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1장 3-11절 말씀 묵상 [민경수 목사]

베드로후서 1장 3-11절 말씀 묵상 [민경수 목사]

복음뉴스 0 08.06 08:26

제목 : 신의 성품에 참예하자!(4)_절제

본문 : 벧후 1:3-11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4자성어가 있습니다.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뜻으로, 중도를 지킬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처럼 뭐든 지나치면, 과하면 안좋습니다. 과로(일찍 죽음), 과식(성인병), 과속(사고), 과소비(카드빚), 과몰입(미디어중독) 등등...

이는 자신이 모두 실천하지는 못해도 누구나 받아 들일 수 있는 견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절제의 전부일까요? 사실 이 정도 절제는 일반인도, 나아가 일반 다른 종교인들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인즉 세상이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절제와 성경에서 말하는 절제는 의미가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는 절제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어떠한 절제의 축복을 주시려 할까요? 과연 신적 성품으로서의 성경적 절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첫째로 내가 임의로 정한 경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넘지 않음입니다

위키낱말사전은 절제란 정도에 넘지 아니하도록 알맞게 조절하여 제한함이라고 정의합니다. (節制 알맞을 절, 부릴 제). 

세상에서 말하는 절제의 특징은 경계를 자기가 정하고 그 선을 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적 성품으로서의 절제는 그 경계를 하나님이 정합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우리들이 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넘지 않고 순종합니다.

“...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 (욥 38:8-11).

그런데 오직 피조물중 인간만은 그 한계를 넘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 말씀하셨는데 먹습니다. 이처럼 인류 최초의 범죄는 절제 못해서 발생한 것입니다. 넘지 말라는 경계를 넘어간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최초의 살인인 가인의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도 절제치 못해서 생긴 죄악이었습니다. “...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절제치 못하고 한계를 넘어 갔습니다. 

십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경배 대상의 경계)” “안식일을 지켜라” (시간의 경계)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탐심 (행동의 경계)”등 모두 절제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갑니다. 바로 이것들이 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씀의 경계를 넘지 않는 자신과 아볼로를 보고 배우라고 권면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 4:6). 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복되게 하는 경계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선, 하나님 말씀의 경계를 넘지 마시길 간구합니다. 그리하여 신적 성품인 절제를 신앙에 더하시는 축복된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2.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성경적 절제는 내가 스스로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조절되는 것입니다

일반적 의미로서의 절제는 “스스로” 조절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self-control”이라고 대부분 번역합니다. 위키낱말사전은 “절제는 스스로 조절함”이라고 정의합니다 “절제는 조정 또는 자발적 자제로 정의된다”고 위키백과사전은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절제는 영어로 self-control이 아닙니다. 사실 이는 잘못된 번역입니다. 영어 self-control의 뜻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절제가 아니라 “자제 自制, 즉 스스로 제어함”입니다.

본문의 절제를 뜻하는 헬라어 원어는 “엥크라테이아, ”입니다. 이는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엔(, 안에) + 크라토스(, 힘) 즉, “힘 안에”가 원어적 뜻입니다.  

여기에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절제할 수 있을 것인가? 내 힘으로 하나님이 정해준 한계를 넘지 않을 수 없지만, 즉 죄악을 끊을 수 없지만, 주님의 “힘 안에서” 성령님의 “힘 안에서” 하나님의 경계를 넘지 않을 수 있다는, 즉 죄를 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죄를 이기도록 스스로 조절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절제란 “self-control”, “자기 조절”이 아닙니다. “하나님 조절” God-control입니다. “예수님 조절” Jesus-control입니다. “성령님 조절” The Holy Spirit-control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범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요1서 3:6)). 은혜 아래 있으면 죄가 주관치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롬 6:14; 갈 5:24).

성령의 능력으로 죄의 행실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롬 8:13).


때문에 우리가 절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절제하려 해도 죄악을 이겨내지 못하는 존재임을 탄식했습니다 (롬 7:21-24). 그런데 이처럼 탄식했던 사도 바울은 연이어 놀랍게 탄성을 지르며 예수님으로 인해 이겨낸다고 고백합니다 (25절 전반). 


우리도 아무리 유투브를 보지 않으려 결심해도 안되지요?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핸드폰으로 유투브 보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게임도 마찬가지잖아요? 

술, 담배, 마약 등 죄된 습관들도 스스로 절제가 안되지요?


그러나 은혜받고 성령충만해지면 어떻습니까? 저절로 절제가 되지요? 하나님 말씀을 읽고 이해하고 묵상하고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면 어떻습니까? 

수련회, 부흥회 참석해서 은혜 충만히 받았습니다. 그 때 한 동안 어떠했었습니까? 죄가 틈타지 못하게 막을 수 있었지요? 물론 영적 요요현상이 생겨 다시 옛날처럼 돌아가기도 합니다만...


이처럼 “성경적 절제”는 절대 금욕이 아닙니다. “아 참아야 하는데, 이거는 아닌데...”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며 무릎을 마구 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는 방법은 스스로의 자제력이 아닙니다. 은혜 아래서 삼위 일체 하나님-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신적 성품인 절제는 또한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아홉 번째 마지막 성령의 열매가 절제 아닙니까? (갈 5:23) 이 성령의 열매는 내가 수고해서 맺는 열매가 아닙니다. 이처럼 신성, 즉 신적 성품중 하나인 절제 또한 자신이나 세상으로부터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처럼 내가 금욕하며 내 힘으로 조절하려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 안에서 조절됨으로 진정한 절제를 누리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결론

우리 신앙인들 모두는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절대 넘어가지 마시게 되길 간구합니다. 

우리는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죄의 소욕이 하나님의 힘으로 절제되어야 합니다. 

또 인간적인 생각과 말들이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절제되어야 합니다. 세상적인 생각과 말들을 통해 사탄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특히 성령충만함으로 인터넷 사용이 절제돼야 합니다. 유투브가 우리의 영성을 소진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신적 성품으로서 성경적 절제를 더해 가시길 축원합니다.

1.첫째로 절제의 경계를 내가 적당히 타협하여 정하지 말고, 이미 하나님이 정하신 그 경계를 넘지 않으시길 기도합니다.

2.마지막으로, 내가 내 힘으로 스스로 조절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힘 안에서” 조절되시길 간구합니다. 

self-control이 아니라 God-control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로서 범죄치 않아 실족치 않게 되시길 바랍니다. 

본문 10절 후반 “...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fall 

결코 추락하지 않게 되시길 ..., 축복된 신적 성품의 삶을 계속 살아가시게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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