직분에서 또는 목회에서 의미를 찾지 말고 나라는 존재 자체에서 의미를 찾아보자, 나는 자격없는 존재였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재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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