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의 성품에 참예하자!(3)_지식
본문 : 벧후 1:3-11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축복”은 물론 우리 연약한 신앙인들에게 “신적 성품에 참예하는 축복”까지도 주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8가지 성품을 갖도록 축복하십니다. 믿음 -> 덕 -> 지식 -> 절제 -> 인내 -> 경건-> 형제우애 -> 사랑
그런데 왜 하나님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신적인 성품으로서 지식을 주실까요?
본문 5절 “... 덕에 지식을”
간단히 답하면 우리의 신앙이 미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신은 신앙의 대상에 대한 지식이 전혀 필요없습니다. 그냥 자신이 지극정성을 드려 자신의 소원이 성취되면 무엇, 또는 누구에게 빌던 대상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출발부터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나는 ...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6).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음과 그로 인해 망함을 통탄하십니다 (4:1 후반, 6).
때문에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 알기”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6:3).
베뢰아 사람은 마음을 열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행17:11).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는 사람의 지극정성이나 열심보다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이 세상의 지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될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신적 성품인 지식을 덕에 더하게 될까요?
1.먼저는 하나님 말씀, 즉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행하는 분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시 1:1-2).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 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합니다 (딤후 3:15-17).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게 됩니다. 나아가 성경을 공부하면 좀더 깊이있는 의미를 파악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성경을 묵상하면 말씀을 내면화하고 개별화하게 됩니다. 즉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할 때 “기록된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 되도록 길이 열리게 됩니다. 로고스logos가 레마rhema가 되도록 통로가 생기는 것이지요. 특히 말씀을 묵상함으로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우리 모두 성경을 읽고 이해하며 묵상함으로 형통하는 삶으로 인도받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수1:8).
2.다음은 말씀들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읽고 이해되고 묵상된 성경지식이 삶에 적용된 경험적 지식으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생명과 축복의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지식은 크게 두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정보적 성경지식은 하나님과 말씀의 내용에 대하여 아는 것knowing about God and God’s words입니다. (2)반면에 경험적 성경지식은 하나님과 말씀을 직접 아는 것 knowing God and God’s words 입니다.
가령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이 익숙한 성구 가운데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이 말씀이 정말 자신에게 체험되셨는지요? 아니면 그동안 교회를 오래 다녔기에 그저 익숙한 내용인지요? 어느 장로님은 이 성경지식이 불과 0.5m 거리에 불과한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기까지 20년이 걸렸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성경의 내용에 대해 많이 알았을까요? 아니면 성경을 많이 알았을까요? 오늘날 모든 신학자들과 목사님들이, 교회 중직자들이 과연 성경을 많이 알아 하나님의 생명과 축복을 누리고 있을까요?
1) “알다”는 구약의 히브리어로 “야다, ”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장이었습니다. 오늘날 안수받은 젊은 목사님들이라고 여기면 됩니다. 수없이 많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삼상 2:12).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습니다(17절). 심지어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기도 했습니다(22절).
2) “알다”는 신약에 들어와 헬라어로 “기노스코, ”입니다.
천사가 나타나 처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1).
그러자 마리아가 놀라 되묻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눅 1:34).
“사내를 알지 못하니”는 무슨 뜻입니까? 마리아가 남자란 존재를 모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남자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체험해야, 즉 맛을 봐야 정말로 아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시 34:8 전반).
아니면 그냥 머리로만 “대하여” 이해할 뿐입니다.
이 세상의 유혹도 나름대로 맛있습니다. 달콤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유혹들을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정말 더 맛있는 예수님을 맛보면 이 세상의 맛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체험하면 이 세상의 “썰”들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만나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주님의 말씀들을 체험해야 합니다. 어느 성도님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니 담배는 물론 술도 끊어지게 되고 담배와 술이 아예 생각이 안난다 합니다. 세상에서 어디 놀러 다니는 것보다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 좋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꿀송이보다 달다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극적으로 예수님과 만났습니다encounter (행 9:4-5).
이어서 단식후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행 9:17). 이 직후부터 바울은 무엇이든지 전에 유익하던 것들을 다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더욱 쌓아 갔습니다 (빌 3:8-9 전반). 나아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갔습니다(14절).
이처럼 하나님을 확실히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더욱 더 넓게, 더욱 더 깊게 알기를 원하게 됩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자신을 넘어 에베소교인들에게도 이같이 되기를 기도하며 간구했습니다 (엡 3:17-19). 사도 베드로도 그의 유언서신이라 일컬어지는 베드로 후서에서 성자 예수님의 은혜와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권도했습니다 (벧후 3:18).
우리 모두 본문 5절 말씀대로 하나님을 아는 체험적 지식을 얻기 위해 날마다 더욱 힘쓰시기를 축원합니다. “더욱 힘써 ... 덕에 지식을...” make every effort
왜요? 하나님의 소원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곧 체험적 성경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차는 것입니다 (사 11:9 후반).
또한 이 방법이 우리 신앙인들로 하여금 악한 욕구로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형편을 피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무식하고 무지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아 신적인 성품을 체험하며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요 10:34-35). I have said you are gods ... to whom the word of God came
우리 모두 먼저는 하나님 말씀, 즉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묵상함에 힘쓰십시다. 다음은 말씀들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알아가십시다. 그리하여 경험적 지식이 보다 더 날마다 더해져, 하나님의 신성,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놀라운 축복이 “물댄 동산”처럼 더욱 더 차고 넘치시게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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