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 엡 5:1-9
제 목 :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엡5:2) And walk in love, as Christ also hath loved us, and hath given himself for us an offering and a sacrifice to God for a sweetsmelling savour.(Eph5:2)
모든 생물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꽃이 피면 지는 시간이 옵니다.
나무도 자랐다가 고목이 되고 죽는 날이 옵니다.
사람도 태어난 날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의 시간이 있습니다.
사람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보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살아온 인생을 후회하는 사람입니다.
그림(글)은 그리다가 잘못 그렸으면 지우고 다시 그릴 수 있습니다.
길은 가다가 잘못 갔으면 돌이켜 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한번 지나가면 지울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는 일방통행과 같습니다.
한번 나에게 주어진 인생, 후회 없이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고 사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창1:27-28)
물고기에게 물이 근원이라 물에서 살아야 합니다.
나무는 흙이 근원이라, 흙에 뿌리를 뻗어야 거목으로 삽니다.
인간은 땅을 밟고 있지만 생명의 근원이 하늘에 있기에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헬라어로 인간 (人間)을 안드로포스(Andrepos) 라고 합니다.
하늘을 바라본다는 뜻은 인간은 하나님이 근원이라 위를 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3:1에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불행의 시작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면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함께 살아야 행복한데 하나님을 떠나면서 저주를 받았고, 에덴을 잃게 되었습니다.(창3:17-18)
아담이 그러했고,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가 그러했고, 요나가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을 떠날 때 시련과 고난가운데 살았습니다.
하나님 품으로 돌아갈 때 평안이 있고 안식, 보호와 길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만물은 각각 사는 방법이 다릅니다.
짐승이 사는 방법과 사람이 사는 방법이 다릅니다.
성도가 사는 방법과 불신자가 사는 방법은 달라야 합니다.
기호 식품도 다를 수 있습니다.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추구하는 생각이 다릅니다.
구원받은 영의 속한 사람은 겉 사람보다 속사람에 신경을 씁니다.
본문에는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사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성도가 사는 방법, 세 가지 말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주의 몸된 교회가 건강해지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십니다.
영에 속한 사람들이 사는 방법
1.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했습니다. (2절)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2절)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엡5: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한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1)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사랑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2절).
이 말씀은 자신을 제물로 바쳤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재물로 바쳤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히 위하여 화목제물로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롬5:10에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되었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세우신(롬3:25) 의도는 예수를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시려고 입니다. (롬3:26)
예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신 사랑입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죽어야 할 때, 누군가 나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대신 죽어준 사람이 있다면 그 은혜를 평생 잊을 수 있겠습니까?
백 억의 빚을 지고 감옥에 갇혔는데, 누군가 대신 갚고 꺼내 주셨다면 평생 어찌 그 사실을 잊겠습니까?
우리는 원죄와 자범죄로 지옥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들인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을 믿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천국갈수 있게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분입니다.
2)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사랑입니다.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2절)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가려면 많은 짐승이 제물로 죽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제사법 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이 열려 있고,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를 소개할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소개했습니다.(요1:29)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1서1:9)
사랑하면 사랑이 나타납니다.
말에서, 눈에서, 얼굴에서 나타나고 행동에서 나타납니다.
마음이 있으면 감정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주실 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격으로 감동으로 고백되어지는 것입니다.
감동이 없으면 주의 일도 노동이 됩니다.
감격이 없으면 사명도 억지가 됩니다.
사명을 잃은 사역은 힘이 겹습니다.
의무가 되어서 억지로 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주고 싶어집니다.
이번 터키 지진에도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의 무역 센터가 무너졌을 때 수없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9.11. 2001 테러)
구조대원들이 혹시라도 생존자가 있는 가 찾는데, 여인의 손 하나가 꼭 움켜쥔 채 잘려 있었답니다.
지나치려는 순간 뭐가 그리 중요하기에 죽어가면서도 마지막까지 놓지 못하고 있을까 해서, 여인의 손가락을 펴보니 손 안에 아기손이 있었답니다.
자신은 죽어 가면서도 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었던 어린자식의 손이 있었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이렇게 나타난 사랑이 독생자를 제물로 주신 사랑입니다.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 앞에 내놓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를 구속(救贖)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런 은혜를 깨달은 성도를 향해 사랑가운데 행하라고 했습니다.(엡5:2 중)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약2:17)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요,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목숨까지 초개처럼 버렸습니다.
그렇게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부로 서머나 교회 담임이었던 ‘폴리갑’ 은 온갖 고난을 다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협박을 하였답니다.
총독은 네가 예수를 모른다는 한마디 만 하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했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불에 태워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폴리갑은 주님은 내 팔십 평생 한 번도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떻게 주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내 입이 더러워지기 전에 어서 불에 태워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생명을 주신 구속의 은혜를 깨달았을 때, 아낌없이 희생하고 목숨까지 주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성도들은 주의 종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신앙이 자라는 것입니다.
주의 종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모습은 성도들에게 덕이 안 됩니다.
지도자의 올곧은 신앙은 순교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
목숨이 무서워 신사 참배를 가결했던 목사들의 신앙이 덕이 되지 않은 것처럼, 코로나로 예배를 중단한 사태 역시 회개할 문제입니다.
우리 목사님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모습이 살아있는 신앙인을 만듭니다.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의 신앙은 잠자고 있는 신앙을 깨웠습니다.
교회의 봉사는 우러나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도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위해 살길 원하십니까?
주님도 여러분을 한없는 은혜와 축복주시길 원하십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인간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성도가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2. 성도는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1) 성도는 구별된 백성입니다. (3-5절)
하나님이 창조사역을 시작 하실 때, 빛과 어둠을 나누사,(창1:4)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습니다.(5절)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할 때 불이 혀같이 갈라졌다고 했습니다.
갈라졌다는 것은 ‘거룩한 구별’ 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모든 것이 구별됩니다.
은혜가 임하면 어둠과 빛이 구별되고, 삶이 구별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삶 자체가 재물이요, 예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음 세대의 복을 약속하실 때, 내가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창15:8)
그러면 재물을 내게 드려라. 내가 불로 응답을 주리라.(15:8)
아브라함이 삼년 된 소, 양을 잡고 각을 떠서 제단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작은 새 한 마리는 통으로 그냥 놓았습니다.(창15:10)
아무리 기다려도 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잠간 조는 사이 솔개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쪼개지 않은 작은 새 위에 내리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이 솔개를 쫓았습니다.(창15:11)
아브라함이 큰 짐승은 각을 떠서, 드리면서 작은 새는 왜 쪼개지 않았을까?
너무 작아서 쪼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까짓 것쯤이야 했을 것입니다.
작은 새 한 마리가 응답의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430년 동안 고통을 받았습니다.(창15:13)
신앙은 각을 잘 떠야 합니다.
더러운 것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거룩함을 찾아가야 합니다.
신앙의 장애물은 하찮게 여기는 작은 것들이 축복의 장애물이 됩니다.
이 까짓 것쯤이야, 이정도야, 아닙니다.
하찮게 생각하는 것들이 은혜의 장애물, 축복의 장애물, 응답의 장애물이 된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쪼개지 않은 새 한 마리 때문에 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솔개(마귀)는 그 틈을 찾아왔습니다.
마귀가 역사할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더러운 귀신들은 물(말씀)없는 곳, 쉴 곳을 찾아다닙니다.(마12:43)
그래서 레20:26에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 지니라,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살전4:1)
2) 구별되게 살기위해 버려야 할 요소들이 있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3-4절)
이것을 육체적 방종이라 했고, 이런 것들로 부터 구별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갈수록 죄악의 도성으로 전락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육체적 방종에 빠지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고 했습니다.(5절)
이런 세상에서 성도는 어떻게 반응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나하나 똑바로 산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이러니깐 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구별되게 살려고 할 때,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주신 다는 약속입니다.
성도는 사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구별되게 살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하나님의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구별된 마음, 구별된 생각이 중요합니다.
시간도 구별되게 사용하세요.
날도 주의 날을 구별해야 합니다.
물질도 하나님의 것은 각을 떠서 구별해야 합니다.
내 것이라 생각하니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내 것이라 생각하니, 인색해 지고 많이 내면 교만해 집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종자 씨는 먹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사는 방법입니다.
3. 성도는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합니다.(8-9절)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절)
1) 어둠에서 살던 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8절)
전 에와 이제가 어떻게 다릅니까?
전에는, 예수 믿기 이전의 삶은 어둠이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사는 날부터 빛의 자녀입니다.
이제는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1서1:7절)
빛 가운데 살 때 주님과 교제가 있고 동행하게 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 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2)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9절)
농부가 수고하는 목적은 열매를 위해서 입니다.
주님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눅13:7)
빛의 열매를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착함입니다.
온유한 성품을 의미합니다.
의로움입니다.
공정하고 악을 버린 정직과 성실한 태도입니다.
진실함입니다.
말과 행위에 있어서 허위와 외식이 없는 정직함입니다.
허풍이나 거짓말은 속임수입니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빛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빛 가운데 살아갈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런 변화된 열매들이 삶속에서 맺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주는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주간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중심으로 4주간 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확증한 것 같이 우리도 자신을 향기로운 재물로 하나님께 드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정욕을 좇아가는 육신의 일은 하나님의 유업을 얻지 못합니다.
롬8:12-13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원한다고 했습니다.(요15:7)
예수님과 같이 빛의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복음뉴스(BogEum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