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장 1∼7절, 포도원(이스라엘 족속)에 대한 슬픈 노래
(1절) 이제 내(선지자)가 내 사랑하는 자(하나님)를 위하여
그의 포도원(이스라엘)에 관한 내 사랑의 노래를 노래하리라.
내 사랑하는 자(하나님)에게는 아주 기름진 언덕1)에 포도원이 있음이여.
(2절) 그가 땅을 파고 돌을 제하고 가장 좋은(극상품) 포도를 심었더라.
그리고 그 가운데 망대를 세웠고 또 술틀을 만들었더라.
그래서 그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대하였는데, 들 포도를 맺었도다.
이사야 5장은 이사야 1∼4장에 대한 요약과 발전, 특별히 심판 예언(1장, 2:6∼22, 3장)에 대한 요약과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이사야 5장은 Vineyard Song(포도원 노래 혹은 비유)이라고 칭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포도농사에 대한 비유를 사용해서 메시지를 만들고 있다. 내 사랑하는 자(하나님)께서는 기름진 옥토를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 나아가서 망대를 세우고 술틀까지 만들었다. 포도원을 위해서 농부가 하지 않은 것이 없다(최상의 사랑을 쏟으심). 하나님 편에서는 은혜(헤세드)를 모두 베푸셨다. 이렇게 온갖 정성으로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보살핀 이유는 무엇인가? 오로지 참된 포도 맺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그런데 좋은 포도는커녕 들 포도를 맺었던 것이다.
(3절) 이제 예루살렘 주민아, 유다 사람아2),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판단해 보아라.
농부와 포도원 사이의 비유를 통해서, 선지자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의도를) 드러낸다. 포도원 비유에서 이스라엘은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제3자의 입장에서 판단해 보라고 권면을 듣고 있다. 마치 나단과 다윗의 이야기(“부자와 가난한 자의 양과 소의 비유” 삼하 12:1∼14)처럼, 그 판단의 결론을 통해서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드러내어 정죄하려는 것이다.
(4절) 내 포도원을 위하여 해야 할 것이 무엇이 더 있더냐?
내가 거기에서 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더냐?)
좋은 포도(열매) 맺기를 기다렸는데, 어찌하여 들 포도를 내었는가?
(5절)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대하여 할3) 일을 너희에게 말하리라.
내가 그것의 울타리(of thorns)를 제할 것이고 (그것을) 불에 삼키게 하리라.
내가 그것의 담(of stones)4)을 헐고 짓밟히게 하리라.5)
(6절)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라. 가지치기도 북돋우기도 하지 않으리라.
찔레와 가시가 나게 하리라. 또한 구름에게 명하여 포도원에 비를 내리지 않게 하리라.
이제 포도원을 정죄하여 진노와 징벌을 내릴 것이다. 울타리와 담을 헐어 불태울 뿐만 아니라 다른 침입 세력에게 짓밟히게 할 것이다. 황폐화(파멸)의 시작으로써 가지치기나 북을 돋우는 일이 없을 것이고 잡초(찔레와 가시)가 나게 할 것이며 비는 멈추어질 것이다.
(7절) 왜냐하면(For)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집(house=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포도) 나무는 유다 사람이로다.6)
그가 공평(미쉬파트)을 바라셨더니, 보라 포학(미쉬파흐)이로다.7)
의로움(체다카)를 바라셨더니, 보라 부르짖음(체아카)이로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이스라엘과 유다는 “공평”(미쉬파트) 대신에 도리어 “포학”(미쉬파흐)을8), “의로움”(체다카) 대신에 도리어 “부르짖음”(체아카)을 양산해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좋은 포도(열매) 맺기를 바랐지만, 들 포도를 맺었던 것이다.
한편 림버그는 이 같은 점을 강조하기 위해 “Justice(져스티스: 공의)를 원하셨으나 Just Vice(져스트 바이스: 바로 그 악)이 웬말이며, Righteousness(라이쳐스니스: 의)를 기다리셨더니 Rottenness(라튼니스: 부패)가 웬말인가?”라고 번역하고 있다. 9)이와 같은 발음 기법은 청중으로 하여금 극적인 박진감을 더해준다고 림버그는 강조한다.
각 주
1) 문자적으로는 “케렌 벤-사멘”(hill of son-fertile=“기름진 아들의 언덕”)이다. 품질, 특성의 단어가 동반되어 벤을 사용하고 있다(B. D. B. p. 121). “심히 기름진 산”(개역개정), “기름진 언덕”(새번역)이라고 번역한다. Slotki는 “이스라엘 땅의 비옥함에 대한 암시”라고 제안한다(p. 22).
2) 히브리어는 모두가 단수(“주민, 사람”)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백성에 대하여 집합적으로 표시한 것이다(Slotki, p. 22).
3) 문법적으로 칼 능동분사 (남성단수)는 임박한 미래(“행할 일”)를 의미한다. Slotki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과 즉각적인 조치’를 암시한다고 본다(p. 22).
4) 귀중한 포도원은 침입에 대비해서 두 가지, 곧 가시 울타리와 더욱 실질적으로 지어진 울타리(돌?)로 보호받게 되어있다. 이제 선지자는 나라가 임박한 침공에 놓여있음을 넌지시 알린다(Slotki, p. 23).
5) 문자적으로는 destruction(파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Slotki, p. 23).
6) 이스라엘 ‘집’과 유다 ‘사람’은 단수로 사용되지만, 집합명사로 사용되고 있다(Slotki, p. 23).
7) Paronomasia: 비슷한 음의 단어를 사용해서 정반대의 의미를 강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가져 온다. 하나님의 기대하심과는 정반대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사야는 구약문헌 중에서 최고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Richard N. Soulen, Handbook of Biblical Criticism, Louisville: WJK Pess, 2001, p. 135를 참고하라.
8) “미쉬파흐”는 outpouring (of blood), bloodshed(피를 쏟음, 유혈사태)을 의미한다.
9) 이런 성경의 문학적인 기법에 대해서 김지찬 교수의 책(“언어의 직공이 되라”,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6)은 많은 도움을 준다(p.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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