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위로자 바나바
본문 : 행 4:36-37
이 세상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죄와 불의와 거짓이 가득차 있습니다. 악행이 밥먹듯이 자행되며 (잠 4:16-17), 나아가 선마저도 악으로 갚는 (시 35:12) 세상입니다.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남녀노소,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숱한 고난 가운데 고통받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슬픔과 아픔이 가득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같은 인생의 현주소를 욥은 한마디로 표현했습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욥 5:7). Yet man is born to trouble as surely as sparks fly upward.
참 마음이 아리지요? “응애”하고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와 주위 지인들을 기쁘게 했건만... 결국 평생을 “고해 (고생바다)” 가운데 빠져 헤매야 되는 처지가 되야 한다니... 기쁘고 즐겁고, 인생을 즐기며 행복 가운데 살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니... 참 안타깝지요?
그러나 우리 인생은, 특히 우리 신앙인들은 하늘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넘치는 위로를 받습니다. 나아가 주위로부터 위로받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과 척박한 이 세상을 위로하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사도 바울은 고후 1:3-7에서 무려 10번이나 “위로”comfort 를 언급하며 역설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위로자중 대표적인 인물인 바나바를 살펴 보며, 우리 모두 바나바와 같은 위로자가 되기를 갈망하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란 뜻으로 사도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는 터키 남쪽, 시리아의 서쪽, 소아시아와 이집트의 중간에 위치한 구브로섬 (오늘날의 Cyprus공화국)에서 태어난 레위지파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더함’이란 뜻의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이해하고 위로했던 사람이라 사도들이 그를 바나바라 불렀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위로의 헬라어 단어는 “파라클레시스 paraklesis”로서 이는 권면(encouragement), 위로(consolation), 혹은 도움(help)등의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즉 그는 권면하는 자였고 위로하는 자였고 또한 도움을 주는 자였습니다.
그러면 바나바는 어떻게 위로하였나요? 그는 먼저 위로가 필요한 사람 곁에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심한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 사도들과 교제하려 했지만, 교회 전체가 다 두려워 하며 사울의 예수님 제자됨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때 위로의 사람 바나바가 당황하며 난처해 하는 사울 곁에 서서 그를 위로하며 옹호했습니다. 그로 인해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하며 예루살렘을 평안하게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주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담대히 전할 수 있었습니다 (행 9:26-27).
오늘날 우리들도 우리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옆에서 위로하며 옹호해 주고 도와주실 수 있길 축원합니다. 가령 새신자가 교회에 처음 왔을 때, 새신자는 자신을 맞이하는 교인들과 분위기가 낯설어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옆에 와 자신에게 인사하며 다정한 말을 건낼 때 마음이 많이 위로가 될 것입니다.
또한 바나바는 필요할 때 사람들이 부르면 언제라도 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물질과 시간, 재주, 은사들을 통해 초대교회 형제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회적으로도 필요를 충족시켰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본문 37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그 당시 이방의 안디옥교회가 새로운 예수믿는 신자들이 많아져 도움을 요청하자 바나바는 불편을 마다하지 않고 안디옥으로까지 가서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나아가 바나바는 자기 일보다 남을 돕는 일에 더 우선하였습니다. 위로의 사람은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위로자는 주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어려움이 있어도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더 위로하는 사람입니다. 가령 그는 고향 다소에 머물던 사울을 위로하러 먼 길을 찾아 갔습니다. 사울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돌아와 사울로 하여금 주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선처했습니다. 크게 성장한 안디옥교회 교인들을 함께 돌보며 가르쳤습니다. 천하에 흉년이 들어 상황이 바뀌어 예루살렘 교회가 힘들어지자 힘을 합쳐 지원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바나바는 위와 같은 위로자의 삶을 통해 몇가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위로자 바나바”라는 영원한 축복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안디옥 교회, 그외 이방 도시들은 물론 오늘날에까지도 아름다운 위로의 빛을 비추는 이름입니다.
교회적으로 위로의 향기를 내품었습니다. 교인들에게 용기를 주고 변화를 주고 새힘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영광스러운 교회를 든든히 세웠습니다. 그를 통해 예루살렘교회는 물론 안디옥교회도, 그외 선교했던 이방교회도 든든히 세워졌습니다. 원망과 불평의 사람은 교회를 흔들지만, 위로하는 사람은 열심을 갖고 헌신하여 교회를 세웁니다. 안디옥에서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받기도 했습니다.
열매로는 새신자 사울을 얻었습니다. 그는 격려하는 위로자였기에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온 새신자 사울을 만나 함께 할 수 있었고, 그를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 사울은 후에 사도 바울이 되어 기독교 역사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고,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13권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사에 가장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위로자 바나바는 세상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된 대표적인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위로자 바나바처럼 위로의 사람이 되십시다. 우리 신앙인들은 위로의 사람이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때를 따라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이 세상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위로가 필요한 세상을 살고 있기에 우리는 받는 위로를 나눠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모두 교회에서 위로의 사람이 되십시다.
우리 신자들은 누구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문제 많은 이 세상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우기 주님을 닮기 위하여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사람들은 더 큰 영적 싸움을 하게 됩니다. 여러가지 시험과 핍박을 받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루에 밤과 낮이 있듯이 신앙생활도 낮처럼 밝을 때가 있는가 하면, 밤처럼 어려울 때도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에, 오순절에 단 1번의 설교로 3,000명이 주께로 돌아오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낮과 같은 충만한 때가 있었습니다. 반면에 헤롯왕에게 붙잡혀 7일동안 감옥에 갇혀 외롭게 죽음의 날을 기다리는 밤과 같은 때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우리 신앙인들은 언제든 사람이나 교회, 하나님 나라의 위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위로자 바나바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의 상을 받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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