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직장생활(상전과 종)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직장생활(상전과 종)어떻게 할 것인가?

정관호 목사 0 2023.05.20 17:19

그리스도인의 직장생활(상전과 종어떻게 할 것인가?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로새서 3:22-4:1) 


오늘의 현대사회와 기독교의 문제들


오늘의 성경 본문은 종과 상전, 오늘날로 말하면 노동자(피고용인, 부하)와 사용자(고용인, 상사) 곧 노사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노사관계는 정치에 있어서 진보(좌파)와 보수(우파)의 첨예한 대립만큼 매우 심각하면서도 중차대한 이슈입니다. 지난날 우리 한국국민들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찬성하는 촛불집회와 이에 대해 반대하는 태극기집회 가운데 어느 집회에 참석해야 하는가, 적어도 어느 한 편에 서야 하는지를 국민들은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목사인 저 개인으로서 저는 이런 문제와 이슈에 대해 사회적인 또는 정치적인 견해와 입장을 분명히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로서 교회 내에서 제 견해나 입장을 공적으로 밝히는 일이나 설교하는 일은 마땅히 삼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이슈로 인해서 교회나 성도들 사이에 갈등이나 분열을 초래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노동자도 있고 사용자도 있으며, 보수주의자도 있으며 진보주의자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노조(노동조합, Union)활동을 인정하거나 노조에 가입하든지, 아니면 그 반대로 노조활동을 싫어하든지 반대하든지 하는 일은 각자 개인의 신앙양심에 따라 해야 할 일입니다.

 

다만 중요한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누구라도 그와 같은 이슈에 대해서 내가 과연 성경적인 교훈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느냐, 내가 기독교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에 의해 행동하고 있느냐를 늘 살펴보는 일입니다. 현대 사회, 특히 자유민주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여건만 허락된다면 더 좋은 직장으로 옮길 수도 있고, 또 직장 내에 노조가 있다면 노조에 가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일이 과연 지혜로운 일인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 성경적으로 바른 것인가를 늘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서 교훈하시는 노동자 또는 사용자로서 성경적인 교훈에 따르는 원리를 잘 마음에 새겨가면서 실천에 옮겨가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종들에게 먼저, 상전들에게 나중에 교훈하는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종들과 상전들에게 그들 각자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먼저 종들에게 그리고 그 다음에 가서야 상전들에게 교훈합니다. 이러한 순서 역시 부부관계에 있어서 아내에게 먼저 그 다음에 남편에게, 그리고 부모와 자녀관계에 있어서 자녀에게 먼저, 그 다음에 부모에게 교훈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권위와 복종의 질서 관계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인격적으로 다 양자가 평등하지만, 질서상 권위와 복종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종들아


사도 바울은 종들에게 먼저 명령하고 교훈합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3:22-23)

여기 종들이란 당시 로마제국하에서 노예로서 생활하던 자들을 가리킵니다. 당시에 로마 제국 내에 무려 6,000만 명의 노예가 있었으며, 로마에만도 약 60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노예제도가 현존하고 있었던 당시에 사도 바울은 노예제도의 철폐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노예제도를 용인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노예제도 철폐를 주장하지 않은 이유는 물론 그 당시 노예제도 철폐를 주장한다고 해서 그 주장이 받아들여질 만한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당시 기독교는 지금처럼 상당한 힘과 능력을 지닌 그런 종교적인 집단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노예제도 철폐를 주장하지 않고 노예제도가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였으나, 그는 노예로서 풀려날 수 있으면 풀려나도 된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관심은 복음 전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 된 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영적으로 더 자유롭게 사는 것을 더욱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유럽과 영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노예제도를 철폐하게 된 것은 복음전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룬 성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법과 교육과 제도에 의해 개선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신앙과 사랑에 의해 변경되었으며 이는 복음에 의해 변화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완전한 개혁이나 완전한 변화는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답게 살 때 개인이 변화되고 가정이 변화되고 일터가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되고 교회가 변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확신을 갖고 겸허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노예들 가운데 사도 바울이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전도를 받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교회에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보통 노예들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 노예들에게 그들을 종들이라 부르면서 그리스도인 종의 신분으로서 어떻게 일터에서 생활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교회 내에 상전과 종이 있는 경우 참으로 입장이 난처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또 불화와 갈등 요인으로도 작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곧 교회 안에 이런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야말로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8)

거기에는(그리스도 안에는, 교회 안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3: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종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종된 자들에게 일터에서는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에게 순종하라고 교훈합니다. 그 상전이 그리스도인이건 그렇지 않은 불신자이건 말입니다, 마치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듯이 그렇게 순종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종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eye-service)만 하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은 상전이 있는 곳에서는 일을 열심히 하는 척한다는 뜻입니다. 상전이 보이는 데서는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만, 상전이 눈에 띄지 않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태해지고 게으름을 피운다는 뜻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려서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다닐 때 담임선생님이나 다른 선생님이 자리를 잠시라도 비우면 그 교실이 난장판이 되었다가 망을 보는 다른 학생으로부터 다시 선생님이 들어오고 있다는 사인이 오면 금방 쥐 죽은 듯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척하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워하여(경외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모든 일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어느 하녀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큰 대저택에 많은 하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녀들 가운데 한 하녀가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하녀는 그리스도인이 되자마자 다른 하녀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는데 너희도 나처럼 함께 예수님 믿고 신앙생활하면 어떻겠니?” 하면서 말입니다. 그랬더니 다른 하녀 하나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니? 무슨 증거라도 있니?” 그때 그 하녀가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전에는 마님 방을 치우면서 쓰레기가 나오면 보이지 않게 슬쩍 침대 밑으로 쑤셔 넣었는데, 이제는 그런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눈가림만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성실한 마음으로,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자기 주인을 섬기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하듯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혹시 까다로운 주인을 만날 때에도 그리스도인답게 생활해야 하며 그에 따르는 다른 고난도 참아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당한 것만이 아닌 그 이상의 일을 해야 합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8-20)


왜 그리스도인 종들은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그렇게 할 때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기업(inheritance)의 상(reward)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3:24)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종 되었던 자에게 아주 커다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열심히 일을 하고서도 고난을 받고 상급이 없을지라도 하늘나라에서는 그에 합당한 상급과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로 크게 고무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종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일이 비록 힘들고 괴로운 일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하는 일이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급은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우리 모두에게, 그러나 특별히 주인을 섬기면서 그리스도인답게 신앙생활과 일터 생활을 성실히 감당한 종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상전이 영원토록 상전이 될 수 없습니다. 지상에서는 상전이 되지만 주님 재림하시면 그 상전이나 종이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똑같은 자로서 하늘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상전들아


사도 바울은 이제 상전들에게, 그리스도인 상전들에게 교훈과 명령을 합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4:1)


상전들은 종들이라고 해서 마구 그들을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상전들은 그들의 직권을 남용하거나 악용해서 종들을 위협하거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직장에서는 부하 직원들에게 갑질을 하거나 언어의 폭력을 사용하거나 인권을 유린하거나 성적 희롱을 하거나 심지어 성폭행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악행을 결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종들의 궁극적인 주인과 상전들의 주인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모두의 진정한 상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상전들은 자기 위에 아무도 없는 듯이 안하무인격으로 종들을 마구 대해서는 안 됩니다. 종들도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종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상전들에게도 상전이 있습니다. 하늘 상전이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전들은 종들에게 의와 공평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사람들에 대한 순종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때에 따라 고용주나 피고용인이 악하거나 정직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이 된 고용주나 피고용인들은 다 정직해야 합니다, 특히 고용주들은 의와 공평을 가지고 약자인 피고용인인 부하 직원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그들을 약자라고 희생시키거나 이용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일과 노동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성경적인 안목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이나 노동을 나쁜 것이나 심지어 악한 것으로 보면 안 됩니다. 노동은 그것이 육체적인 노동이건 정신적인 노동이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좋은 것입니다. 일이나 노동은 사람이 타락하기 전 에덴동산에서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타락한 후에 노동이 사람에게 힘겨운 것이 되었지만,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은 뒤에는 이 노동이 다시 신성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과 노동에 대해 악한 것이나 고통스러운 것으로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일과 노동은 좋은 것이며 오히려 우리는 일하면서 그 일에 보람과 기쁨을 갖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여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일한 후에 갖는 휴식, 6일 동안 일한 후 주일에 갖는 휴식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일주일의 시작인 주일에 우리는 주일마다 우리가 누려야 할 육체적이며 영적인 안식을 예배와 성경공부와 성도 교제를 통해서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일주일의 활력을 주일날 재충전해서 남은 한 주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을 위해 가정에서 일터에서 힘써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직장이나 일터에서 부하 직원으로 있다면,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교훈한 성경적인 교훈을 심사숙고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상사에게 순종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성실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상사로 있다면 우리는 부하 직원들을 의와 공평으로 대하면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터에서의 직장생활을 여러분이 부하 직원으로 있든지, 아니면 상사나 오너(owner)로 있든지 성경적인 교훈을 따라 그리스도인답게 신실하게 감당하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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