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교제에 참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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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교제에 참여하자

이윤석 목사 0 05.03 17:13

[들어가며]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과 율법은 늘 외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영적인 것 곧 정신과 마음까지 관련된 것이다. 우리 인격의 전인이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새 생명의 특징들에 대하여 로이드 죤즈 목사님의 요한복음 3장 강해를 참조 및 수정한 내용으로 그 설교를 묵상하고 있다. 거듭남의 증거는 어떤 것보다 신학이나 성경 지식보다는 도덕적이고 선한 삶이나 체험보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기를 열망한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를 찾는다. 괴롭고 슬프고 힘들수록 더 찾게 된다. 다른 것을 그들에게 줄지라도 그 아이들은 그것을 다 던져버린다. 부모가 나타나야 해결되는 것이다. 부모와 어린 자녀는 생명적인 관계에 있다. 종교는 바로 이런 것이 없다. 종교에 있는 위험이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교인이라는 데 만족하거나 그 비슷한 것들에게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에게 생명이 있는지 아닌지에 있다. 이 생명이 있는 자는 더 큰 생명을 갈망한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친밀하게 알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koinonia)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라고 축도한다. 성령이 교통하신다는 것은 교제하시고 협력하신다는 뜻이다. “교통하심에는 성령이 그 뜻을 우리에게 전하시는 일과 성령이 우리와 더불어 소통하시는 일이 다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교제교통이라는 말로 옮길 수 있는 모든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교통하심은 때로 일종의 동료 관계(partnership)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으며, 신약 성경은 자주 그 의미로 사용하곤 한다. 제자들 중에는 고기 잡는 동무들”(partners, 5:7))이 있다. 신약은 성령과 우리의 관계를 묘사할 때도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사도는 고린도교인들이 성령의 동료가 되기를 무엇보다 바랐기 때문에 또한 서신 끝에 이 말을 사용했다. 이제 우리가 참으로 성령과 교제하며 교통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알아보자.

 

1. 신앙생활에서 어떤 것도 혼자 모든 것을 다 하지 않을 때 성령과 교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1) 종교인은 전부 다 혼자서 한다.

종교인은 자기의 신앙을 자신이 다 관리한다. 종교인이 아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 활동 뿐이다. 주일 오전 예배도 자신이 좋은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참석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주일이라면 건너뛴다. 자신이 신앙의 수위도 다 조절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인은 자신의 신실함과 활동과 열심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도적적인 종교인의 변함없는 특징이다. 아주 자립적으로 살되 일반적으로 자기만족에 빠져 산다. 자기 기준을 세워놓고 그것을 지키는 것에 만족한다. 남들은 잘 못 지키는데 자신이 지키는 것에 만족하며 산다.

 

2) 우리 주님은 비유를 통해 이것을 잘 설명해주신다

주님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이 점을 설명해주셨다. 바리새인은 곧장 앞으로 나아가 말한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것이 종교인의 전형적인 태도이다.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다. 어떤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은 아주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해야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어떤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어떤 다루심도 인식하지 못한 채 현재 자기 모습에 감사한다. 자신이 모든 상황을 관리하며 그 결과에 만족한다.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의 모습이요 종교인의 모습이다. 외부의 영향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이 믿기로 선택한 것을 실천할 뿐이다. 만사를 아주 깔끔하게 정돈한다. 아무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에 대해 뭐라고 하셨는가? 스스로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생각으로 가슴을 치며 오직 자비와 긍휼을 간구했던 불쌍한 세리가 오히려 옳다 인정함을 받았다고 말씀한다(18:9-14).

 

3) 바울은 자전적 기록으로 이것을 설명한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3:5-6)라고 말한다. 단순한 종교인의 특징이 이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현재의 자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다른 어떤 사실보다 크게 인식하는 신령한 자는 그들처럼 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왜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종교인이다. 반면에 자신이 이런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자는 신령한 자이다. 이것이 거듭난 자의 첫 번 째 아주 명백한 특징이다.

 

2. 거듭난 신령한 자는 성령의 임재를 인식하며 살아간다


1) 종교인은 어떤 임재도 인식하지 못하고 오직 체계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 체계 안에서 살며, 그 체계를 성취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침 신앙의 핵심은 성령의 임재를 인식하는데 있다. 곧 다른 존재를 인식하는데 있다. 이것은 기독신앙에서 떼어 낼 수 없는 신비한 요소이다. 참 신앙에는 단순한 철학적 신비주의가 아니라 신비한 요소가 있다. 경험적이고 인격적인 요소가 있다. 인격적이지 않은 것은 참 신앙이 아니다.

 

2) 성경 뿐만이 아니라 위대한 찬송시에도 이런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부흥과 각성과 개혁의 시기에 지어진 찬송에 늘 이런 인격적이고 경험적인 요소가 확연히 나타난다. 부흥을 많이 경험하지 못한 시대에는 이런 요소들이 거의 없다. 자기 기분과 느낌을 감상적으로 표현할 뿐이다. 참으로 위대한 찬송은 항상 이런 객관적인 실재에 대한 인식, 다른 분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다.

 

3) 성령의 임재를 인식하는 사람은 성령의 다루심을 인식한다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다른 존재의 손에 잡혀 그의 다루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인식한다. 성경에 성령과 우리의 관계를 보여주는 표현들이 나온다. “성령을 거스르는 도다”(7:51).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4:30). 오직 신령한 자만 이런 말의 의미를 안다. 신령한 자는 다른 존재를 거스르며 근심하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만 종교인은 모른다. 가끔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거나 스스로 잘못으로 여기는 일을 할 때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럴 때도 여전히 전적인 자기 기준에 따라 판단을 내린다. 자기에게 짜증을 내고 자기 체면이 깎였다고 느끼며 앞으로 좀 더 잘해야 겠다고 다짐한다. 전부 자기 관점에 따라 그렇게 한다.

 

4) 신령한 자의 핵심적인 특징은 성령을 거스른 것 때문에 근심하는데 있다

그는 자신을 향한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고 거스름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아프게 하며 상처를 드린 것을 인식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 생명의 본질적인 핵심이다. 하나님과 교통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17:3),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넘어지거나 실패하거나 죄를 지을 때 성령이 아파하시고 상처 입으시는 것을 아주 날카롭게 인식한다. 그래서 성령께서 돌아와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이다.

 

5) 모든 시대 성도들의 경험에서도 같은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이 어딘가 어그러지는 것은 죄 때문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건조하고 힘든 기간을 경험한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이로 인해 근심한다. 전처럼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선을 행하고 악을 삼가고 자기 의지와 의지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며 모든 것이 바람직한 상태에 있는데 불행하다고 한다. 왜 불행하냐고 물으면 메마른 것을 느껴요. 성령의 임재가 느껴지는 것 같지 않아요라고 대답한다. 이 상태로 오랫동안 씨름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옛 관계가 회복된 것을 깨닫기 전까지, 구름에 덮여 버린 관계가 새로워지기 전까지, 다른 어떤 것에서도 만족을 찾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구름만 보일 때가 있다. 그들의 큰 관심은 잠시 잃어버린 관계를 다시 누리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럴 때 마귀가 찾아와 기도를 그만두라고 속삭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그럴 때일수록 계속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계속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선히 여기시는 때에 다시 자신의 임재를 느끼게 해주시며 관계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6) 이 경험을 잘 알았던 옛 믿음의 선진들은 이런 버려둠의 기간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하곤 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어떻게 얼굴을 돌리시는지 가르치곤 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해하려면 이 경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얼굴을 돌리시는 것 같다.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런 경험이 없으면 계속 어린 아이로 남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둠 속에서도 그를 의지하는 사람, 감정과 상관없이 의지하는 사람, 상황과 상관없이 의지하는 사람, 그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의지하며 그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13;14)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 이 모든 거의 결론은 그리스도인이 이 관계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시라도 이 관계를 잃을 때 근심하고 염려하며 불행해 한다는 것이다.

 

3. 거듭난 신령한 자는 자신이 성령께 의존하고 있음을 인식할 뿐 아니라, 당연히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


1) 자신을 의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성령과 그의 임재와 그의 능력을 더욱더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대조적인 차이점을 말씀한다.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8:9).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 이것은 중대한 차이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서령 안에서 사는 삶이다. 이 사실이 우리의 관점 전체를 지배한다.

 

2) 이것은 종교인, 종교관행, 종교형식의 준수와 살아있는 관계 및 예배의 차이점이기도 한다

성령으로 난신령한 자는 단순히 형식만 따르는데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형식은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적인 요소에 관심을 갖는다. 주님은 한 사마리아 여인과 토론하시면서 이 점을 가르치신다. 여인은 종교적인 사람으로, 그의 요지는 자신들이 이 산에서 예배한다는 것이었다. 그 여인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4:20)라는 것이다. 이처럼 여인은 장소와 형식 등에 매여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대답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3).

 

3)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적용할 시금석은 우리의 예배와 성경읽기와 기도생활의 성격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아무 방해 없이 자리에 앉아 성경을 읽기로 결심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 내용에 정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그것과 완전히 다른 일이다. 이 말의 의미는 문자가 아닌 문자에 담긴 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단어가 아닌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성경이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제로 말을 거는 삶아있는 책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말로 설명하기 아주 힘든 경험이다. 우리는 오래토록 육신의 차원에서 셩경을 읽을 수 있다. 그렇게 읽고 싶지 않아도 한동안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성령이 찾아오시면 모든 상황이 바뀐다.

 

4) 이것은 특별히 설교자의 삶에서 경험하는 낭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전에 수십 번 읽었던 본문이 갑자기 새롭게 다가오면서 환하게 밝혀지고 영광스럽게 드러난다. 나에게 말을 걸고, 내 마음을 황홀하게 하며 나를 일으켜 세우면서 계속 확장되어 나간다. 이를테면 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머지 성경 전체를 환히 밝혀준다. 목회자는 성령의 교통하심이야말로 설교의 영역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된다. 천부적인 재능은 중요하지 않다. 재능은 금새 바닥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재능으로 설교하면 지치고 물리게 되어 있다. 재능으로 설교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설교를 다 하는 날이 올 수밖에 없다. 재능으로 다룰 수 있는 주제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여 함께 성경을 다루어 주시면 얼마든지 한없이 설교할 수 있다.

 

5)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자기가 기도하고 싶어서 기도하는 사람과 마땅히 기도해야 한다고 믿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6:18)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누구나 알 만큼 분명한 차이가 있다. 기도를 하면서 신비하고 경이로운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 성령이 그를 택하여 임하시기도 한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성령이 사로잡으시고 들어 올리신 자의 기도이고 성령 안에서 드린 참 기도가 될 것이다. 그때는 영적인 영역의 실재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때이다. 이런 일이 각 개인에게 일어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각 개인에게 일어나고 있다. 오직 거듭난 자만이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다. 그는 성령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성령으로 기도한다. 신약의 변함없는 권고가 이것이다. 성경은 마치 평범한 수준에 만족하지 말라, 인간적인 차원의 삶에 만족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6) 이것을 설교를 비롯하여 우리 삶의 모든 활동에 낱낱이 적용되는 권고이다.

우리의 시금석은 이처럼 자신이 성령께 의존하는 존재임을 인식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는 자는 성령을 찾고 성령을 구한다. 거듭난 자는 성령 없이 영적인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런 갈망에 대해 알고 있는가? 스스로 생명이 없음을 느낄 때가 있다. 죽어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거치는 경험이다. 아직 육신을 가지고 사는 우리에게는 몸과 정신과 영혼의 상호 관계가 우자 현실적이고 미묘한 문제로 작용한다. 때로는 몸의 상태 때문에 생명이 없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럴 때 무거운 걸음으로라도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주저앉아 변화가 일어나길 기다리지 말자. 의무를 계속하되, 그 자체를 의지하지 말자. 성령께 이렇게 기도하자. “하나님의 숨결이여 그 숨을 제게 내쉬어 새 생명으로 채워 주소서!” 그렇다 거듭난 자는 이처럼 자신이 동료이지 협력자 되시는 성령님께 깊이 의존하는 존재임을 인식한다. 성령과 교제하며 협력한다. 함께 동업한다고 표현해도 좋다. 그는 우리의 상관이시다. 그분 없이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4. 내적인 삶에 나타나는 성령의 특별한 활동이 있다


성령은 오순절 이전에 제자들 안에 게셨듯이 우리 안에도 계신다. 주님은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20:22)고 하셨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해 세례의 형태로 임하신 오순절 날을 맞이하기 며칠 전에 그렇게 하셨다. 지금 말하는 바는 성령이 어떻게 그리스도인 안에 오시며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그이 역사와 활동을 깨닫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성령 세례를 받으면 그 사실을 훨씬 더 크게 인식하게 된다. 성령이 그 인식을 강화시켜 주신다.

 

* 그렇다면 성령의 활동하심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1) 성령은 촉구하신다

바울이 빌립보서 212-13절에 이 점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생하게 하시나니.” 이 구절은 성령의 촉구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자신에게 적용해 보아야 한다. 이 구절은 무엇이든 우리 혼자 하지 못한다는 앞의 교훈을 강조하는 것이다. 종교는 가방 속에 넣고 다니다가 필요하면 꺼내 쓰고 다시 집어넣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자기 결심과 상관없는 성령의 촉구를 인식한다. 시간표는 영적인 삶에 가장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영적인 삶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에 당연히 깔끔하게 정돈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게 마련이다. 사도 바울의 글에는 자칭 전문가들을 짜증나게 만드는 문법의 파괴나 문장 중간에 새로운 생각을 불쑥 끼워 넣는 일이나 원래 다루던 내용을 잊고 이탈하는 사례가 많다는 점이 있다. 성령께서 그런 일을 하신다. 그러나 아주 말쑥하고 깔끔하게 잘 정돈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이지 설교가 아니며 기독교 또한 아니다. 별 쓸모가 없다. 기독교는 성령의 역동하는 힘으로서, 성령은 우리 자신과 우리 시간표에 무단으로 침입하셔서 우리를 촉구하고 흔들고 지극하여 기도하게 하시며, 성경을 연구하게 하시고, 영적인 것을 묵상하게 하신다. 이것은 성령으로 난 자들만 경험하는 일이다. 신성한 동료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다루신다. 그분의 소원은 결국 우리를 완전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우리는 다른 것을 하고 싶은데 성령이 계속 간섭하시고 촉구하시며 권고하시기 때문에 그에 저항하며 싸우게 된다. 우리가 그렇게 싸우는 것은 성령의 존재와 자신의 행동을 의식한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비겁함을 느끼고 탄식하게 된다. 그래서 성령을 탄식하게 만든 죄, 나의 가슴에서 몰아 낸 죄를 슬퍼합니다라고 기도하게 된다. 거듭난 자는 이렇게 성령의 촉구하심을 인식하는 것이다.

 

2) 성령은 촉구하실 뿐 아니라, 인도하시고 지도하신다

(1) 빌립의 경우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후 다음과 같은 일을 경험한다. “주의 사자가 발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8:26-27). 그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큰 권세를 가진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이다. 그는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오는 수레 안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아나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29-30). 여기 요점이 있다. “성령이 빌립더라 이르셨다. 단순히 빌립이 가서 말을 걸어 봐야겠다고 결정한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빌립더러 이르셨다. 빌립은 성령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알았다. 어렵지 않게 알았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2) 바나바와 바울의 경우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13:1-2). 진짜 음성이 들린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온전히 확신했다.

 

(3) 아시아가 아닌 유럽을 위한 성령의 인도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차이점이 분명하다. 그들은 가기로 결정하고 계획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성령이 못하게 막으셨다. 성령이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이처럼 성령과 교제하는 신령한 자는 성령이 언제 무엇을 하라고 하시며 언제 하지 말라고 하시는지 안다. 이것이 육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의 대조적인 차이점이다. 위대하고 천재적인 인물이었던 바울이 보기에는 아시아로 가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고 분명히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영적으로 충분히 예민했던 그는 이것이 성령의 뜻이 아님을 감지했다. 그래서 아시아가 아니라면 무시아와 비두니아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령은 그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결국 그는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 내려갔다. 요점은 유럽의 빌립보로 가는 것이 성령의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길도 막고 저 길도 막아 결국 한 가지 선택만 남게 하셨다. 사도는 계속 직행해야 했고 결국 드로아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이 왜 드로아에 있는지 몰랐다. 도착한 날 밤,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러나 처음에 이유를 몰랐음에도 성령의 임재와 역사와 인도에 예민했기 때문에 그가 좌우를 막으시는 것을 알고 순종했다.

 

(4) 바울의 경험의 간증

에베소 장로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는 사도행전 20장의 서정적인 장면에서 그는 말한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중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20:22-23). 성령은 여러 사람을 통해 이것을 증언하셨다. 여러 사람에게 지각을 주심으로 사도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하셨다. 사도행전 214절은 좀 더 명확히 기록한다. 바울은 또 다른 곳에 가서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 때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런 것이 성령의 인도와 지도이다. 모든 시대의 성도들의 생애를 보면 그들도 성령의 인도로 점점 더 예민하게 인식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성령의 인도 없이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자들까지 있었다. 우리는 이 동료 관계, “성령의 교통하심에 대해 알고 있는가? 성령의 인도와 지도를 인식할 만큼 그를 인식하고 있는가?

 

3) 성령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임무를 맡기시고 그 임무를 수행할 권위와 특별한 능력을 주신다

성령의 능력은 또 다른 시금석이다. 신약에 그 예가 많이 나온다. 사도행전 4장에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성전 미문의 병자를 고친 일로 체포되어 예루살렘 산헤드린 범정에 소환된 사건을 보라. 그들은 병자를 고치고 설교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당국자들이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는 것이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4:7-8). 다른 많은 이들처럼 이 말을 오해하지 말자. 그들은 오직 한번만 성령으로 충만해진다고 말한다. 성령 충만은 모든 사람이 중생할 때 단 한번 경험하는 일인가? 아니다. 성령충만은 계속 반복되는 일이다. 여러 번 거듭하여 성령으로 충만해 질 수 있다. 베드로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과 요한과 온 교회의 생명을 놓고 싸워야 하는 힘든 상황, 기독교 신앙의 장래 전체를 놓고 싸워야 하는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하고 중대한 순간으로 베드로는 자기 부족함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그는 오순절 날 이미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자신이 지금 어떤 영역에 있는지 알고 있었고, 성령께 의존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는 틀림없이 바른 인도를 구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지혜와 총명의 말을 받았고 능력과 권위를 받았다. 그와 이야기를 나눈 당국자들은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4:13).

 

그들의 판단은 틀렸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와 함께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때는 오히려 십자가를 앞두고 그를 부인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지금의 담대함을 설명할 수가 없다. 베드로는 3년 동안이나 예수와 함께 있었지만, 그가 재판받으실 때 여종 앞에서 그를 부인했다. 맹세와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다. 그렇다. 예수와 함께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것으로 지금의 담대함을 설명할 수가 없다. 당국자들의 판단은 틀렸다. 예수와 함께 있었던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무엇의 시작이었는가? 베드로는 예수와 함께 있었기에 마침내 그를 믿게 되었고,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설명을 친히 보았으며, 예루살렘에 머물라는 명령을 받았고 성령세례를 받았다. 영적인 영역에 대한 지식을 얻었고,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실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를 경험했다. 베드로는 이것을 알았기에 자기 필요를 깨닫고 성령을 의지한 것이며, 명확함과 총명함과 언변과 정연하게 말하고 진술하는 능력을 충만히 받은 것이다. 그는 성령이 충만하여 말했다. 사도행전에는 이런 일에 계속 반복된다. 이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전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나아가며]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경험으로 알아야 한다. 성령의 능력과 지각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성령 충만과 성경 읽기의 관련성을 이제 우리가 잘 안다. 성령충만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일과도 관련이 있음을 안다. 법정에 나가 진술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의 말을 받을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만 이런 능력과 권세와 자유를 주실 수 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7-18). 이것이 성령의 능력이요 활동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런 것이다. 혼자 힘으로 피곤하고 수고롭게 의무를 다하고자 애쓰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에게서 나오는 삶, 성령이 들어와 우리 삶으 새롭게 하시고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시고 촉구하시는 삶, 능력과 권위와 지각을 주시는 삶, 무엇보다 성령 자신을 인식시켜 주시는 삶이다.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내가 어떻게 기적을 행하고 이런 설교를 하는지 물을 필요가 없다 진실로 진실로 말하는데 너는 거듭나야 한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이와 같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무력한 존재임을 아는 자는 기도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숨결로 우리의 숨을 내쉬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하도록 기도하자! 이와 같은 성령을 갈망하고 간구함으로 성령과 교통하며 살아내는 우리의 삶의 시간과 공간이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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