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와 그의 미덕 요 3:1-5
[들어가며]
요한복음을 핵심구절은 첫 장에서 밝혔듯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16)는 말씀이다. 우리가 여기에 집중해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여기에 달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누군가를 알아야 하는데 이 구절이 그리스도인의 현재를 말해주는 가장 좋은 구절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당연히 복음의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서 받는 생명이다. 이 핵심을 잊으면 기독교 전체의 위대함과 영광과 찬란함을 놓치게 된다. 우리는 기독교의 핵심이 생명이요,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데서 받는데 있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자! 그래서 우리는 먼저 자신에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나 자신이 이 충만함을 받은 자임을 알고 있는가? 오늘도 나는 은혜위의 은혜를 받고 있는가? 더 많이 받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과거 나의 경험이나 결단에 기대어 신앙생활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머리되신 그분께 연결되어 있고 생명이 흘려내려 우리의 존재에 스며드는지 점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생명의 충만함을 나타낼 때만 교회는 실제로 제 역할을 하게 되며, 그 때에야 비로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가 그렇게 되고 있는가? 실제로 말한다면 오늘날 교회는 거의 중요치 않는 곳이 되고 말았고 점점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이것은 참 답답한 노릇이다. 이런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교회가 활동이나 조직이나 프로그램에 기대어 사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들은 과연 아는 대로 움직이고 있는가? 교회 밖의 사람들이 세상이 무지와 어둠과 죽음 속에서도 알아보는 유일한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이 생명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충분한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데서 받고 있는가? 우리는 그분의 충만함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오늘을 살아내는 가운데 우리의 최고의 열망이 되자!
우리에게 발생하는 어려움들은 이러 질문과 관계되어 있다 우리에게 있는 장애물이 무엇일까? 우리가 충분히 어린아이 같지 못하다는 것이다. 단순하지 못하다. 너무 똑똑하고 복잡해서 오히려 문제이다. 이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자: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성경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왜 그럴까? 우리가 어떻게 실수하고 어떤 함정과 잘못에 빠졌는지 살펴보고 알아봄으로 경고와 교훈을 받고, 우리가 더 적극적인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인간 영혼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생명, 인간 최고의 필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에 이르도록 돕기 위해 말씀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우리가 알아야 할 교과서로 여기고 접근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필요한 이 모든 충만함을 가진 분인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는 것이다.
이제 니고데모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주님의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어려움들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보자. 요한복음 3장이 전반부에서 사도 요한의 목적은 니고데모가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밝히려는데 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그의 특성이나 미덕을 살펴보고, 장애물을 살펴보자.
I. 니고데모의 특징은 무엇일까?
1. 그는 아주 독실하고 유능한 선생이다
그는 독실한 경건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연구하고 다른 이들을 가르치며 교훈하는 것이 그의 평생의 일이었다. 2장에 있는 사람들과 매우 다른 사람이다. 2장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경솔하고 몰지각한 자들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군중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전혀 달랐다. 여러 가지 면에서 훌륭한 인물이며, 독실하고 지적인 선생이었다.
2. 그는 편견에서 자유로웠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대부분 편견으로 가득 찼었다. 2장에서 그들은 주님에 대해서 바리새인도 아닌 주제에 대체 무슨 권리로 이런 짓을 하느냐는 식이었다. 그들은 편협했으며, 늘 주님 말씀과 가르침에서 흠을 잡고 잘못을 입증할 틈을 노렸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완전히 달랐다. 사람에게 있는 편견은 명확하지 못한 생각과 무지함에서 나온 것이다. 이 편견은 심각하고 감정적이며 큰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에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런 편견에서 매우 자유로웠고 다른 사람과 달랐던 존경할만한 인물이었다.
3. 그는 그만의 특별한 미덕이 있었다
1) 그는 기적의 의미를 아는 영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기적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2장의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그 의미를 얄팍하게 알고 쉽게 믿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볼거리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그는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주님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그래 이분이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면 평범한 분이 아님이 분명해! “유일무일하게 죄 없는 사람,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 복 받은 사람인 것이 분명해, 저 분에게는 정말 특별한 것이 있어!” 이렇게 그는 기적을 분명하게 평가했다. 그는 주님은 단순히 기적 행하는 놀라운 그런 분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놀라운 통찰력으로 말한다: “그가 밤에 예수께서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 그는 실상을 제대로 알만큼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가 예수님을 누구로 알았는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으로 알았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분, 하나님으로 인해 표적을 행하시는 분으로 알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는 생각하는 사암이었다. 주님이 행하신 기적의 실제 의미를 파악할 만큼 영적으로 충분히 밝은 사람이었다.
2) 그는 주님의 인격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그는 주님을 무엇이라 불렀는가? “랍비여”라고 불렀다. 목수에 불과한 30여세, 그리고 가장 무시 받던 지역으로 유대로 취급되지 않을 정도의 나사렛 시골구석 사람을 선생님, 스승이라고 불렀다. 니고데모는 지금 유대인의 높은 지도자이다. 그런데 이런 호칭을 쓴 것을 보면, 주님에게서 아주 비범하고 예외적인 무언가를 감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먼저 주님이 유일무이한 분이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주님을 다른 종교의 위대한 스승들보다 뛰어난 정도로 아는 사람은 신앙의 출발조차 하지 못한 것으로, 그는 충만함을 받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랍비, 이스라엘의 놀라운 선생(스승)이라고 부르고 있다.
3) 그는 자신에게 없는 것이 주님께 있음을 아주 분명하게 인식했다
이것이 니고데모의 정말 훌륭한 점이다. 자신이 높은 지위를 가진 대단한 인물이었음에도 예수님을 주시했다. 같은 지위의 사람들은 전부 편견에 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관계를 하나님과 맺고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했고, 그 점에 끌려서 주님께 왔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삶에 중대한 열쇠이다. 주님의 충만함을 받는데 필요한 중대한 열쇠이다. 우리는 이 열쇠를 가지자!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알고 영원한 영광을 미리 맛보는 사람이 되자!
4) 소극적으로 자기만족에 빠지거나 자기 상태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더 큰 것을 바랐다. 많은 사람들의 문제점이 무엇일까? 자신이 자기만족에 빠져 이미 자기가 이를 곳에 도달했고 자기가 가졌다고 생각하는데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어려서부터 교회 다니고 결단했으니 다 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자유분방하게 지내고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나 니고데모 영적인 영역에 민감했다. 비상한 기적을 행하는 새롭고 낯선 인물을 발견한 즉시 ‘저 사람에게는 나한테 없는 것이 있구나” 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친밀한 분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임을 확신했다. 그 깊은 것을 알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다.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보자. 여러분은 지금 상태에 만족하는가? 자신에게 만족하는가? 아니면 부족함과 불편함을 느끼는가? 우리에게 과연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 있는가? 우리에게 더 크고 위대하고 깊은 것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는가? 내 속에 이런 필요가 있고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 더 충만해지고 싶은 갈망이 있는가? 하나님께 더 큰 충만함을 받고 싶은 열망을 가지자! 만일 우리가 이런 열망이 없다면 소망이 없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망함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분을 알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는가?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주님을 바라볼 때, 의에 깊이 주리고 목마른 마음과 부족감을 느끼자! 지금 자신이 누리지 못하는 충만함, 꼭 누려야 할 충만함이 없음을 느끼자! 아! 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이런 필요를 가지고 이 해결을 위해 주님을 찾자!
3. 주님을 찾아와 대화를 청하고 교훈을 구할 만큼 겸손했다
유대인 산헤드린 지도자가 무명의 주님을 찾아와 대화를 청할 만큼 겸손했다는 것이다. 그는 주님과 하나님사이의 유대감과 경험의 깊이, 그분의 삶의 질이 자신이나 동료 이스라엘의 선생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스스로 겸손해질 수는 없다. 적어도 완벽한 대상을 보고 대조되는 자기 실상을 보아야 진정 겸손해진다.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에, 심령이 가난해 진다고 말씀하셨다(마5:3,5).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한다: “너무 과찬하시네요. 그는 낮에 찾아오지 못하고 밤에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창피해서 슬그머니 온 거잖아요?” 아니다! 이렇게 한 것이 오히려 니고데모의 미덕이다. 그는 아주 현명한 인물로 모든 필요를 인식했다. 이름도 없는 선생을 찾아오는 일에 신중을 기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조심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분별력을 가르친다. 시험하고 확증하고 검증하라고 가르친다(고후 13:5).
2장의 유대인들은 기적에 이끌려 덥석 쫓아왔지만, 주님은 받아주지 않으셨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밤에 주님을 찾아온 것은 좋은 일이요 잘한 일이다. 그는 책임이 따르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생각 없이 아무 데나 덥석 뛰어들면 안 된다. 그에게는 이 두 요소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먼저는 자신이 받은 교육과 배경과 동료들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필요를 인식했고 아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그러면서 자기 위치를 깊이 생각했다. 이것은 아주 좋은 태도요 훌륭한 인물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기 책임에 대한 인식과 충만함을 주님께 받아야 할 것을 생각하고 그날 밤에 찾아온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 자신의 감정을 행동에 옮기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통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나 위험이 무엇인가? 어떤 집회에 참석하거나 좋은 책을 읽거나 어떤 충격적인 일을 겪을 때, 갑자기 동요가 일어나면 갈망이 조금 생긴다. 마음이 흔들리며 이대로 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더 좋고 높은 것이 있다는 깨달음이 찾아오면 그것을 얻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 그런데 문제가 무언가? 그것으로 끝이다! 왜 그럴까? 그 감정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갈망이 잠시 찾아왔다가 금방 사라져 버린다. 잔잔한 물결이 잠시 영혼의 표면에 일어났다가 다시 가라앉고 만다. 결국 모든 것을 잊고 예전으로 돌아가 버린다.
간단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과 생활 전체를 여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적용하고 행동해야 한다. 선한 충동과 생각을 바로 따라야 한다. 자신을 찾아온 깊은 확신에 귀를 기울이고, 마침내 비결을 찾기까지 쉬거나 안주하지 않고 곧바로 움직이자! 이런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주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강청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잠을 자야 할 시간에 벌떡 일어나 말했다. “나는 확실히 이것을 얻어야 해! 내게는 없고 그분에게는 있는 것, 그것이 뭘까? 꼭 알아 봐야겠다! 밤이라도 가자! 가서 만나봐야겠다.” 그가 생각한 결심대로 행동에 옮겼다. 우리는 단순히 감정을 느끼는 데서 그치지 말자! 문제는 충만함을 받았느냐는 것이다. 충만함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어도 니고데모처럼 해야 한다. 주님께 나아가자! 밤이라도 즉시 나아가자! 알려주신 생각이 행동으로 옮기도록 최선을 다하자!
II. 여기서 본문에 나타난 우리 구주, 주님의 모습을 살펴보자
1. 주님은 항상 동일하신 분, 변하지 않는 분이시다
주님은 항상 모든 것 위에 우뚝 솟아 계신다. 늘 상황을 장악하신다! 2장에서 주님은 가나 혼인잔치에 단순한 손님으로 참석하셨을 때도 상황을 지배하셨다. 유월절 예루살렘 올라가셨을 때도 상황을 지배하셨다. 결코 숨을 수 없고 숨길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성전에 가셔도 주인이셨다. 유대의 지도자들이 함부로 묻고 부당한 말을 할 때도 똑같이 위엄이 있으셨다. 이렇게 언제나 동일하시다. 언제나 상황을 장악하고 주도권을 잡으신다! 우리는 항상 주님에 대해 이 사실을 알고 인정하고 나타내야 한다!
2.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1장에서도 나다나엘을 보며 뭐라고 하셨는가?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1:47).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25).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은 무서운 사실이면서 또한 큰 위로이다. 우리가 부족한 모습 그대로 나아갈 때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정확히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이 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우리 필요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알지 못한다. 니고데모도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우리 자신도 자신을 제대로 모른다. 영적인 삶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내 최선의 감정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사방에 걸어놓고 세워놓은 방어막을 뚫고 문제를 들추어 눈앞에 보여주신다. 니고데모에게도 그렇게 하셨다. 우리는 우리 기분, 최고의 기분도 믿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만 기대자! 성령님께 의지하자!
3. 그래서 주님은 매정하고 날카롭게 문제를 지적하셨다
2절에 니고데모가 얼마나 잘 말하는가! 그렇게 잘 말하고 있는데, 주님이 갑자기 말의 허리를 끊어버리고 말씀하신다.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1) 그의 말을 가로채 끊으셨다
왜 그러실까? 그를 아셨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그가 그토록 추구하는 축복의 자리로 이끄는 길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를 아셨고 사랑하셨기에 그 중심의 문제와 필요를 직면하게 하신다. 여러분은 주님께 나아가기는 하는데, 자기 생각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주님을 지시하려 들 때가 많지 않는가? 우리는 축복이 이런 저런 방식으로 오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다른 말을 할 때면, 오히려 공격받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오히려 주님께 거절당한 것처럼, 일이 더 악화되는 것처럼 느끼며, ‘차라리 주님을 찾지 말 걸 괜히 왔는가?’라고 후회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주님께 완전히 전적으로 승복해야 한다. 왜 그런가? 주님께서 항상 주도권을 잡고 계시기 때문이다. 숨긴채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은 아시고 드러내신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 곧 은혜 위에 은혜를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큰 장애물을 보게 하신다.
2) 니고데모에게 그 장애물은 무엇이었을까?
(1) 첫째 장애물은 그가 여전히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한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예수께 대화할 만큼 겸손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순간부터는 더 이상 선생이 아니다. 아주 갖난 아이요, 학생이요 걸인일 뿐이다. 결코 더 이상 자신이 주도권을 잡으면 안 된다. 니고데모는 주님께 나아왔다. 겸손했다. 그러나 충분히 겸손치 못했다. 그는 주님을 몰랐던 사람과 구별되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아이가 되지는 못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다. 훌륭하면서 겸손한데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는다. 왜 그런가? 어린아이가 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거듭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끝까지 따라 다니는 장애물이다.
(2) 자신의 결핍을 알고 나아왔지만, 자격 없는 자임을 몰랐다
자신보다 훌륭한 선생으로 인정하면서, 자신 또한 선생으로 생각했다.
(3) 여전히 랍비라 부르고 배우려 했지만, 회개하는 자로 오지는 않았다
그는 도움의 필요함은 느꼈지만, 자신의 무력함까지 느끼지 않았다. 결국 우리가 주님의 충만한데서 받는 자라면 자신이 아무 소망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도움의 필요성 그 이상이다. 왜 그런가? 주님이 주도권을 잡지 않고 자기가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것에다 무엇인가를 더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4) 그의 문제점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이 생명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간절히 알고 싶었기 때문에 물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 수 있나이까?”(4, 9절). 주님이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취할 수 있고 더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이 아니다.
[나아가며]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풍성한 생명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 영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벧후 1:4). 아무리 좋은 특징과 미덕을 갖추었어도 주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가 되자! 나 자신은 자격 없는 자임을 자각하자! 주의 멍에를 메고 배우되 먼저는 회개하는 자로 오자! 주님이 주님 되시게 하자! 은혜 위의 은혜의 풍성함이 더하기까지 주님을 주님으로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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