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본문 : 요 5:1-9
오늘은 지난 번 “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에 이어 요한복음에 기록된 7대 표적 중 두번 째와 세번 째 표적을 통한 복음, 복된 소식을 함께 나누려 합니다. 복음과 함께 그 동안 묶여 있었던 모든 율법의 저주, 마귀의 정죄에서부터 벗어나 영혼육의 자유를 계속 누리시게 되길 축원합니다. 특히 질병에서의 치유를 통한 해방의 기쁨을 구가하시길 축원합니다.
‘양문’은 예루살렘 북동쪽에 위치한 문으로서 바벨론에서 3차로 귀환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중건할 때 건축한 문입니다(느 3:1). 희생 제물에 쓰여질 양들은 바로 이 문을 통하여 성전 안에 반입되었습니다. 베데스다는 바로 그 곁에 있던 연못인데, 그 뜻은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한편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 3절 후반부터 4절까지의 본문은 각종 고대 성경사본들은 물론 헬라어와 영어 성경에도 없는 내용입니다. 원래 원문에는 없었던 것을 7절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항간에 믿어지던 전설을 난외에 첨가해 둔 것이 유독 한글성경의 본문 중에 삽입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Godet, Weiss).
즉 원래의 성경 본문은 3절 전반부에 이어 막바로 5절로 건너 뛰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이는 베데스다 연못 근처의 다섯 행각에 수많은 각종 병을 가진 환자들이 즐비하게 누워 있는 참혹하고 가엾기 짝이 없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거기 처량하게 누워 있던 38년된 한 병자가 예수님으로 인해 자비를 받아 즉시로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본문 9절 전반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할렐루야!
어떻게 이런 놀라운 병고침이... 어떻게 이같은 복된 좋은 소식이...
과연 오늘날 우리도 어떠할 때 이같이 모든 질병에서 나음을 입을 수 있을까요?
1. 첫째는 낫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을 가지십시오
본문 6-7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님의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는 물음에 38년된 병자는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우회적으로, 그러나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자신이 늘 해온 방식을 알려줌으로 표현했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마다 자신이 빨리 못에 들어 가려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자신을 들어 못으로 데려가는 사람이 없어 늘 다른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가는 안타까움과 좌절을 겪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38년이나 짓누르고 망가뜨리고 있는 병에서 간절히 낫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두번째 표적에서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신하가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는데,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긴 거리를 마다치 않고 가나에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간절함을 예수님에게 호소했습니다 (요 4:47, 49).
유다의 13대돵이었던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선지자 이사야가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사 38:1)는 최후통첩같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눈물로 통곡하며 간구했습니다.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 (3절).
우리 모두 이처럼 병에서 낫고자 하는 애절하고 간절한 갈망을 먼저 가지시길 축원합니다.
2. 그 다음 병에서 나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본문 6절 “예수께서 ...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본문 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본문의 병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인생 가운데 처음으로 듣는 주님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세주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말을 걸어올 줄도 모르는 38년 된 병자에게 먼저 말을 건네셨습니다. 그 병자는 자신의 병을 근원적으로 치유해 주실 '의사'(참고 마 9:12)가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나아가 그 병자는 자신이 아픈 것은 알았으나 그는 자신의 아픈 원인이 죄 때문이었던 사실은 더욱 몰랐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요 5:14).
이 표적을 통해 우리는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말을 건네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먼저 사람을 찾아 오셨고 먼저 말을 건네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랑은 값싼 동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지극히 무한한 사랑입니다.
제물로 희생될 양들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양문 옆에 있었던, '은혜의 집'이란 뜻의 베데스다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세상죄를 대속하려 죽임당하는 어린 양으로 들어 오셨습니다 (요 1:29).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는 '가끔' 물이 동할 때만 자비를 베푼다고 세간에 전해졌던, 그러나 사실상 이름에 걸맞지 않던 '자비의 집'을 이름 그대로의 '은혜의 집'이 되게 하기 위해 베데스다 연못과 같은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말씀을 통해 고치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두번째 표적에서 왕의 신하도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50절 전반). 히스기야도 이사야를 통해 병에서 낫고 15년을 더 살게 된다는 하나님의 치유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 38:4-6).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나요? 성경읽기나 기도, 설교를 통해, 특히 수양회나 부흥회 등 성령충만한 집회 등을 통해, 또한 꿈이나 환상, 성령님의 감동을 통해서 말씀을 들으시길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병나음을 입으려면 말씀대로 실행하십시오
본문 9절 전반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38년동안 병으로 인해 인생이 망가졌던 병자가 드디어 병상을 정리하고 베데스다 행각에서, 즉 환자들로 즐비한 병원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두번째 표적에서 왕의 신하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의 집이 있는 가버나움으로 내려갔습니다 (요 4:50 후반). 그런데 그가 내려가는 길에 자신을 찾아 올라 오는 종들을 만나 “아이가 살았다” (51절)는 복되고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치유의 말씀을 선포한 바로 그 때에 열기가 떨어졌던 것이었습니다 (52절). 할렐루야!
드디어 38년된 병자는 예수님을 만나 비로소 안식을 얻었습니다. 38년이나 그를 괴롭혔던 병에서 나음을 얻고 평안을 얻었습니다. 진정한 안식을 안식일에 얻었습니다. 본문 9절 후반 “...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막 2:27-28). 오늘날 이러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한 날이 바로 주일, 주님의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전심으로 병낫기를 간절히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치유의 자비를 베푸십니다. 말씀을 믿고 실행하는 자에게 큰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모두 간절히 병 낫기를 간구함으로 “자비와 은혜의 집”으로 오신 구주 예수님의 놀라운 은총을 입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어떠한 질병에서도 고치시는 “치료의 하나님, 여호와 라파”의 자비를 풍성히 받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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