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보았던 계시라.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이사야 1:1은 이사야 전체(66장)를 포괄하는 표제(superscription)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시대적 배경을 소개한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보았던 계시라고 밝힌다. 필자는 이미 ‘이사야(The Book of Isaiah)-서론’, 2. 이사야의 시대적인 배경, 2) 앗수르 제국의 팽창에 맞선 유다 왕들의 반응에서, 개략적으로 4명의 유다 왕이 앗수르 제국의 서진 팽창에 맞서서 어떤 반응과 선택을 하였는지 살펴보았다(복음뉴스 2022년 12월호, Vol. 018, 24∼25페이지를 참고하라). 여기서는 왕들의 시대적 배경을 생략한다.
이사야가 보았던 “이상”(개역) 혹은 “계시”(개역개정)라고 번역한 것에 대한 히브리어의 의미를 확인하고자 한다. 본래 구조형(cstr.) 명사로서 ‘이사야의 이상/계시’(vision of Isaiah)라는 말이다. 특히 히브리어 사전은 ‘이사야서의 표제(title)로써 이상/계시’라고 규정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 단어를 시각적인 형태로 주어진 것이라고 반드시 제한시키기보다는(예로서 단 8:2 “환상”처럼[표준새번역 개정]) ‘다바르’(∼word)와 같이, 하나님께서 계시한 진리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포괄적으로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개역개정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상’이 아닌 ‘계시’라고 번역한 듯하다.
이사야 1장은 이사야 전체(66장)에 대한 서문 혹은 요약이니 만큼, 그 압축성 내지 암시적 표현은 너무나 뚜렷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또한 동시에 이것(1장)은 예언이 확대될 가능성 내지 발전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한다면 이사야 1장은 심판적인 요소가 뚜렷하여 고소장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만일 그 대상들이 받아들이고 회개를 동반한다면 초대장도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사야 1장의 예언이 (긍정적으로) 발전할 가능성 또는 (부정적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다.
이제 필자는 이사야 제1장의 구조 혹은 흐름을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여기서 이렇게 이사야 1장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사야 1:1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시형(poetry)이라는 것이다. 구약 시형의 대표적인 기법(간결, 평행, 유사성…)을 고려할 경우, 두 곳에서 비슷한 명령형(“∼이여, 들으라. ∼이여, 귀를 기울이라.” 2, 10절)을, 마지막에는 절규(“어떻게 ∼되었는가! 이제는 ∼뿐이로다!” 21절)가 뚜렷하게 단락을 나누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각 단락의 주제는 뚜렷하게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관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1. 이스라엘의 과거(past) 역사에 대한 평가(1:2∼9)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과거란 막연한 과거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출애굽과 시내 산 언약에서부터 지금까지, 즉 이사야 시대(주전 8세기)까지를 가리킨다.
(2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이는(For) 여호와께서 명하셨기(피엘) 때문이로다. 자식을(도치=강조) 내가 키우고(피엘) 자라게(폴렐) 했더니, 그들이(도치=강조) 나를 거역하였도다.”
먼저 2절은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선지자가 왜 갑자기 하늘과 땅을 부르고 있는지 독자들은 고려해야 한다. 바로 법적인 증인으로 하늘과 땅이 소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오경 마지막에(=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입성 직전에 모세를 통하여 율법과 언약을 갱신하였다. 그리고 임종 직전의 모세는 이스라엘의 미래 세대에 대하여 굉장히 비관적이었던 점을 독자들은 기억한다(신 4:25∼29, 31:21∼23, 30을 주목하라). 특히 이스라엘의 후세대가 훗날에 당할 재난과 환난에 대하여, 모세는 당시 세대에게 증거의 노래(The Song of Moses)를 부르게 하였고 후세대가 당할 재난과 환난에 대한 법적인 증인은 바로 하늘과 땅이었던 것이다(신 32:1을 확인하라).
이런 관점에서 이사야는 하늘과 땅을 법적인 증인으로 소환하면서, 그 당시 이스라엘 세대가 바로 모세가 증거의 노래를 통해서 증거 하였던 재난과 환난을 당할 위기에 직면한 그 세대인 것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한편 2절 후반부는 아주 강조적인 표현으로 당시 세대를 평가하고 있다.
“자식”(sons, 바님)이 강조(도치)되고 “그들”(they, 헴)이 강조(도치)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아들들로 양육하였는데,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어 어순상 ‘주어+동사’가 일반적으로 먼저 나오고, 그 뒤에 다른 요소가 나온다. 만약에 ‘주어+동사’보다 먼저 나오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도치되어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곧) 자식들을 내(여호와)가 키우고 자라게 하였더니,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고 고소하는 것이다.
(3절)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분별하지) 못하는구나.”
지극히 당연하게 기대할 수 있는 짐승과 주인의 관계를 훨씬 뛰어넘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얼마만큼 일그러져 있는지를 선지자는 고발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있어서 이스라엘은 태생(구속사)적으로 ‘아들’의 신분이었을(출 4:22, 19:4∼6)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 사랑을 뿌리칠 수 없는 존재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노래에서 예견되었던 것처럼(신 32:5, 6, 18, 19), 역시 이스라엘 후세대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결코 아들(자식)이라고 칭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짐승보다 지식과 분별력이 없는 그런 자식이라고 꼬집고 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당연하게 기대할 수 있는 순종적인 짐승들보다 훨씬 못한 반역적인 자식(유다)이라고 밝히고 있다.
(4절)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렸도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아주(피엘=강조동사) 무시하였도다. 그들이 뒤로 멀어졌도다.”
슬프다!([히] 호이, Alas, 화로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반역한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느낌(감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특히 네 가지 형용사-명사의 연결어구는 그들의 특권이 어떤 식으로, 얼마만큼 변질되었는지를 알려준다. ‘범죄한(=목표를 빗나간, 잘못된) 나라’라는 말은 ‘거룩한 나라’(출 19:6)에 대한 반전을 가리키며, ‘허물진(=죄로 무거워져 있는, 죄에 짓눌려 있는) 백성’은 ‘열방 중에서 유일하게 속량함을 받은 백성’(삼하 7:23∼24)에 대한 반전의 모습이다. ‘행악의 종자(씨).’ 본래는 아브라함의 자손(씨)을 가리키는 아주 긍정적인 용어였지만(롬 9:7을 참고하라), 이제는 악을 행하는 자들의 씨(원조)가 되었다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씨앗의 변질 정도가 아닌 완전히 다른 종류의 씨앗이 된 것을 뜻한다. 즉 망쳐진 다른 씨앗이 되었다는 뜻이다. ‘부패한(=썩어서 못쓰게 된, 망쳐진) 자식’이란 말은 본래적으로는 하나님께 아주아주 특별한 존재였던 이들(자녀)의 부패하고 망가진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세 개의 동사적인 표현들 역시 눈여겨 볼만하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렸다”, 여호와를 “찾는 것”(암 5:4)의 반대적인 의미로써 의도적으로 여호와를 멀리하는 것을 뜻한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아주(피엘=강조동사) 무시하였다”, 마땅하게 그분의 백성(자녀)으로서 사랑해야할 그분을, 감히 그 백성(자녀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the Holy One of Israel)를 만홀히 여겼다는 말이다. 그들이 “뒤로 멀어졌다”, 즉 여호와로부터 돌아서서 소원해졌다는 의미이다. 특히 ‘쭈르’라는 동사가 칼 분사형(짜르, 짜림)에서 ‘이방인’을 가리키는 만큼, 이런 측면을 고려한다면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나님의 성민(거룩한 백성)에서 물러나서 “외인, 이방인, 이스라엘인이 아닌 자”의 신분으로 되돌아가 버렸다는 뜻이 된다.
(5절) “무엇 때문에(=왜) 너희가 아직도 맞으려고 하느냐? 너희가 배교를(=벗어나길) 더 하겠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상처투성이로다(=심히 곤비하도다).” 이스라엘의 상태를 사람 몸의 상태를 빌려서 표현하고 있다. 이미 이스라엘의 내·외적인 형편은 골병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온통 상처뿐인 점을 강조하고 있다.
(6절) “발바닥에서 머리(정수리)까지 성한 곳이 없구나. 상처 난 곳, 맞은 자국, 새로 맞아 생긴 상처뿐이로다. 짜지도 싸매지도 못하였고 기름(약)으로 (상처가) 누그러지도록 하지도 못하였도다. 계속해서 사람의 질병이나 외상을 은유로 해서 나라의 심판(강도)를 표현하고 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곧 온 몸이(=완전히) 성한 곳이 없다. 상처 난 곳, 맞은 자국, 새로 맞아 생긴 상처뿐인데 짜내지도 싸매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처가 가라앉도록 기름도 바르지 못한 상태라고 밝힌다.
(7절)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면전에서 이방인들이 그것(토지)을 삼켰도다(약탈=파괴). 마치 이방인들의 전복함(파괴함)과 같이, 황폐하였도다. 앞에서는 사람의 몸을 은유법으로 사용해서 나라의 심판의 강도를 표현하였다면, 이제는 땅 자체(=온 나라)에 임한 심판을 실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이사야 뒤에서, 즉 7:1∼2에서는 아람과 에브라임 연합군의 침공(주전 735년)을, 36∼37장에서는 산헤립의 침공(주전 701년)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여기가 이사야서의 서언인 것을 감안해서 저자는 심판의 수행자들을 “이방인들”이라고만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8절) “딸 시온은 [겨우] 남겨졌도다(니팔). 포도밭의 초막같이, 오이 밭의 원두막같이, 에워싸인 성읍과 같이” 엄중한 심판의 역사에서 현재의 상태는 포도밭의 초막같이, 오이 밭의 원두막같이, 딸 시온(예루살렘) 하나만 남았는데 초라하기 그지없다. “케이르 네추라”(like a besieged city=에워싸인, 포위된 성읍같이)라는 표현은 마치 히스기야 때에 유다의 모든 성읍들이 산헤립에게 점령되고 유일하게 예루살렘만 남았던 상황(36:1∼2)을 떠오르게 한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땅은 황폐화되고 성읍들은 약탈을 당한 상태에 있다. 그렇지만 이 심판은 회개를 촉구하는 심판이다. 곧 징계의 의미로서 채찍이다. 특히 5절의 “너희가 어찌하여 아직도 맞으려고 하느냐? 너희가 배교를(=벗어나길) 더 하겠느냐?”란 표현을 고려하라. 만약에 이스라엘이 회개한다면 징계하는 차원에서 심판은 멈추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런 회개의 촉구에 대하여 등을 돌려버린다. 즉 패역한 것이다. 도리에 어긋난 불순한 행위였던 것이다. 바로 이스라엘의 완악함이란 곧 회개를 거부하는 것에 있다.
(9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이라도 남겨두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는 소돔과 같았을 것이고 우리는 고모라와 같은 꼴(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림(배교함)으로써 안팎으로(5∼8절)으로 모든 것이 소진된 상태로 떨어졌다고 할지라도, 여호와께서는 긍휼을 베푸셔서 그들을 얼마간 더 보존하셨다. 그들이 소돔이나 고모라와 같이 소멸되는 것이 마땅하였을지라도(창 19장), 여호와의 긍휼하심이 그들의 생존을 결정하신 것이다. 요약해서 선지자는 단락의 시작에서 주권적인 화자로서 “여호와”라는 표현을 시작하였고(2절) 이제 단락의 끝에서 긍휼에 있어서 주권적인 분으로서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으로 끝맺음을 한다(9절). 시작은 진노하시는 심판자의 모습이었을지라도, 끝맺음은 긍휼이 풍성하신 구원자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각주
1) 알렉 모티어 지음, 박문재 옮김, 이사야 주석(The Prophecy of Isaiah: An Introduction & Commentary), 솔로몬: 서울, 2020, p. 78.
2) 혹은 ‘연계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3) 특히 B.D.B. p. 303에 따르면, 4. vision, as title of book of prophecy 라고 제시한다,
4) 알렉 모티어, p. 78.
5) 그래서 학자들은 이따금씩 이사야 1장을 가리켜 elaboration(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이라거나, tantalization(감질나게 한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6) 여기서 말하는 '심판적인 요소'라는 것은 ➀ indictment(고소장)과 ➁ pronouncement of judgement(심판의 선고) 둘 다를 가리킨다.
7) 필자는 제1장 단락을 ‘이스라엘의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었다면, 알렉 모티어는 ‘민족적 상황’(2∼9절), ‘종교적 상황’(10∼20절), ‘사회적 상황’(21∼26절)으로 나누고 있다(알렉 모티어, pp. 79∼97).
8) 독자들은 여호수아 시대, 사사들의 시대, 왕들의 시대… 등등 아주 폭넓은 역사를 생각하고 있겠으나, 이사야가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사 7:17)을 언급하고 있는 만큼, 우리는 특히 분열왕국 이후의 역사를 주목하게 된다.
9)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후세대가 배도할 것에 관한 (모세와 당시 세대의) 증거의 노래’이다(신 32장 자체).
10) 여호와께서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셨음에도 불구하고(레 16장 대 속죄일 자체), 그들은 여전히 죄악에 짓눌려 있음을 드러낸다.
11) 신약에서는 특히 약속과 믿음을 따라서 아브라함과 함께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자들을 가리킨다(롬 4:16).
12) 알렉 모티어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는 이사야가 자신의 최초의 묵시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계시를 표현하기 위해 여호와를 지칭하는 칭호로 만들어낸 것일 가능성이 크다(사 6:3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에 근거해서)고 주장한다(p. 83).
13) 알렉 모티어, p. 83.
14) 알렉 모티어, p. 83.
15) 히브리어의 문자적 표현은 “바트-치욘”(daughter of Zion)이다. B.D.B.의 설명에 따르면, 바트(딸)라는 여성명사가 도시, 땅, 민족의 이름과 함께 사용될 경우엔, 그 도시나 그 거주민에 대한 시적인 의인화라고 설명한다(B.D.B. p. 123). 여러 가지 번역을 확인할 수 있다. ‘딸 시온’(개역과 개역개정), ‘도성 시온’(표준새번역 개정), ‘예루살렘’(현대인의 성경).
16) 이것이 곧 ‘남은 자’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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