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생명의 징표 엡 3:18-19, 요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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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생명의 징표 엡 3:18-19, 요 3:1-8

이윤석 목사 0 2023.10.28 13:50

[들어가며]

 

니고데모는 자신에게 분명 없는 무엇인가를 얻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야기 전체를 보면 예수께서 그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시고 2장 끝의 표현대로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며 모든 인간의 실상을 아시는 주님은 그의 말을 끊으시고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볼 수도 없음을 지적하셨다. 이것이 니고데모의 문제점이었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의 문제점이며, 특히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의 문제점이다. 이처럼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이다. 우리가 거듭나지 못할 때 하나님의 생명에 들어가거나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의 살필 수 있는 주제 중에서 가장 심각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달에 생각했던 생명의 몇 가지 특징을 다시 되새겨 보자.


1. 거듭난 자는 이 생명이 드러난다.

복음서는 주님이 숨어 계실 수 없었다고 말한다(7:24). 그리스도인도 숨어 있을 수 없다. 사람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다른 특징들도 여전히 남아있지만, 새 생명이 가장 분명한 특징으로 드러난다.

 

2. 거듭난 자는 하나님이 자신을 다루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겸손하다 진정으로 회개한다. 기본적으로 진지하다. 거드름을 피우거나 짐짓 엄숙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기본적으로 진지하다. 우리 주님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53:3)로 묘사한다.


3. 거듭난 자는 자기 안에 새 생명과 새 본성이 생긴 것을 깨달으며, 그런 자기 모습에 놀라게 되어 있다.

자기 갚은 사람이 새 생명을 얻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쉽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일이다.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요 특별한 일이다. 이 일이 일어나면 다른 사람들도 그 변화를 알아본다.


4. 거듭난 자는 그의 거듭남과 영적인 지각의 필연적인 연관성을 알고 있다.

불쌍한 니고데모는 그 지각이 없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물었다. 그의 모습은 이성주의자의 모습이다. 자기 능력을 의지하는 육에 속한 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생명을 받은 자는 이해한다. 바울은 자신 뿐 아니라 거듭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고전 2:16)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했다.

 

5. 거듭난 자는 생명의 성장 원리가 생기고 더 많이 알고 이해하기를 바라는 열망이 생기게 되어 있다.

생명의 성장 원리가 그렇다. 작은 씨를 땅에 심으면 생명이 발아하여 확장되고 성장하고 뻗어 나가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찾게 되어 있다. 이 특징이 생물과 무생물을 갈라놓는다. 먼저 태어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아기가 되어, 자기기 시작하고 아이가 되고, 청년이 된다. 사도 요한이 첫째 서신에서 아이와 청년과 아비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생명의 본질도 이와 같다. 더 많이 열망한다는 것이다.

 

1) 이 열망의 정도는 다양하다

한 가족이라도 자라는 모습이 다르고 속도가 다른 것처럼 영적인 생명이 자라는 정도도 차이가 있다. 베드로 사도는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2-3).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자는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순전한 말씀을 열망한다. 사도 바울도 자기 경험에 비추어 이 점을 설명한다. 사도는 자신의 놀라운 체험과 이방인의 사도로 일하며 거둔 놀라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스도를 알고자 한다고, 그것이 자신의 열망이라고 말한다. 바울 사도는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3:8,9)라고 하면서 진정 그리스도를 추구했다. 또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0-12) 라고 하면서 그는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도 결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고 더 많은 것을 열망했고 그것을 얻기 위해 달려갔다(13-16).

 

2) 달리 표현하자면, 자기 무지를 인식하는 것이 이 생명을 검증하는 좋은 시금석이다

어떤 영역에서든지 많이 알수록 자기 무지를 인식하는 법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영적인 이해력과 지식이 생길수록 자기 무지를 인식하게 된다. 예수님의 복음은 진리이며 진리는 정신과 지각에 빛과 교훈과 지식을 준다. 거듭난 자는 자신이 무지의 어둠 속에 있었던 것을 깨닫는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설교자로 삼아주신 것에 놀라면서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다고 고백한다(딤전 1:13).그런 사람이 이제 그 죄를 깨닫고 무지의 무서운 위험성에 놀라는 것이다. 물론 그 깨달음이 찾아오는 즉시, 더 많이 알고 싶은 열망이 생긴다. 전에는 무엇을 놓쳤는지 알기에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3) 그뿐 아니라 무지의 위험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거듭난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생긴다. 성령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제시해 주신다. 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대적, 원수, 고소자인 마귀도 인식하게 된다. 그가 얼마나 교묘한지 인식한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대적 마귀에 대한 것임을 모르기에 구원 교리를 우습게 안다. 그러나 신자는 그 지식을 가지고 있다. 새 생명을 가진 자, 영적인 이해력과 지각을 가진 자는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 위험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안다. 마귀의 특별한 공격 대상이 된 것을 안다.

 

(1) 그러면 마귀는 어떻게 신자를 공격하는가?

그는 기독교 전체를 조롱하여 들지 않는다. 그 대신 이단을 만들어 내거나, 오류에 빠뜨리거나, 특징 문제에 대한 의심과 의문을 일으키려 든다. 현재 마귀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진화론 같은 문제나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고 있다. 마귀는 이렇게 교묘하다.

(2) 참으로 신령한 자는 단순히 성경만 아는 것이 아니라 이런 교묘한 위험을 알아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위험에 빠졌던 사례들이 있다. 교회 역사에도 이런 위험이 항상 있어 왔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더 많은 지식을 알고자 한다. 당신은 50년 전과 똑같이 알고 있는가? 그때보다 더 알게 된 것이나 이해하게 된 것이나 더 깊이 체험한 것이 있는가? 이런 것이 없다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영적인 갓난아이로 시작해서 갓난 아기로 인생을 마친다. 그런 영적 아이들은 쉽게 짜증을 내며 배우기를 싫어한다. 지식을 싫어하며 더 이상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아이들도 종종 학교에 가기 싫어한다. 영적인 영역에서도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참 생명을 가진 자는 그 위험을 깨닫는다. 여러 가지 오류와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영적인 문제에 더 많은 빛을 비추어 주시길 열망하며 더 많은 지식과 교훈을 주시기를 열망한다.

 

4) 적극적으로 실제로 이 생명을 가진 자, 영적인 지각을 가진 자는 자신이 마치 가난한 길거리에서 자라다가 큰 성에 들어간 사람과 같음을 깨닫는다. 그리스도인은 거대한 보물창고 안으로 안내 받는다. 그 보고 안에 무엇이 있는가? 사도 바울은 자신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3:8) 사명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18-19) 하는 것이 자기가 할 일이라고 말한다. 그 충만함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은 깨어 온 정신을 기울인다. 그 충만함을 소원하고 추구한다. 그 충만함에 참여하길 갈망한다. 당신은 이런 갈망에 대해 나는 바가 있는가? 이런 굶주림과 목마름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 이 위대한 말씀의 비밀, 그 깊은 곳을 깨고 있는가? 이미 찾은 보화도 엄청나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고 멈출 수는 없다.

 

5)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참된 영적인 생명을 가진 자는 예비적인 수준에 만족하지 못한다.

진리는 단계와 수준이 있다. 일단 토대가 되는 진리들이 있다. 바울 사도는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엇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라고 말한다. 이 토대 위에 계속해서 건물을 세워 나가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듯 그것은 그리스도의 도의 초도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6:1-2)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란 우선적인 원리와 요소, 출발점이 되는 기초적이고 간단한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은 도입부일 뿐이다. 당연히 다른 진리들로 나아가야 한다. 어떤 과목이든 공부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예비적인 수업을 받으면서 교과서 앞부분을 읽는 일은 아주 쉽고 간단하다. 그런데 내용이 점점 복잡하고 어려워지면서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그렇게 계속 공부해 나가는 가운데 저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우리가 바라는 바는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하는 것이다. 영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1) 성경읽기에 대해 생각해보자

아이들은 아이들 수준에 맞게 읽는다. 그런데 인생의 후반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읽고 있다면 확실히 잘못된 일이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말씀의 깊이를 인식해야 한다. 말씀을 붙잡기 위해 씨름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더 크고 깊은 것, 훨씬 더 어려운 것을 이해하기를 열망하며 기꺼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것을 말한다. 511-12절에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 더 깊은 진리를 이해할 힘을 받은 자는 간절히 그 진리를 얻고 싶어 한다. 만약 여러분이 평생 같은 상태에 머물고 있다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을 상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2) 삶에 성장과 발전과 확장의 증거가 있는가?

시간이 없는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이 보고가 어떤 곳인지 모르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지금도 계속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보화인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앞에 있다. 생명이 있는 자라면 본능적으로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어 있다.

 

6) 진정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는 이 지식과 진리를 더 많이 알아서 다른 사람들을 돕기를 열망한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지각으로 남을 돕고 싶어 한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벧전 3:15)라고 말한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우리가 어두운 밤을 밝히는 광채와 같다고 말한다. 세상은 어두움 속에 잠겨 있다. 그런데 우리는 거듭나서 예수님께 속함으로 세상의 빛이 되었다. 우리가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생명의 말씀을 밝힐(2:15-16) 예수님의 빛이 우리에게 반사되어 세상을 비춘다. 영적인 지각과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것을 느끼며 활동한다. 그래서 항상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를 묻는다. 자신이 진리를 모르면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는 없다. 체험도 필요하지만, 거듭난 자는 자신이 진리를 알고 이해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주고 해석해 주며 대답해 주고 싶은 열망,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돕고 싶은 열망을 느낀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영적인 이해력이 점점 커지길 더욱 열망하게 된다.

 

7) 중생한 자는 중생하지 못한 자를 염려한다

사도행전 8장은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8:3-4).라고 기록한다. 여기 전할 새라고 번역된 단어는 소문낼 새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 말씀의 소문을 냈다는 것이다. 그 다음 구절에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5)라고 말씀한다. 빌립은 전도자요 설교자로서 복음을 선포했다. 그런데 흩어진 사람들은 복음의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화 중에 복음을 이야기하고 설명하고 이해시켰다. ”우리가 박해받은 이유는 이것입니다하면서 가는 곳마다 진리를 이야기했다. 그 흩어진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들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1) 독실한 종교인은 중생하지 못한 자를 염려하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자기 신앙에 만족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져 독실하게 살 뿐이다. 그는 도덕적인 삶을 살며 남들이 그렇게 살지 않는 것에 놀란다. 그런 자들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본다. 마치 바리새인과 같다. 그러나 도덕성을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밑바닥 인생을 보며 끔찍하게 여길 뿐, 도와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밑바닥 인생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잘 생각해보라. 

(2) 새 생명이 있는 자는 없는 자를 염려한다.

물론 육체적인 거짓 열심을 가진 자들도 있다. 육체적인 열심은 항상 권위로 눌러서 무엇을 하게 만든다.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육체적인 열심은 그 체제 안에 있는 자에게 밖에 나가 회심자를 데려오라고 명령하고 그는 즉시 그 명령을 실행한다. 그것은 본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일이 아니다. 외부에서 부과된 것이다. 그런 육체적인 열심의 특징은 가볍고 말을 잘하고 어느 정도 기계적이다. 또한 대개 자극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항상 육체적인 욕심을 자극해서 이런 활동을 하게 만든다. 이런 자들은 거의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 상투적인 문구와 애호하는 관용구 및 표현으로 특징지어진 기교를 사용한다. 그들의 관심은 항상 숫자에 있다. 그것은 육체적인 열심의 표지이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회심자를 얻었는지 알리고 싶어 한다. 세속적이다. 이것은 대기업의 방식이지 우리가 지금 다루는 방식이 아니다. 마귀는 그리스도인의 삼도 이런 육체적인 열심으로 살도록, 자신이 만들어 낸 모조품으로 살도록 설득한다. 이런 엄청난 열심, 전도의 열심은 가자이다. 진짜를 가장한 가짜이다. 

(3) 참된 열심은 자발성에 있다. 속에서 우러나오는데 있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영적인 이해력을 의식하면서 남을 생각하고 관찰한다. 그들이 어둠 속에 있음을 깨닫고 그들에 대한 염려가 생기는 것을 의식한다. 이 일에는 민감성이 필요하다. 그것의 좋은 표지는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는 진리를 이해하기에 다른 이들을 깊이 염려하기 시작한다. 단순히 회심자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걱정하며 그들 때문에 영혼의 비통함을 느낀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채운다는 표현을 쓴다(1:24).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우리의 영혼에 대한 비통함 때문에 세상에 오셨다. 이 예수의 생명을 가진 자는 기계적으로 행동하지 못한다. 사람을 데려오는 일은 마귀도 허용할 수 있고, 인간도 준비하며 조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생명을 가진 자는 다른 영혼으로 인한 비통함이 무엇인지 안다. 주님이 느끼신 긍휼을 느낀다. 예수의 생명을 가진 자는 그 긍휼이 무엇인지 안다. 가벼운 마음으로 새 회심자를 구하러 나서지 못한다. 그에게는 깊은 진시함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다루며 영원한 운명을 다루는 일이며 성령이 관여하시는 일임을 알기 때문에 아주 진지하다. 그래서 기도한다. 상대방이 자신의 증언을 즉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진저리를 치거나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지 않고 인내한다. 그 사람의 영혼을 염려하기에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주님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삶과 태도로 중생하지 못한 자를 대함으로서 복되신 주와 구주되신 주님의 생명을 재생산해 낸다.

 

[결어]

우리는 다른 영혼을 향한 염려, 깊고 진정한 염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런 염려에 짓눌리고 있고 이런 부담에 대해 알고 있으며 이런 염려 때문에 비통해하는가? 기도하고 있는가? 이런 일을 다루려면 오직 성령의 큰 부으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아직도 조직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영적인 시간을 가진 자는 이 문제의 깊이와 심각성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높이와 무한함을 안다. 이런 생각들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점검하는 은혜를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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