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의 의도를 따르자! 요 2: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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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의 의도를 따르자! 요 2:18-22

이윤석 목사 1 2023.01.24 22:38
[들어가며]

우리가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요청받았을 때, 이에 대해 즉각 반응해야 할 것인가? 아니라면 왜 그리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반응 체계를 가져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원칙이 있어야 한다.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당시의 지도자들이 “네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데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라는 질문과 요청에 반응하시는 주님의 말씀에서 그 해결점과 교훈을 얻고자 한다.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긴급한 교훈으로 주는 말씀이다.

그 당시 지도자들의 요구가 무엇인가? 주님이 작은 채찍을 만드시고 짐승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을 때, 그들이 무엇이라고 반응하는가?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이것은 “네가 여기 제사장도 아니면서 성전에 들어왔구나!” “네가 지금 마치 성전의 주인처럼 주장하고 있구나!” “만일 네가 그 같은 주장을 한다면, 너는 그것을 증명해 보아라!” “네가 행사하는 권세에 대해 합당한 증거가 될만한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라!” “네가 이것을 할 수 있도록 부여받은 증거, 만질 수 있고,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보이라!”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그 지도자들은 표적을 보이되, 무엇보다 자신들이 볼 수 있도록 충격적이고 특별한 요구를 하고 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무엇인가? 주님이 그 지도자들의 요구를 어떻게 처리하시는가? 주님은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답변하시지 않는다. 대신에 이렇게 말씀 하신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주님의 대답은 간접적인 대답이기에, 사람들은 주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주님의 대답은 이와 같을 때가 많다. 그 사람들은 이것이 자신의 부활에 대한 예언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지만, 여기서 사도 요한은 이것을 분명히 밝힌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절).

1. 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이에 대해 바울 사도는 말한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11). 이처럼 우리 주님은 표적에 대한 전체적인 교훈을 주고 계신다!

   1) 주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그들은 지금 똑같이 은혜로운 초청을 받고 복음의 제시를 듣고 있지만, 이 종교지도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주님의 의도는 요한복음의 대주제, 곧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려는 것이라”(10:10)는 복음의 핵심을 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들은 풍성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있는가?

   2) 문제가 무엇인가?
     문제가 계속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표적에 대한 전체적인 문제를 왜곡시키고 표적에 대한 욕구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였다. 이것은 또한 계속되는 교회사의 교회들에 나타나는 문제였다. 여기서 문제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옳은 방법으로 시작했지만, 잘못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는 우리도 옳은 방법으로 신앙을 시작했다가도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왜 그럴까? 마귀가 언제나 우리를 혼란시키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악한 자는 하나님께 속한 일을 파멸시키기를 원한다. 그래서 자신을 빛의 천사라도 위장하여, 가짜를 만들어 은근히 주입함으로 계속 잘못된 방법으로 끝나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3) 이에 대한 주님의 요청과 반응은 무엇인가?
     주님은 계속해서 표적을 요청받으셨고 이미 그것을 말씀하셨다. 그들은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라는 똑같은 질문을 해왔다. 요한복음 6장에 주님이 오 천명을 먹이는 이적을 행하셨고 사람들을 그를 따랐다. 그때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6:30, 31) 라고 주장했다.

       (1) 그들은 지금 잘못된 요청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내용을 간접적으로 대답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6:32.33).

       (2) 주님은 이와 비슷한 요청의 경우를 말씀하셨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라. 부자가 죽어 지옥에 갔다. 지옥에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요청한다: “거지 나사로를 하늘로부터 세상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 보내주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 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이때 아브라함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부자는 대꾸한다: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그의 요청은 무엇인가? ”당신께서 그들에게 이 놀라운 표적을 보여주소서! 그러면 그들이 회개하고 믿으리이다“하는 것이다.

       (3) 요약하자면, 이미 가나 혼인잔치에서 표적을 보이셨는데 그 목적이 무엇일까?
         2장 11절에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믿으니라”라고 말씀한다. 곧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심으로 믿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표적의 목적은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인격을 증거하고 믿음을 장려해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지금 여러 곳에서 이 표적을 요구하는데, 왜 보여주시지 않으시는가? 이것은 바로 마귀가 들어오는 현장이며, 이런 지도자를 통해 역사하기 때문이다.

       (4) 주님은 이 표적에 대해 양분하여 말씀하신다
         마태는 주님의 일하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10:34). 주님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갈라놓는다. 여기서 그들이 반응하는 것은 두 가지 뿐이다.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갈릴리 가나에서 “제자들이 주님을 믿으니라”(12절)로 끝난다.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하)로 끝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전적으로 다르게 반응했다. 그들은 당황하고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표적을 구한 것이다. 보라! 양쪽이 똑같이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 같은 행동을 보고 있다. 그러나 반응은 완전히 양분된다. 이런 일이 현재도 일어나고 있다. 주님께서 저주하시는 반응은 무엇인가? 그들은 ‘왜 당신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명한 일을 행하심으로 우리에게 완벽한 증거를 보여주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한다. ‘그렇게만 하신다면, 우리가 당신의 권위를 믿을 것입니다’라고 주장한다.

   4) 여기 차이점이 있다
       여기서 유대지도자들과 주의 모친의 요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1) 주의 모친은 예수님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했다. 그때 주님께서 모친 마리아를 책망하셨다. 이처럼 유대지도자들도 책망 받았다. 그러나 마리아는 필요를 채워달라고 주님께 간구하고 있다. 마리아는 유대 지도자처럼, 표적을 얻기 위해 기적을 행해달라고 요청하지 않는다. 마리아는 동정과 자비를 요청하고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기적이 포함된 축복의 행동을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2) 세례요한도 마리아와 똑같은 경우이다
         세례요한이 주님께 두 제자를 보낸다. 요한이 감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2,3)라고 묻는다. 가엾은 세례요한이다. 그는 지금 감옥에 깊이 갇혀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약간의 혼돈에 빠졌다. 그리스도에 대해 위대한 증거를 나타내었는데, 그러나 예수께서 지금 지체하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 주님이 갈릴리 가난한 자들과 그렇게 시간을 보내시는지 이해가 안됐다. ‘왜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자신을 선언하지 않으실까?’ 세례요한도 역시 간접적인 대답을 들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 수많은 이적과 더불어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4-6). 그는 어려움 중에 표적을 구했다. 물론 그는 유대인과 같은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 같은 것을 구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잘못된 방법으로 표적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주님의 올바른 표적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2. 그렇다면 왜 주님이 유대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을까?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니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12:39) 하셨다. 이는 잘못된 방법으로 표적을 구하는 자들의 정신 상태를 묘사하는 말씀이다. [악하고]는 전적으로 잘못된 태도, 곧 거룩과는 반대되고 반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에서 나오는 영혼의 전체적 상태를 의미한다.

   1) 이것은 이해 불능의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 상태의 본성은 주어진 표적도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주님이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것은 표적인가? 아닌가? 표적이다. 왜 그런가? 예수님은 나사렛 목수에 불과했지만, 제사장들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그 무엇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분이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들은 왜 충격적이고 놀라운 표적을 보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래야 우리가 믿겠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영적인 것을 볼 수도 없고 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눈 앞에 일어나는 일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특별하고 극적인 놀랍고 비상한 것만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악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잘못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이해는 매우 표면적이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20절).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실체화 시킨다. 사건을 결코 영적으로 못 본다. 왜 그럴까? 이것은 그들의 악한 안목 때문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물질적인 것과 자기 유익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실 니고데모의 첫 장면도 그 중의 하나이다. 주님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실 때,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또 날 수 있습니까?” 물었다. 이것은 니고데모가 완전히 영적인 부분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하는 질문이다. 주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 니고데모야! 보아라! 내가 육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말씀하는 중이다’ 하시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비슷하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의 상태를 무엇이라고 요약하는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그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사람들이 영적인 깨달음과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감각적인 것만 갈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세대의 특징이다. 현 시대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가?

   2)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음란’에 대해 알아보자. 이것은 유대민족에 대한 주님의 저주와 같은 말씀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아내였지만, 그러나 그들은 음란한 아내였다.

     (1) 음란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불만족이다. 그 사람들은 더 이상 결혼한 배우자로 만족하지 못하고 배우자에게서 돌아서기 시작한다. 이렇게 음란한 상태로 범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방법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 음란한 정신상태는 호기심의 지배를 받는다
       그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안 될 방향에서 쳐다본다.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고, 거룩한 율법을 주셨는데도 그랬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해주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른 민족이 섬기는 신이 매우 실제적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들의 눈이 남편되신 하나님께만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사람이 섬기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왜 그럴까? 마음이 음란했기 때문이다. 음란한 정신상태에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에 집중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호기심의 통제를 받은 것이다. 그들은 진실한 목적과 목표를 떠나 특별한 현상, 곧 나타나는 실제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음란하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3) 음란한 정신상태는 감각적 사랑이나 흥분을 유발시키는 사랑을 가진다
       그들은 신선하고 새로운 감동적인 그 무엇을 바란다. 이것이 바로 언제나 표적만 구하는 이 세대 사람들에 대한 우리 주님의 묘사이다. 음란한 정신을 가지면, 갈망하고 또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자신의 갈망을 충족시켜야만 한다고 말한다. 음란한 심령은 내가 그것을 가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정신상태가 늘 그렇다는 것이다.

   3) 그러면 주님이 그런 요청을 허용하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마귀의 요청은 무엇인가? 마귀는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똑같이 요구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표적을 보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완벽하게 거절하시며 간접적으로 답변하신다. 또한 성전 꼭대기에 자신을 던져 뛰어내리라는 마귀의 제안도 똑같다. 참으로 극적인 행동을 함으로 표적을 보이면, 모든 사람이 당신을 믿을 것이다”리고 요청하며 제안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요구의 아버지는 항상 마귀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언제나 그의 요구를 거절하셨다. 주님이 헤롯왕의 손에 붙들렸을 때, 헤롯이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가?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했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눅 23:8,9).

3. 우리가 배울 교훈이 무엇인가?

   1) 우리는 어떤 상태인지 자신을 점검하자!
     우리가 영적인 간음죄를 범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마지막 때에 사탄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24:24) 누구까지 미혹하는가? 택하신 자들까지다. 이에 대해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결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삶의 첫 번째 원칙은 우리 안에 음란한 영적 본성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자신에 대해 깨어 있어야만 한다.

   2) 그러면 우리가 자신을 점검할 때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1) 내 속에 하나님과 그의 방법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지 조심해야 한다.
       나는 내가 받은 구원에 대해 깊은 중심으로부터 감사하고 있는가? 만일 내가 그것을 무시하는 말을 한다면 매우 조심해야 한다. 왜 그런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매우 기적적이고 놀랍고도 감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삶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징조이다.
     (2) 더 중요한 시험은 내 자신이 들떠 있는 영은 아닌가를 점검해야 한다
       신앙생활이 들 떠 있거나 흥분과 경험을 요구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평안은 어떤 다른 수단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 있어서 늘 불만족하고, 들떠 있거나 불만족한 갈망을 느끼고 있다면 그는 음란한 영의 특징을 가진 자다. 진정한 성령의 경험에는 흥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쾌함과 기쁨이 있다. 육적으로 흥분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런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려고 성령을 보내셨다.
     (3) 가장 실제적인 시험은 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욕구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어떤 다른 것에게 우선권을 주고 있는가를 점검하여 매일을 살아야 한다.
       정리해보자! 당신은 예수님에 대한 경험보다 더 많은 어떤 경험을 가졌다고 생각하는가? 성령께서는 항상 자신에게가 아니라, 예수님께 관심을 집중시키라고 보내신 영이시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14). 내가 했었고, 또한 하고 있는 신앙 경험이 우리 주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극적인 경험일 뿐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상태이다. 내가 내 경험이나 은사를 그분에 관한 것보다 더 많이 말하고 있는가? 당신이 정말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 성령께서는 당신이 찬양하고 말하는 모든 것과 모든 일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모든 것이 우리와 그리스도 중심성 사이에 들어와 끼이는 순간 벌써 영적 간음자인 것이다. 주님을 찬양하는 일보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더 관심을 많이 가지는가? 성령께서는 오직 우리 주 수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고 보내심을 받았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아니하고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16:13,14).

   3)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자들이 했던 대로 해야 한다.
     (1) 우리가 받은 바, 믿은 바를 믿고, 이미 주어진 것을 활용하자!
       그것이 무엇인가?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말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이미 있다. 아브라함은 그 부자가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16:31).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려 하지 말자! 확신은 언제든지 주신 진리로부터 온다. 우리는 이미 완전하고 유일한 신앙의 원칙인 구약 성경과 신약성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집중하자! 제자들은 그것을 보았고 알았고 이해하기 시작했고 믿음이 강화되었다. 우리는 성경을 더욱 읽고 듣고, 성령께서 비춰주실 것을 기도하자. 복음서를 읽고 사도행전을 따르자. 서신서와 기독교 역사를 보자. 그리고 다른 갈망을 하지 말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를 믿고 지키고 활용하자!
     (2) 언제나 우리 주님을 구하고 찾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고 추구하자!
       그분의 사랑을 알도록 애를 쓰자! 그러면 결코 딴 길과 곁길로 갈 수 없다. 마귀는 여전히 신기한 것, 눈에 보이는 것, 실체적인 것을 추구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눈은 오직 우리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야 한다. 성령을 주시라고 간구하자! “주님을 더욱 더 알기 원하오니 성령을 주소서!” “저는 황홀경을 원치 않고 기적과 표적보다 성령으로 주님을 알기 원합니다!”라고 간구하자!
     (3) 철저하게 자신을 주님께 드리자!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하자!
       주님께 명령하려고 하지 말라! 바리새인처럼, 마리아처럼도 세례요한처럼도 하지 말자! 성급하지 말자는 것이다. 주님께 무릎 꿇고 기다리자!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을 계속하자! 심리적인 방법으로 신앙생활하지 말라! 무엇인가 누구인가를 감동시키려 하지 말자! 어떤 사람이나 어떤 곳도 바라보지 말자!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주님이 원하시는 시간에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경외와 놀라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인격에 대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그런 표적을 보여주실 것이다.

[나아가며]

우리는 항상 우리 주님의 표적의 의도를 따라 가야 한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 오늘도 내일도 성령님을 통하여 성경에 나타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고 추구하자!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에 주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목적으로 행하자! 영적인 통찰력과 이해력을 가지고, 주님을 철저히 신뢰하자! 진정한 표적, 영적 진리의 표적을 계속 우리에게 주심으로 주님의 풍성한 생명을 더욱 깊이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자!

ⓒ 복음뉴스(BogEumNews.Com) 

Comments

복음뉴스 2023.01.25 05:23
이윤석 목사님께서 2023년 1월 24일 이전에 쓰신 글들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여 읽으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bogeumnews.com/gnu5/bbs/board.php?bo_table=e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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