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시켜 주시는 복(요 2:9-10)
[들어가며]
요한복음의 대주제는 죄용서 받음에서 더 나아가 생명을 주시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나타나는 이 첫 번째 표적의 목적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증거하려는 것이며, 그분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생명을 풍성하게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늘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질문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생명을 얻었는가'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의 은혜러라!(1:16)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천국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매우 풍성하게 열매 맺는 일에 동참하고, 더 충만한 가운데 하늘의 만나인 천국의 열매를 맺고, 참 생명을 함께 나누게 되기를 바란다. 어떻게 하면 이것이 실제적인 가르침이 될 수 있을까
I. 일반적인 특징을 먼저 살펴보자
1. 특별한 축복을 살펴보기 전에 일반적인 축복이라면, 이 축복은 언제나 순수하다는 것이다.
연회장이 뭐라고 말하는가?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2:10). 연회장이 칭찬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당황하여서 한 말이다.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가 남아있다는데 놀랐을 뿐 아니라, 또 그 포도주가 대단한 상품이었다는 데 더욱 놀란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평생 살아오면서 그가 경험했던 세상의 관례와는 완전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또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충만함의 크고 기본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순수하고 섞이지 않아, 세상이 주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1) 세상의 특징은 한 마디로 위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지혜로운 자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제 경험으로 보면,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가장 좋은 포도주가 바닥이 나지요. 또 다른 여분의 포도주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처음에는 가장 좋은 포도주로 손님을 대접하지만, 손님들이 고주망태가 되어 좋은 포도주를 구별할 능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보다 수준이 떨어진 포도주를 가져오는 것이지요.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다르다. 우리 주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포도주는 전혀 다르다. 이 풍성한 삶의 질보다 더 영광스럽고 놀라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세상적인 방법은 가계 진열장에 가장 좋은 상품들을 유리창 밖에 진열해 놓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가게 앞을 지나다가 탐스러운 과일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 산다. 그런데 집에 와서 그 상자를 열어보면, 창문으로 보았던 과일과는 완전히 다른 과일들을 본다. 가장 좋은 것만 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아내는 이런 것을 사오면 정말 희한하게 사온다고 핀잔을 준다. 나는 물건을 열어볼 생각을 안 하고 그냥 다 그러려니 믿기 때문이다. 밑에 다 숨긴 것은 생각도 안한 것이다. 이렇게 밑에 다 숨겨놓은 것을 위선이라고 한다. 이렇게 세상은 ‘번쩍 거리는 것을 보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상처럼 주려고 한다. 그런데 세상이 주려는 것은 늘 속임수에 불과하다. 늘 위선적이고 사기성이 있다
* 이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를 최초로 유혹했던 죄였다.
마귀는 번쩍거리는 휘황찬란한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것을 얻는가? 전혀 아니다. 누가 봐도 처음에는 매혹적이고 매력적이다. 모든 것이 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단 그 안으로 들어가면, 더럽고 부패하고 진실도 정직도 없다. 결코 끝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위선과 거짓과 가식으로 가득 찼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다른 것을 제공해주시며, 그것은 순수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하다. 요한복음에서는 그것을 ‘영생’(17:3)]이라고 말씀한다. 그것은 참으로 생명다운 생명이다. 그것은 가장되거나 인위적이거나 충동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진실한 것이며 진실, 진리 그 자체이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5절에 “하나님의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라고 말씀한다. 그분은 완전한 빛이시다. 다른 것, 어둠이 섞여 있을 수 없으시다. 우리는 그분의 신의 성품에 참예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벧후 1:4). 그래서 우리는 그 아들 속에 있는 영생을 받는다.
3)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영광스러운 부분은 그것이 진열장에 있는 상품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가장 좋은 것보다 항상 언제나 더 좋다는 사실이다.
연회장을 놀라게 한 것은 좋은 포도주가 끝에도 나왔다는 점이다. 그가 말한다: “이 포도주는 처음 맛보았던 그 어떤 포도주보다 탁월하군요, 순수 자체군요” 여기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천국의 선물에 대한 진리를 말하고자 한다. 다윗은 이런 것을 맛보고 말한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 이것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다. 다윗은 악인의 휘황찬란한 장막보다, 하나님의 문지기가 훨씬 좋다는 것이다. 많고 크고 번쩍 거리는 것보다, 질적으로 순수한 것이 좋다는 것이다. 외관상의 문제나, 허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것, 거룩한 것을 추구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해 주시는 영존하는 생명, 하나님 자신의 선물이다! 이것이 기적이다. 우리가 이것을 추구하고 체험하자!
II. 그러면 우리에게 임하는 축복이 무엇인가?
1. 먼저 그것은 우리의 절박한 필요의 상태에 따라 임한다.
지금 포도주가 떨어진 상태는 정말 절박한 상태이다. 실망스럽고 절망적이다. 포도주가 다 떨어졌는데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럴 때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때이다.
1) 세상의 전체적인 비극은 늘 그것이 떨어져 부족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절실하게 가장 중요한 것이 꼭 필요한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포기할 뿐이다. 자신도 자신의 문제를 처리할 수 없다. 그러나 풍성한 삶의 빛은 그것이 철저하고 완벽하게 절망적인 형편에 처할 때 빛이 발하게 됨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자! 자신의 절박한 필요의 상태임을 알고 주님을 바라보자! 주님께 의존하자! 마리아가 말한 대로, 무슨 말씀을 해도 그대로 하자!
2) 이것은 영적 생명의 법칙 가운데 하나이다.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를 깨닫지 못하고 산다. 교인이며 신앙이 있다는데도 그렇다. 주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계 2:17). 한심한 것이다. 복음을 믿는다지만, 감격과 기쁨과 영광에 대해 모른다. 우리는 오히려 철저하게 빈털터리가 될 때만, 우리가 충만함을 받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고, 절망적일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어떤 일도 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제대로 부르짖을 수 있고, 이 선물을 받을 수 있다!
3)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광야로 인도하시는 때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성도들을 대하실 때, 늘 광야로 인도하신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도록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본문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아무도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다. 그래서 결국은 마리아가 주님께 나아가 약간 명령조로 무슨 일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한다. 곧 ‘계명을 지키라! 순종하라!’고 말한다. 축복을 위해 순종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모순이 있다. 계명을 지키라고 하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들이 계명을 지키면서도, 가질 수 있는 위험성은 계명 지키는 것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신실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면 내가 다른 것보다 이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모순이 아니다. 계명을 지키지만, 그것을 공로로 세우지 말자! 우리의 공로는 그리스도의 이름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밖에 없을 확신하자!
4)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했어도 그것은 여전히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순종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공로가 될까? 누가복음 17장에 나타난 주님의 비유를 들으라! ‘종들이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 매우 피곤했다. 정말 충실히 모든 일들을 잘 감당했다. 그런데도 식탁에 수종까지 들게 한다. 그리고 그들에 대하여 말씀 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할지니라”(눅 17:10). 우리가 자신의 활동을 의지하는 순간, 그 활동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의 순종은 내가 하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며 나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함을 내가 바로 알아야 신앙의 충만이 시작된다. 왜?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주님이시기 때문이며, 오직 주님이 구원해 주셔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이 완전히 파산하고 아무 것도 나아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만 한다.
5)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한, 우리는 결코 충만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하지만, 충만함을 모르는 채 매일 매일을 살 수 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충만한 삶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고, 그 혼인 잔치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 잔치를 즐기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그의 충만한데서 받고 있느니라’는 고백이다. 바울 사도는 말한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9). 하나님의 잔치 석상에 참석한 사람들은 누더기를 입고 먹을 것이 없어 길거리에 탈진 상태로 비틀거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았던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 절박한 필요를 깊이 느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2. 축복의 두 번째 특징은 그것이 모든 상황을 전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 충만해질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이다. 이것은 매우 특별한 변화다.
1) 그러기 위해 보다 고차원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갈망과 의지가 필요하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활동하는 것을 사모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그 가운데 들어간 사람들이다.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생명이 내재하는 것이다. 우리 영혼이 황량함에서 충만함으로, 두려움에서 기쁨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800년 전에 제 5복음의 선지자인 이사야가 그것을 보고 이렇게 묘사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사61:3). 이런 사람들은 공통적인 특징은 탄식하며 하나님을 찾고 또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욥은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할 곳을 알꼬”(23:3)라고 했다. 우리에게 이런 갈망이 있는가? 그것을 깨달을 때까지 대답을 알 수도 없고 또 그 충만함을 결코 깨달을 수 없다. 이 거룩한 갈망을 아는 사람들은 ‘나는 목마르다. 나는 약하다. 나는 죽는다’ 라고 말한다. 그 다음 어느 순간, 갑자기 임하는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생명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희락의 기름이 무엇이며, 찬송의 옷이 무엇인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2) 이것은 특별한 충만함이다. 특별한 확신에서 나오는 외침이 있다.
로마서 8장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그러나 사실은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 무엇으로 아는가? 신앙생활 하는데, 기쁨, 그 즐거움이 별로 없다. 언제나 아바 아버지를 부르짖는 즐거움이 있는가? 이사야는 그 때의 감격을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35:7)라고 감격한다. 만일 우리가 사막 길을 여행한다면, 탈진하고 약해지며 목마르게 될 것이다. 그때 연못을 발견한다면, 얼마나 즐거워할 것인가? 그런데 연못이라고 생각하고 막상 도착해보니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이 신기루다.
엄청난 충만함을 알았던 하나님의 성도들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 신앙생활하면서 계속해서 많은 신기루에 의해 속임을 당해 왔다. 그러나 결국은 진짜 연못을 발견하고 그곳을 마시고 거기서 목욕까지 할 수 있게 되는 충만함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 한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리라”(11:19). 이것은 완전한 대조이다. 돌 같은 마음, 의무적인 감정은 있지만 거의 감정이 없는 신앙상태. 감정이 있대도 근본적인 정서가 없는 상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
3) 신약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도다’(엡 2:1)라고 말씀한다.
마치 죽은 상태와 같은 우리 자신이 살아났고 새로운 생명력을 받았다는 감동이다.
가) 베드로가 매우 확신 넘치는 설교를 하고 있다. 그때 들은 사람들이 반응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라고 울부짖었다. 그들은 고통과 위기의식 속에서, 필사적이고 철저한 절망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사도행전 2장 46절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니...!“라고 말씀한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이다!
나) 에티오피아 내시 역사 똑같은 변화를 보여준다. 당황함과 고통, 불행함 속에서 그 말씀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빌립을 만나 말씀을 듣는 순간, 그가 기뻐하게 된 것이다(행 8:39).
4) 이 축복의 큰 특징에는 부분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상황을 바꾼다.
이런 충만함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과 그것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정말 하늘과 땅 차이의 신앙생활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고 용서받았는데,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있고, 늘 하늘의 만나를 받아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한 사람은 정말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이 은혜의 사람 속에 속하는가? 이 축복을 알고 사모하고 갈망하는 삶이 되자!
3. 세 번째 특징은 자신에게 일이 일어났던 때와 받은 때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고 확신으로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1) 여기에 한 가지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믿음으로 취하라는 공식 강조의 메시지다.
“당신은 충만함을 원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을 위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취하세요. 믿으세요“ 그러면 듣는 자가 말한다: “네. 제가 그렇게 했는데, 어떤 차이점도 느끼지 못했어요“ 메신저는 말한다: ‘너무 염려마세요. 내가 이것을 원하면 그것이 거기에 있다고 믿으세요.
’내가 간구했으니 받은 줄로 믿는다는 말씀처럼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합니다. 왜? 당신이 그것을 믿음으로 취하고 믿음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완전히 가짜 교훈이다. 믿음주의(Believism)는 믿음이 아니다. 본문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줄로 믿고 있으면 그렇게 되는건가? 결코 아니다. 그런 것은 오히려 허황된 믿음일 뿐이다. 그것이 일어나면 다 알게 된다. 분명하게 안다. 구원의 확신이 없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참된 의미에서 내가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 충만함에 참여할 수는 없다!
2) 확신의 신앙이 충만함에 관한 전체적인 가르침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
로마서 8장 16,17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한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정말 아는가? 알게 되기까지 되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말한다: “내가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설득되었습니다. 이제 확신합니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베드로 사도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1:8)라고 편지한다.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이런 체험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충만함을 위한 기도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능히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엡 3:16,17).
3) 적용해보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심령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주님은 믿는다는 교인들에게 말씀한다(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그분이 들어오셔서 먹고 마실 때 그분이 거기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 알 수 있다!
이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과거와 똑같이 그런 상태에 머무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감동이나 자극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손님이셨던 분이 이제 들어오셨다. 심방하셨다. 이것을 확실하게 안다는 것이다!
4)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부흥이다. 복음으로 인한 대각성이 꼭 필요하다.
들어오셨는지 아닌지 알지도 못하는데, ‘믿음으로 취하라!’는 잘못된 위험한 교훈이다. 우리가 고침을 받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안다. 바로 충만함의 실상이다. 이것이 우리가 충만함과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반드시 알게 된다. 자신도 알고 주위에서도 안다. 본문에 연회장이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았을 때,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 그러나 물 떠온 하인들은 알았다. 그리고 연회장도 알게 되었다. 종들도 알았다. 모든 손님들도 다 알게 되었다. 이렇게 아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이 임하셨을 때, 그 기쁨과 감격에 충만하였던 초대교회의 모습이다. 이방인 고넬료 집에 있는 베드로를 보라. 그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데 성령께서 내려오셨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세례 주는 것을 누가 막으리요”(행 11:1-8). 이것은 갑자기 오는 것이다. 참된 것이다. 변화를 보게 된다. 그리스도인 우리 자신만 아니라, 함께 잔치하며 함께 즐거운 것이다. 연회장과 손님들까지 간증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듯이 우리도 그래야 한다.
[나아가며]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가 정직하게 ‘그분이 오신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분을 제대로 아는가? 내가 지금 그분과 인격적으로 풍성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함께 식사하고 있는가? 내가 이 하늘의 만나, 충만하고 풍성한 생명을 맛보았는가? 먼저 사모하자! 깨달아 알도록 성령을 의지하자! 내 마음과 삶에 오셔서 이 축복을 받기까지 갈망하자! 그래서 온전하고 순전한 은혜, 분명한 변화, 확실하게 아는 축복으로 충만하게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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