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의 부활_복음5
본문 : 고전 15:20-22, 55-57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보다 더 기쁘고 복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왜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다른 무엇보다 기쁜 복음이 될까요?
1.첫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부활을 얻기 때문입니다 (본문 20-22절)
예수님의 부활은 허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첫번째 증거는 속이 텅 빈 무덤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 이른 새벽에 달려온 온 여인들은 무덤 안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예수님의 시신을 겹겹이 감쌌던 세마포뿐이었습니다 (요 19:39-40). 두번 째 증거는,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온 이후 최소한 열 번에 걸쳐 여러 곳에서 5백여명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실제로 만났습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게 될까요?
1) 우리 모든 인생들은 태어날 때부터 영혼이 죽어 있는 상태로 태어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한 원죄를 유전받기에, 창조주 하나님과 분리된 것입니다.
본문 21절 전반 “사망이 사람[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았으니...”
22절 전반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바울은 이 사실을 에베소서에서 보다 정확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1-3).
그런데 이같은 인생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해 구원받고 새사람으로 다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문 22절 후반 “...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 (엡 2:4).
2) 그 다음 이같이 구원받아 새생명얻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부활하게 됩니다.
본문 21절 후반 “...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마지막 아담 예수님]으로 말미암는도다”
이는 이미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10).
또한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에 직접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요 12:24, 32).
그런데, 이 예언과 말씀들이 예수님의 부활, 즉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확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됨으로써, 예수님의 대속으로 은혜받아 거듭 난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그에게 붙어 영생의 삶을 천국에서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인생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시기만 하였다면, 우리는 속죄는 받았을 지는 모릅니다. 나아가 구원받고 새사람이 될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영생을 누림은 보장받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신대로 3일만에 부활하심을 통해, 자신에 대한 수많은 구약의 예언들과 자신이 하신 말씀대로 씨를 보게 되고 영원을 살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끌어 많은 부활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있을 우리들의 몸의 변화와 영생을 보증하는, 너무나 놀랍고 기쁘고 복된 소식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부활이 정말 놀라운 비밀이라고 감탄했던 것입니다.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51-53). 또한 그는 자신이 이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빌 3:20-21).
우리 모두,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받아 새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하늘의 시민권을 받은 신령한 자로서 그 날에 예수님의 영광의 부활의 형체와 같이 변화받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만지는 “육의 몸”이 있는 것처럼 영광스런 “영의 몸”도 천국에서 확실히 갖게 되시길 부활의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왜 가장 기쁘고 복된 소식이냐 하면, 이 부활의 진리가 우리 신앙인들의 생활에 담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본문 15:55-57)
부활신앙을 가진 신앙인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만용이나 자학으로 말미암는 객기와는 다릅니다. ‘만용’은 상대를 과소평가함으로 자만이란 덫에 빠지게 되는 거짓 용기입니다 (가령 그깟 놈 한주먹도 안돼! 식은죽 먹기야!).
‘자학’은 자신의 파괴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자기포기입니다 (까지껏 죽기밖에 더 하겠어? 죽으면 죽지 뭐!).
그러나 “신앙의 용기”는 나는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그리고 두렵지만), 부활하신 강하고 능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롬 8:34-37).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상황이던 두려워 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인은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절박한 위기에서까지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기를 사모하고 기뻐하며 절호의 기회로 선용합니다.
“위기”란 단어는 “위험한 고비”란 뜻입니다. 위험과 기회란 두 단어가 합친 낱말입니다. 危 (위태할 위)와 機 (베틀 기), 즉 위험이 있을 때 또한 기회 (機會)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위기를 뜻하는 히브리어가 있습니다. “mash-ber” (매쉬버) 란 단어입니다. 이는 출산용 의자, 즉 고대에 산모가 출산시 앉았던 의자를 가리킵니다 => 즉 산모와 태아의 생명이 위험한 고비에서, 새생명을 탄생시키는 창조의 순간이 있다는 뜻입니다. 위기의 바로 그 때가 또한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박해가 한창이던 AD 190년에서 236년까지 살았던 히폴리투스 (St. Hippolytus) 감독은 부활절과 성도를 아래처럼 정의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성도의 부활로 끝납니다. [오늘 하루만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는 두 개의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신앙인들]의 부활 사이에 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는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믿음의 능력을 갖고 우리 [신앙인들 각자]의 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은 우리의 인생을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살다 우리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경험하게 되는 축복된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 죽었던 인생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살아나시길 간구합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따라 영광의 몸으로 장차 부활하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또한 현세에서도 매사에 담대하게, 죽음 앞에서조차 두려워 하지 않고 돌진해 나가는 우리 모두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 현세에서도 평안과 기쁨, 생명과 축복으로 살아가시길 부활과 생명의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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