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벧전4:12-19
제 목: 고난도 복입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But rejoice, inasmuch as ye are partakers of Christ's sufferings, that, when his glory shall be revealed, ye may be glad also with exceeding joy. (1 Pe 4:13)
신학대학 교수님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 하신 말씀을 학생들에게 수업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교수님! 요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런 말씀을 하시면 교인들이 싫어해요. 다 도망갑니다.
그냥 축복과 위로의 말씀을 전하셔야 합니다.
그 학생은, 한국교회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축복, 성장, 복지, 행복에 물들어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겪어야 하는 고난의 개념을 기피하게 된 현실을 잘 보여준다고 보입니다.
사실 1970, 80년대에 한국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한 원인이 여럿 있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이런 메시지들 때문이었습니다.
한국 사회가 굉장히 어려운 시기에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라는 말씀은 파워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정말 복을 받나 보다,’ 하며 많은 사람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실제 주님의 은혜로 삶이 변화되며 물질적으로도 번영을 누리게 되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1970년대 한강의 기적에 편승되어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도 발전하고 교회도 거기에 맞물려 많은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교회가 정체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가 너무 잘살게 되니까 ‘예수 믿으면 복 받아요.’ 라고 하면 ‘예수 안 믿어도 복 받아요.’ 라고 대답하며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이전에 말한 복은 세상의 복을 말한 것이고,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는 그것이 당연히 최고의 복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물질과 건강과 성공 등의 복을 기대하면서, 예수 믿으며 교회에 나왔고 실제로도 많은 경우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발전하다 보니까, 교회에 안 다녀도 부자가 되고 주식을 잘하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가 통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가 완전히 쇠퇴기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고난도 겪어야 합니다.’ 라는 메시지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인기가 없습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훈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연합을 원하십니다.
내 자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생각 감정 의지)을 착상시키는 훈련을 하는 것이 신앙 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은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바울도 여러 차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도 강조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딤후3:12).
예수님도 친히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길은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번영과 성공, 축복만 생각한다면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자기로 인해 많은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마5:1-12).
제자들에게는 드러내놓고 고난을 요구하셨습니다(막8:34, 마16:24).
성경에는 예수를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모양으로 당하는 고난과 박해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합니다.
베드로 전서는 다섯 장으로 구성된 짧은 말씀인데, 읽으면 읽을수록 보화가 들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그 안에는 보석 같은 복음의 진리들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의 주제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고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인 주후 60년대 오늘날의 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북부지역에서는 ‘흩어진 나그네, 하나님 아버지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1:1-2)이 고난과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겪은 고난은 본질상 무고히 당한 고난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와 거류민으로서 당하는 고난이 있다고 계속 권면해 왔습니다.
이런 권면으로 고난에 대한 교훈을 주면서, 고난의 필연성과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맞이하는 자세를 이야기 했습니다.(4:12-13절)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본질(14-16절),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과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17-19절)를 이야기합니다.
1. 고난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편안한 꽃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특별한 고난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12-13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연단의 한 수단으로 시험이 오게 되어 있답니다.
우리는 시험을 통해 연단을 받습니다.
그러니 시험이 올 때 이상한 일을 당하는 것처럼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상히 여기지 말라’ 는 ‘놀라지 말라‘(do not be surprised)로 번역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 뭔가 이상한 일을 대하는 것처럼 심리적으로 강한 반응을 보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20).
그것을 잘 깨달은 사도요한도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고 했습니다.(요일3:13)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고난을 겪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통계에 의하면 대학생, 청년 중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청년 인구의 3-4%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기독교 인구가 20%라고 했는데 실질적으로 요즘에는 15% 될까 말까 하고, 청년들은 3-4%밖에 안 된다는 합니다.
그래서 대학생 선교단체들이 많이 줄어들었답니다.
2) 이것이 오히려 기회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동안 박해나 고난을 별로 못 느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쇠퇴해서 사회에 박해당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때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불이익을 당하였습니다.
핍박을 받는 것도 있지만, 따돌리고 교류를 안 하려고 하는 게 박해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기뻐할 만한 상황입니다.
오히려 더욱 ‘세상의 소금과 빛’ 의 역할을 더 잘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실제로 겪는 현실입니다.
3) 연단은 인내를 낳습니다.
본문의 표현처럼 ‘불 시험’ 입니다.(12절)
고통스럽고 호된 시련이라는 뜻입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는 자세는 오히려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고난이 오면 마구 좋다고 하라는 말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빌4:4)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에 버금가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에서 오는 여러 박해를 통해 고난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뿐만 아니라, 그분의 죽음에서도 그분과 연합하는 사람들입니다(롬6:5-14).
그리스도인이 ‘불 시험’을 당하면서도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더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마25:31)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 기뻐 날뛰면서 즐거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3하)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한 사람만이 그런 영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의 본질입니다.(14-16절)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4-16절)
그리스도인들이 고난당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은 개인적인 일수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바로 ‘예수 의 이름’ 또는 ‘그리스도 인’ 이라는 이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 라는 말씀을 기억해야합니다.
예수님도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11-12)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지탄받고 욕먹는 것을 ‘십자가’ 라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건 십자가가 아니라, 그냥 잘못한 일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고난당했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모욕 받는 자격이 생겼다고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습니다. (행5:41)
당시에는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 자격을 얻었다.’ 라고 하며 기뻐하고 감사하고 영광스러워했다는 겁니다.
‘너희가 예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14절) 이라는 말씀은..
십자가에 두 강도가 함께 달렸을 때, 예수님을 향해 ‘욕 했다.’ 라고 한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막15:32).
이것은 다른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기 위해 잘못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조롱하거나 모욕을 쌓아 올리면서 크게 꾸짖는 방식으로 창피를 주는 행위를 뜻합니다.
혹시 우리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주변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우리에게 치욕을 안긴다면, 그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영광스러워 할 일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치욕을 당하면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 이 우리 위에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4절)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하면 영광스러운 것인데 자기가 잘못해서 욕먹는 것은 피해야 할 일입니다.
한국에 갔을 때 택시를 탔는데 기사에게 택시를 오래 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오래 했다고 하시면서, 자신은 사실 사회복지사라고 했습니다.
옛날에 택시를 하다가 다른 일들을 했었고, 그러다 어려움을 당하여 다시 택시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내가 사회복지사로 복지 계통의 일을 하며 투자했는데, 목사에게 사기를 당해서 돈을 다 잃어버리고 택시로 다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창피해서 목사라고 이야기를 못 했습니다.
아니, 목사도 사기를 칩니까? 라고 했더니,
예, 요즘 그런 목사들 많아요. 라고 해서 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기독교의 위상이 옛날 같지 않고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런 경우에 욕먹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목사로서 예수님까지 욕먹게 하니까,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한다면, 너무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고난 대부분이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잘못 때문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 차이점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1)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은 영광스럽습니다.
그러나 내가 잘못해서 욕먹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누구든지 살인자로, 도둑으로, 악을 행하는 자로,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서 고난을 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15절)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잘 살펴야 합니다.(2:12).
특히 살인이나 도둑질 같은 가증스러운 범죄가 아니더라도, 남의 일을 쓸데없이 지나치게 간섭한다든지 믿음을 손상하는 흔한 행동과 태도로
쉽게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차원 더 높은 도덕과 윤리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요즘은 크리스천들의 윤리의식이 더 낮습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청년들의 윤리의식이 낮은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자기의 잘못이나 악행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무고하게 고난을 당한다면 괜찮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16절)’ 이라는 말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14절)은 같습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악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즉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난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 소아시아 북부지역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고난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고난을 무고히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 받는 경우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고 가르친 것입니다.
‘부끄러워하다.’ 는 말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부끄러워하지
말라’ 하고 명령하는 베드로 자신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서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만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명예가 있다는 진리를 뼛속깊이 알고 있는 이가 없었습니다.
과거의 일이기는 하지만 베드로에게는 정말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잡혀가신 날 밤에 대제사장 집, 바깥뜰까지 따라갔었습니다.
그를 알아본 여종과 사람들 앞에서 세 번씩이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라고 예수님을 부인한 적이 있었습니다.(마 26:31-35, 69-75).
그때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고는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 후 바닷가에서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며 용서를 선언해주셨습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이제는 주님의 교회의 장로(5:1)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더욱 (내가 젊은이였을 때처럼) 부끄러워하지 말고 현재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6절) 하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빌1:20)
이 말은 그리스도의 박해자에서 전파자로 변화된 바울의 고백입니다.
3.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19절 하) 필연적으로 고난을 겪어야 한다면, 종말론적인 시각과 기본적인 자세를 갖고 고난을 견디어내야 합니다.(17절)
이 말씀이 바로 그러한 종말론적인 시각과 기본적인 자세로 고난을 견디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벧전5:1)
여기서 ‘장로’ 라는 말은 교회의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을 ‘그리스도 고난의 증인’ 이자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 로 소개합니다.
그는 당시 고난당하던 소아시아 북부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론적인 관점을 담은 권면을 전합니다.
종말론적이란 말은 종말을 생각하며 현재를 이야기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끝이 어떻게 될지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현재를 보라는 것입니다.
1) 그것이 종말론적 관점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4:7)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으니까, 앞으로 얼마 더 있어야 세상이 끝날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 끝을 생각하며 정신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고 명령합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17하) 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집(의인)과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죄인)을 대조하면서(17-18절),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받을 심판과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직면하게 될 심판을 비교합니다.
박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을 것이지만, 박해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종말론적 관점, 즉 마지막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지금을 볼 수 있다면 지금의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19절)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거나 선을 행하는 가운데 있더라도 이런 종말론적 관점을 가진 채로 우리의 영혼을 미쁘신(신실하신) 창조주께 의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실수가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부러 괴롭게 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고난을 통해 우리를 연단시키십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야 하고(2:12), 선을 행함으로써 고난을 받아도 참아야 합니다.(2:20).
또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아야 하고(3:17), 열심히 선을 행해야 합니다.(3:13).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영혼을 의탁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미쁘신 분, 즉 신실하신 분입니다.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마귀를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9절)
잠시 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벧전5:7-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슬람 국가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노골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합니다.
이들은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노골적으로는 가해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여 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으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18-19절)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아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요15:18-19)
당시 소아시아 북부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세상이 적대적으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성경적 가치관이 위협받는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얼마든지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비난당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14, 16절).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기억하면 됩니다.
부당한 박해나 고난을 당할 때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16절).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면 됩니다.(19절).
끝까지 견디면 됩니다.(막13:13).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 아들이 아니니라.(히12:8)
징계는 훈련입니다.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13절, 마5:12).
피할 수 있으면 합법적 수단을 통해 피할 길을 찾으십시오.(마10:23)
또한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마5:44, 행7:60)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고 난 후에 부자가 되고 더 큰 복이 입하지 않았습니다.
살인마 헤롯 왕이 메시아가 유대 베들레헴이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의 말을 듣고,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다 죽이라 했습니다.(마2:1-2)
하나님께서 아이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13절)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겠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도다. 예수가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하심이라.(벧전1:6-7)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겼어야 합니다.(행14:22)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고난의 영이 임하여 고난도 쉽게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 신앙의 최종 목적지는 새예루살렘(시온성)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노아의 방주 같은 교회를 통하여 훈련받게 하십니다.
메시야 나라 훈련학교의 교과서가 예수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고 하셨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23:10) 욥과 같이 하나님의 인정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복음뉴스(BogEum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