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비전을 성취케 하는 용기
본문 : 민 14:1-10
하나님은 비전을 이상 중이나 꿈에서, 또는 환상으로 계시하여 주십니다. 비전은 우리 “믿는 자에게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꿈이자 청사진”입니다. 때문에 절대로 비전은 우리 스스로 찾거나 스스로가 만드는 그림이 아닙니다. 소위 비전 메이커 (vision-maker)란 단어는 적절한 어휘가 아닙니다. 또한 비전은 일개인의 세상에 대한 스스로의 꿈, 즉 청운의 꿈이나 야망(ambition)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이 없는 사람은 방자히 행하므로 결국은 망합니다 (잠 29:18 전반). 비전이 없는 크리스천은 소망과 목표가 없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아직 비전이 없는 분들은 비전을 보여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비전을 받으면 희미했던 인생의 방향이 선명해집니다. 비전을 통해 앞으로 나의 인생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끝이 아닙니다. 받으신 비전을 따라 의미있고 축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여정이 앞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한갓 일장춘몽이나 몽상이 아니라 실현되는 축복이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때문에 비전을 갖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비전을 이루려는 용기를 갖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가졌던 가나안 땅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은 10명의 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2명 외의 나머지 10명의 정탐꾼의 보고(13장)은 그 땅을 차지하려면 가나안 일곱족속과 싸워야 하는데 그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직접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보았음에도 현실의 어려움 앞에서 비전을 잃어 버렸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같은 일은 오늘날 우리들의 인생에도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된 용기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만용이나 자학입니다. 참된 용기는 우리를 얼어 붙게 만드는 두려움을 밀어 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그런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통해 그 답을 얻으시는 우리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1.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올라가 싸우면 이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본문 9절)
두 사람의 용기는 신앙에서 나오는 용기였습니다. 신앙의 용기는 만용이나 자학과는 다릅니다. 만용은 상대를 과소평가함으로 자만이란 덫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사람은 적을 깍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자학하지도 않았습니다. 자학은 자신의 파괴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용기는 “나는 약하고 부족하지만 (그리고 두렵지만)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때, 즉 동행할 때 나를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좇는 믿음의 용기를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비전을 온전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2.그러면 이러한 신앙의 용기는 어떻게 해야 갖게 됩니까?
먼저 이성적 계산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적 계산은 도움은 되지만, 매이면 신앙과 비전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비전이란 현실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을 악평한 정탐꾼 10명은 현실적 계산을 했습니다 (민 13:28-29). 그러한 이성적 계산에 의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보기에 메뚜기” (33절) 같게 되고 말았습니다. 용기와 비전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탐한 날 수를 년으로 환산하여 40년간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비전을 상실케한 10명의 정탐꾼들은 재앙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나는 비록 연약하고 부족하나, 하나님이 하신다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도록 하나님의 뜻에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를 위해 어떻게든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본문 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바로에게 나아가는 모세나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이나, 18만 대군을 맞아 일어서는 기드온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미국 남북전쟁시에 링컨 대통령은 하나님이 내 편에 서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 편에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용기의 크기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크기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 (창 18:14)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크게 외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이처럼 비전의 성취여부는 바로 이 믿음의 용기에 달린 것입니다. 용기가 없으면 비전은 한낱 몽상에 불과하고 맙니다. 그러나 용기를 갖고 주어진 비전을 성취하려 할 때, 비전은 하나님으로 인해 결국 이뤄지고 맙니다.
본문 10절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우리 모두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따른 이성적 계산에 옭매이지 마시길 축원합니다.
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더욱 알아,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춰 나가시길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비전을 온전히 이뤄 드리는 용기의 신앙인들 모두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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