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17-21)
이웃 사랑, 원수 사랑
오늘의 주제는 화해입니다. 화해, 어떻게 할 것인가? 용서(forgiving)라는 주제와 더불어 이 화해라는 주제는 우리의 삶, 곧 신앙과 생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나 육체에 상처를 주어서 우리에게 화, 분노, 미움, 증오를 일으켰던 가해자를 받아들여 그를 용서한다는 일은 정말 힘든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해자를 용서하여 마음과 영혼에 참된 자유와 해방과 평안을 찾는 것은 더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 대적자를 용서할 뿐 아니라, 그를 위해서 축복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 진정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 하신 우리 주님(예수님)의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 주님은 산상설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평지설교로 알려진 예수님은 이렇게 교훈하십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용서와 화해를 분리할 수는 없지만 구분할 수는 있어야
물론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와 화해하고 교제까지 하는 일을 이런 용서에 포함시키는 일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와 화해를 분리할 수는 없지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용서하는 일은 가해자들 가운데서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자들뿐만 아니고, 볼 수 없는 자들, 그래서 그 누구라도 포함될 수 있지만, 화해란 지금 우리 앞에 실존해 있고, 실재해 있는 대상만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라도 용서해야 하고, 그 누구라도 용서할 수 있음을 알고 배워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용서를 빌지 않아도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는 저 사람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는 셈이 되며,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에 대한 성경적인 교훈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를 우리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들-심지어 원수에게까지 나타내고 베푸는 삶이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그가 용서하지 않은 일로 인하여 그의 마음과 영혼이 그 화병으로 인해 영혼이 깊이 병들어 가고, 심지어 육체적으로 커다란 질병까지 얻어 평생토록 그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용서보다 더 어려운 화해
그렇다면 용서와 화해 가운데서 어떤 것이 더 어려울까요? 참으로 용서했다고 하지만 화해와 교제로 나가는 것은 또 다른 더 어려운 과제임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한다고 하면서-용서한 자와 반드시 화해하고, 교제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용서는 항상 해야 하는 것이고 가능한 것이지만, 화해는 항상 반드시 가능한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용서하고도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나 만나지 못할 경우는 화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용서는 했지만 화해는 쌍방적인 것이기에 자신이나 상대방이 서로 화해할 의도가 전혀 없거나, 또는 변화되지 않는 성격이나 나쁜 행동을 지속적으로 행할 경우에도 화해하거나 교제로 이어질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해자를 진심으로 (마음으로부터) 용서했다면, 그 가해자가 실존해 있을 경우 그 가해자와 함께 쌍방이 서로 화해하고 교제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올바른) 일을 도모하라”(생각해보고 그 생각을 진전시켜 나아가 보라.) 여기에서 우리는 마땅히 행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고차원적인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선과 악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면서도, 그 악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악을 악으로 갚은 것이 아니라 선으로써 악을 이겨나가고, 선을 도모(증진)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가장 초보적이면서 기초적인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을 분명히 이루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셉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니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이다.”(창 50:20)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8절은 좀 더 이를 현실화할 수 있는 방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James Boice 목사님은 이를 “이상주의로 나아가는 온전한 현실주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라.” ‘할 수 있거든’이 영어로는 (ESV)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If possible, so far as it depends on you, live peaceably with all.” ‘할 수 있거든’의 의미는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면…끝까지…최선을 다해 행하라는 뜻입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란 뜻이 아닙니다. ‘해서 되면 좋고, 안 되도 할 수 없다’ 정도가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또는 ‘우리의 능력 한도 내에서’라는 말도 될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의 범주를 떠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라면’이라는 해석이 더 적합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것은 또 다른 악을 조장해 나간다거나, 또 다른 악을 묵인해 나간다거나, 또 다른 악을 행해 나간다면 그것은 또 다른 악을 더해가는 ‘악순환’을 일으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 거룩하신 정의를 유지해 나가면서 가능한 (bottom-line verse)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해하면서 교제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화목(reconciliation), 평화(peace)에 관한 한 화해하며 peace-maker(평화 만드는 자)가 되어야 하고, 또한 peace-maintainer (평화 유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 가운데는 우리가 원수를 대할 때 이 모든 일에 (하나님,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대해야 하지만, 그 상대방 때문에(나 때문이 아닌) 그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조건 화평, 화목이 아닌 성결이 중요합니다.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용서를 넘어 화해하는 일까지 나가려고 하는데, 상대편에서 여전히 계속해서 악감을 가지고 그 평화를 깨뜨릴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화해나 평화의 관계가 수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제란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에는 원수를 친히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신 32:35)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사로이 복수하지 말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중에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핍박하는 사람,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 나에게 아픔을 주는 사람의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처리)해야 할 것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성경적인 방법입니까? 또 하나님의 방법입니까? 나는 용서했고, 나는 할 수 있는 한 화해하기를 원하나 오히려 나를 계속 ‘원수’로 대하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알 것은 여러분의 감정대로, 본능적으로, 생각대로, 여러분의 (세속적인)가치관대로, 주변의 이야기대로-그것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상식적인 것이라 할지라도-그렇게 처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는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말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너만 당하고 살 것이 무엇이냐? 너만 손해를 보고 피해만 보고 살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어리석게 살지 말아라. 오히려 단단히 쐐기를 박고 보복해라. 그런 못된 자는 어떻게든 보복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렇게 보복하지 마십시오. 정말 원수가 생겨났을 때 원수를 친히 갚지 말고 진노( the wrath),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에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그 문제를 다루고, 다스리고,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원수를 만나면 설령 보복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런 원수와 곁에 있기도 싫고, 꼴도 보기도 싫고, 그런 자가 먼저 멀리 떨어져 내 시야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하는 심정이 듭니다. 그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런 경험을 수년 전에 오랫동안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도 어떤 목사였습니다. 그 일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결국 그가 스스로 떠났습니다. 그런 원수에게 대항하지 마십시오. 싸우지 마십시오. 원수를 피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적극적인 해결책, 진정한 해결책을 사용하십시오
용서 받은 자로서 용서하라
20절에 그 방향이 나와 있습니다. “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임을 확인하고, 그 사실을 좀 더 분명히 나타내 보이십시오. 만나면 서로 인사를 하고, 떨어져 있으면 그를 위해 기도도 하고 축복도 하십시오. 인간(세상)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믿음으로 해 나가십시오. 믿음으로 극복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에게도 그런 사랑을 주셨고, 나를 용서해 주셨다. 그러니 나도 내 원수에게 그런 용서와 사랑을 나타내리라.”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사랑으로 큰 발걸음을 내딛으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네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쌓아 놓으니라(V20)는 말씀을 이루는 것이 됩니다. 이 말씀은 잠언 21:22을 인용한 것으로 실제로는 고대 이집트의 한 재판 과정에서 있던 일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합니다. 죄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으므로, 죄인 자신이 참회하며 용서를 빌게 한다는 뜻으로, 수치감과 양심의 가책과 고통으로 인한 회개의 표시를 갖도록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원수 사랑을 인하여 그가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요, 만일 원수가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임할 것을 보여주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곧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어떤 개인적인 일로 서로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았다면 용서와 화해와 사랑을 일구어 나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용서를 넘어 화해로, 화해를 넘어 교제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힘써야 합니다. 비록 화해가 쌍방 모두가 함께 동시에 시작할 때 가장 효과적이지만, 상대가 화해를 하고자 하지 않을 때에라도 ‘할 수 있는 대로’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화해를 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상대방과 대면하기로 결단하라.
우리가 가해자인 상대방을 용서한 뒤로는 어려운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상대방과 얼굴과 얼굴로 마주 대하겠다는, 대면해 나가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때로는 정말 보기도 싫어할 수도 있고, 그를 피해보려고도 하고 더 나아가 그에게 보복하고자 하는 복수심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심리적인 장벽을 뛰어넘을 단단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또한 신체적, 거리적 장벽을 뛰어 넘어가야 합니다. 어차피 만나야 하고, 만날 수밖에 없다면 무조건 피한다거나, 외면한다거나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시 만날 때마다 ‘용서했다’라는 사실을 확인해 나가면서, 상대방에 대한 비우호적인 감정들, 지난날의 아픈 상처들이 점차 가해자에 대한 이해와 공감과 긍휼과 사랑으로 우호적인 감정으로 바뀌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축복하고, 그에게 필요한 일을 도와주고, 다른 사람 앞에서 그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자신은 상대방(가해자)이 그리스도인일 경우 함께 에수님 안에서 형제, 자매 사이인 것을 알아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그도 용서하셨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그 사랑과 용서를 그에게도 나타내 보이는 것이 진정 용서 받을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것임을 삶 가운데서 확인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만나 대화하라.
이와 같은 경험과 결단 가운데서 우리는 상대방과 직접 만나 대화 가운데서 서로 용서를 확인하고 화해로 나갈 수 있는 길을 해 나가야 합니다. 비록 아주 분명한 직접적, 형식적 화해는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방법이 가장 좋고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용서와 화해의 눈에 보이는 절차를 밟지 않고도 서서히 용서할 일과 화해할 일을 해 나갈 수도 있습니다. (아마 이런 후자의 경우 서양 사람들보다 더 정서적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더 적합할 수도 있습니다.)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지난날의 모든 상처들을 해결하고 화해의 길로 나설 경우 우리는 참으로 겸손하게 사과할 부분을 군소리나 변명없이 그대로 인정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준 일에 대해서 후회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떄에 따라서는 이 사과의 과정이 지나친 변명과 합리화(정당화)하는 것으로 여겨져 오히려 반감을 살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아픔을 읽고, 보상-그것이 물질적인 것이건, 심리적인 것이건 –을 제안하며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대화할 때도 상대방이 내게 준 상처, 받은 피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피해를 준 내용만을 다루어 나가야 합니다.
진정한 화해가 되게 하라.
우리는 이런 사과와 용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화해의 길로 나가게 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이런 용서와 화해가 가족 식구 사이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 친구 사이, 그리고 같은 직장 내 동료 사이, 더 나아가 교회 내 교인들 상호에 이런 용서와 화해가 있어야 합니다. 매일 마주치는 사람, 매 주일마다 만나는 사람, 그리고 가끔씩이라도 만나는 사이에 있어서는 더욱 잘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화해를 다룰 때에, 할 수 있는 한 사건과 문제 자체를 주로 다루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잘못된 고칠 수 없는 인격, 성격, 그 사람 자체를 다루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납니다. 상태를 더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건과 사람을 엄격히 분리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이 화해작업은 화해가 한꺼번에, 단번에 다 해결되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몇 차례 걸쳐서 또는 시간과 세월을 두고 천천히 해결해 나갈 일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용서를 넘어 화해와 교제로 나아가야
우리 성도들 모두 지난 날, 또는 요즈음 겪고 있는 일들 가운데 받은 모든 마음과 영혼과 육체의 상처를 용서를 통해서 해결해 나가고, 더 나아가 할 수 있다면 용서를 넘어 화해와 교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과 일터와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 화해의 공동체로 만들어 나아가야 합니다.
벧전 4:8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롬 12:18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라.”
여러분 모두,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또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과 화해하여 참다운 사랑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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