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랑하심을 믿고 영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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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랑하심을 믿고 영생하라

이윤석 목사 0 08.18 09:35

[들어가며]

 

성경 전체의 요절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요한복음 316절은 인간의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전해준다. 이 구절은 따로 떨어진 구절이 아니라, 요한복음 3장의 문맥안에서 살펴야 한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인 11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의 연장선상에 있다. 주님은 바리새인이자 유대인들의 지도자요 학식이 높고 독실한 유대교 선생이었던 훌륭한 인물 니고데모가 무엇보다 이 사랑을 알기 원하셨다. 주님은 니고데모가 오실 메시아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으심으로 지금 그와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깨우치려 하셨다. 이 구절의 중대한 주제는 아들과 아들이 이루신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처럼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런 의미 깊은 단어의 내용이 가진 복음진리를 살피면서, 요한복음 316절의 복음의 구절을 감격스럽게 설명한다.

 

1.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

그 사랑의 방식이 얼마나 놀라운가! 성경 전체에 걸쳐 이런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주실 정도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시는 감동적이고 놀라운 말씀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무엇보다 우리의 좌와 불순종 때문에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고난과 고통을 대신 당하도록 아들을 내어주셨다. 아들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채찍에 맞으며 고난을 당하셨다. 그런 일을 당하도록 하나님이 아들을 내주셨다.

 

1) “이처럼에 대한 주님의 정의

주님이 이처럼이라고 말씀하실 때 무엇을 의미하시는가? 우리는 우리의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살고 있다.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진실만 깨달아도 복음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달라질 것이다. 우리의 문제점은 이 땅에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간다. 그렇기에 이런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외국인과 나그네와 거류자라는 사실만 알아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작은 시골에서 누군가 죽으면 사람들은 온통 그에 대해서 말하고 그 죽음을 이야기하며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그것을 중대한 화제로 삼는다. 그러나 오늘날 대도시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관심도 없고 금방 잊어버린다. 그런 면에서 대도시에 산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질인간에 불과함을 상기시키는 것이 점점 무디어지기 때문이다. 복음은 내일 당장에 사라질 사람들,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모든 설교자는 죽어가는 자로서 죽어가는 자에게 설교하듯이 해야 한다.

 

2) “이처럼은 항상 복음전도의 초청시간을 포함한다

사람들을 전도 초청예배로 드린다고 할 때 이것을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복음을 제시하는 모든 예배는 전부 전도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특정 예배만 전도 예배로 여기는 잘못을 번하고 있다. 그것은 비성경적인 구분이다. 하나님은 수요예배와 같은 예배를 사용하셔서 자신을 알려 주심으로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 주실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설교할 때마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따라서 어느 집회에서나 회심을 기대할 수 있다.

 

2.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사랑을 나타내실까?


1) 영생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내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은 바로 이 일에 대한 것이다. 니고데모는 이 점을 몰랐다. 기적이나 몇 가지 측면의 가르침 등에 대한 것인 줄만 알았다. 물론 복음에는 그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가장 놀라운 윤리가 포함되어 있으며, 어떤 도덕보다 수준 높은 도덕이 포함되어 있다. 사회나 산업을 비롯하여 무한히 많은 영역에 적용될 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중심하여 시간을 다 쓴다면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일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중대한 목적과 목표는 사람에게 영구한 생명을 주시는데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아들이 영생을 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주님이 16절과 이전 구절에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밝히시듯, 영생은 멸망에 반대되는 것이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멸망은 무엇일까? 성경은 그것을 허물과 죄로 죽은”(2:1)이라고 정의한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는 멸망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멸망의 상태로 태어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 밖에 있다는 뜻이며, 인간적이고 일시적인 수준과 차원에 완전히 매인 삶을 산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멸망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우리 생각이 세상의 삶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며, 인간의 생각과 사상과 역량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으며 뛰어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3) 그 생명은 오직 하나님 안에만 있다

오직 하나님만 불변하시다. 오직 하나님만 그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타고난 상태를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말로 묘사한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신령한 일에 살아있지 못하다. 자신에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다. 세상에 아주 큰 무엇인가가 있으되, 육신이 죽어 무덤에 묻힌 후에도 지속되며 사라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가만히 멈추어 자신의 영혼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자기 영혼에 관심이 없다. 왜 그럴까? 멸망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며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는 생명은 몸의 생명 뿐이다. 그것이 자신들이 속한 영역이요 차원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것에 대해서만 열광하며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다만 동물적이고 육신적이고 물리적인 부분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과 열정을 바치면서 가장 고상한 부분에는 아무 투자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라. 이것이 멸망의 상태에 있다는 말의 의미이다. 가장 높고 고상하고 놀라운 일에는 살아 있거나 깨어 있지 못하면서 그 반대의 일에는 열광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멸망의 상태에 있다는 표시오 죽음의 표시인 것이 확실하다.

 

4)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생명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입고 게임과 스포츠에 빠져 열광하고 있다. 얼마나 많고 다양한 운동 경기를 즐기는지, 얼마나 멀리 여행을 다니는지, 그 모든 것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돈을 쓰고 열광하는지 보라. 오로지 구경만 하면서 열광하는 사람들과 그런 종류의 행태에 대해서만 말하는 사람들을 보라. 순전히 동물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에 속한 일만 위해 살면서 하나님과 연결된 것, 또 그의 생명을 누리는 삶에는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무시하는 그들의 인격 전반을 보라. 그들은 육신에 속한 시간과 세상에 속한 일에 전적으로 매이고 제한된 채, 오지 그것만을 위해 살아간다. 상황을 더 비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면서 문자 그대로 물리적으로 죽어 간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늙어가며 하루하루 몸의 기능을 잃어간다. 우리가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과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죽음이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건강한 활력과 체력이 넘쳐 보이는 사람도 한순간에 쓰러져 죽을 수 있다. 왜 그렇게 갑자기 죽을까? 본인도 모르고 남들도 잘 모르는 사이에 병이 진행되면서 죽음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성경의 메시지는 죽을 때의 상황과 상태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나는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지금과 같이, 또한 그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상태로 영원히 지내고 싶은가? 지금 인류는 그런 상태에 있다.

 

3.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위에 말한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말씀이다.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6:11). 영생은 멸망의 상태에서 벗어나 실제적이고 영적인 차원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생명은 항상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단순히 도덕이 아니다. 단순한 선이 아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하지만 그것을 뛰어 넘는다. 기독교의 진정한 책임과 소명과 중심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즉 영생에 있다.

 

1) 영원하다는 말의 정의를 알아보자

먼저 이것은 특정한 삶의 특질을 말한다.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킨다. 앞에 묘사한 멸망의 상태에서 살다가 갑자기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영혼에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리적이고 세상적인 모든 것보다 더 큰 무엇인가가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자신의 일부를 차지하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에는 한 번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살펴보거나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시도해 본적도 없고 무시하며 살았다는 것을 고백한다. 영적으로 살아나고 깨어난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우리 삶과 인생관을 평가하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가? 여러분이 삶을 평가하고 판단할 때 더 큰 비중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히 몸을 어떻게 다양하게 활용할 것인지를 생각하는가?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시고 영존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와 우리의 관계를 생각하는가? 영원한 생명, 영구한 생명을 받는 자는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 및 그 모든 영광스럽고 놀라운 것의 맥락 안에서 인간을 바라본다. 영적으로 깨어났기 때문에 그 방향에서 생각하기 시작한다.

 

2) 영생에 대한 주님의 말씀

주님은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앎으로 영생을 얻는다. 갑자기 모든 것이 중단되고 침상에 무력하게 남겨진 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해보라.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그런 상태에 빠졌다면 한없이 불행하고 비참하고 암담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를 알기에 외롭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 그래서 오히려 병든 것에 대해 감사드릴 수 있다. 다윗처럼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119:67,71)라고 고백할 수 있다. 하나님께 돌아와 그와 교제하는 삶을 산다.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실 것을 안다.

 

3) 그 결과 전에 몰랐던 평강과 기쁨을 경험한다

어디에서 평안과 안식을 체험할 수 있겠는가? 분주하고 어수선하고 시끄럽고 떠들썩한 세상에서 평강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평강은 영생의 일부로 주어지는 것이다. 기쁨도 마찬가지이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계실 때 가지셨던 것을 우리도 가진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흠모할 삶을 사셨다. 바로 그런 유형의 생명, 그런 특질의 생명을 그리스도가 친히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그리스도처럼 이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고, 세상을 뛰어 넘을 수 있으며, 더 높은 차원과 수준에서 살 수 있다. 어떤 것도 훼방하지 못하는 평강을 경험할 수 있으며 십자가를 짊어진다고 해도 빼앗지 못하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영생은 바로 이런 생명의 특징을 가리키는 말이다.

 

4) 이 영생은 양적인 요소도 포함한다

16절에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구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얻는 생명은 무한한 생명이다. 유한한 세상에서만 지속되는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이다. 실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생명은 첫 열매와 맛보기에 불과하다. 옛날 농부들이 농작물이 익으면 미리 조금씩 수확했는데 그것을 첫 열매나 맏물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과일이 처음 익을 때 하나를 따 먹으면서 정말 맛있는데하면서 전체를 수확하는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안다. 이 땅에서 주시는 생명도 그런 첫 열매나 맛보기와 같다. 그것만으로도 굉장하고 훌륭하지만 죽은 후에는 더 온전하고 영광스럽게 얻을 것이다. 영생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 영혼에 불어넣어 주시는 생명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지속되고 죽을 때도 지속되며 영원히 지속된다. 16절에서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이 영생의 선물이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만큼 큰 것이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죽어 있는 죄인들, 멸망의 상태에 있는 죄인들을 대속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심으로 사랑을 나타내셨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우리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4. 영생을 주시는 방식이 무엇인가?


유대인이자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는 하나님이 인간의 선한 삶이나 기도나 신앙심 등에 보상해 주신다고 믿었다. 사도 바울도 한때 그 교리를 믿었다. 자신의 삶과 경건함과 신앙심과 온갖 노력에 자부심을 느꼈고 하나님이 상 주실 것을 믿었다. 곧 청구서를 내놓고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육에 속한 자의 관점이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뭐라고 하셨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그렇다 영생은 선물로 얻는 것이다. 오직 그를 믿는 믿음의 결과로 얻는 것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하나도 없다. 영생은 선한 일이나 선한 삶의 결과로 얻는 것이 아니다. 노력이나 수고나 성취의 결과로 얻는 것이 아니다. 영생은 그것과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의 결과로 얻는 것이다.

 

1)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 잘못된 길로 빠진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보다 더 큰 오류는 없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회심하기 전에 마틴 루터가 그러했다.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애를 썼고 그것이 엄청나게 힘든 일임을 깨달았다. 그는 세상적으로 장래가 유망했던 직업의 길을 버리고 수도사가 되었다. 골방에 들어가 금식하고 땀 흘리며 기도하고 선을 행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애썼는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그렇게 애썼다. 하나님이 영생의 선물을 주는데 만족시킬 의를 이루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이 열려 그것이 참담하게 잘못된 생각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즉시 방향을 바꾸었다. 그것은 오히려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 하나님과 천국으로 가는 길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0:38)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영생의 선물을 얻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주님이 앞서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셨듯이 이것은 그분의 위격을 믿는다는 뜻이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요 영원하신 아들이시라는 성경의 증거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실제로 하늘에서 내려와 처녀에게서 나셨다는 역사와 기록을 믿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3)를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다. 인간을 멸망에서 구해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을 믿는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다는 말은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는 내가 죄인임을 안다. 멸망의 상태에 있는 자이었음을 안다. 하나님의 생명 밖에 있는 자였음을 안다. 그토록 자랑하던 선한 일들도 다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다는 것, 사도 바울이 말한 배설물과 스레기와 거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 바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며, 이런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오심을 안다. 그가 내 죄를 지시고 형벌을 담당하신 것과 누구도 해줄 수 없는 일을 나를 위해 해 주신 것을 믿는다라고 고백한다는 뜻이다.

 

3) 믿음의 자세는 무엇인가?

믿음의 자세는 진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빌립보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기도하려 모인 여자들 틈에 끼어 앉았고 사도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주의하게) 하신지라”(16:14). 루디아는 평생 처음으로 말씀에 주의를 기울였다. 믿을 때 항상 처음에 일어나는 일이 이것이다. 이미 성경에 익숙하고 친숙하다. 그러나 과연 성경에 주의한 적이 있는가? 말씀이 나에게 이야기 하듯, 주님이 꼭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것을 경험했는가? 성경은 단지 2천 년 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요 모든 시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말씀은 나에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어떻게 평생 살아도 한 번도 말씀에 주의한 적이 없을까? 주의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주의를 기울이게 되어야 한다.

 

4) 믿음은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말씀을 의지하기 시작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하신 일을 신뢰하게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영혼과 영원한 운명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맡기고 의지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 아닌지 아주 쉽게 검증해 볼 수 있다. 여러분은 어떤 식으로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가? “내가 이런 저런 일을 하기로 결심해야지라고 다짐하는가? 그렇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 노력을 영원히 포기하고 내가 무엇을 하느냐 얼마나 오래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나 자신이나 내가 하는 일을 의지하지 않겠다. 주님과 주님이 하신 일만 전적으로 의지하겠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를 믿는 자세이다.

 

5) 믿음은 즉각성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이 사실을 깨달은 즉시 실행에 옮긴다. 미루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기다린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지금 할 일을 내일 밤으로 미룬다고 해서 나와 하나님과 관계가 달라지겠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즉시 나오는 말은 바로 지금 받아들이겠다! 일초도 더 미루지 않겠다. 지금 바로 예수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은 즉각적인 특징이 있다.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빌립보 간수는 무슨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다. 사도가 전한 말씀을 듣고 바로 믿었다. 바울과 실라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한밤중이었는데도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고 기뻐했다. 이처럼 믿는 일은 즉시 이루어진다. 개달은 자에게 미루는 것은 무의미하다. 나중으로 미룬다고 더 나은 사람이 되거나 무슨 자격이 생기지 않는다. 믿음은 즉각적이다.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즉시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신뢰한다는 뜻이다.

 

6) 나아가 현재의 감정이 어떻든지 걱정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확신이 느껴지든 느껴지지 않든 걱정하지 말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고 그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인정하다는 뜻이다.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은 그를 거짓말쟁이 취급하는 것이다. 그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믿는다.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 곧 나에게 하신 말씀임을 안다. 주님이 내게 말씀하고 계심을 안다. 나는 그를 믿는다. 나의 전부, 나의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긴다라고 말한다는 뜻이다. !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이 사랑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빈 손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다. 단 일초도 미루지 말고 스스로 오점을 지워보고자 지체하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라! 눈보다 더 희세 씻어 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믿으라!

 

7) 하나님의 사랑은 믿는 자 모두에 대한 것이다(“~자마다”)

유대인만 구원받고 이방인은 정죄 받는다고 믿었던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네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영생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위한 것이다. 나라와 종족과 언어에 상관없이 모든 믿는 자를 위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를 믿는 자마다주의 자비하심에는 아무 제한이 없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든 중요하지 않다. 무슨 짓을 했든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큰 죄와 작은 죄를 구분하는 장본인은 우리이다. 하나님은 구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이 죄나 저 죄나 똑같이 악하다. 살인자나 다른 이들이나 다 똑같은 죄인이다. 내 허물이 아무리 클지라도 내가 어떤 사람이라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는다.

[나아가며]

 

누구나 똑같은 구원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에서 똑같다. 이것보다 더 놀라운 구원이 필요한 사람은 없다. 모든 구원은 기적이며 그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팔십세 노인이든 여덟 살 어린 아이이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는가? 그렇다면 어떤 반박에도 응수할 수 있고, 어떤 장애물이라도 제거할 수 있다. 이것을 참으로 깨닫고 그의 말씀을 믿는다면 지금 바로 믿고 자기 죄가 사함받은 것과 이제는 멸망하지 않는 것과 영생을 얻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믿으라! 그의 말씀을 믿는 자는 그렇지만이라는 말을 일체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면 된다. 내가 어리석음과 교만과 죄로 인해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임을 알고 고백하면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해주신 일로 인해 그 모든 형벌이 취소되었다는 것,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아버지와 함께 영원한 복을 누릴 상속자라는 것을 믿으면 된다. 지금 이렇게 나아가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것이다. 믿는 자는 즉시 나아간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이것이 진정한 생명이다. 지금까지 믿지 않았고 나아가지 않았다면 지금 바로 나아가 죄를 고백하자. 믿는다고 아뢰자. 지금 바로 그의 사랑과 자비에 자신을 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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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니고데모 이야기- 거듭난 자와 세상 이윤석 목사 2023.11.26
11 거듭난 생명의 징표 엡 3:18-19, 요 3:1-8 이윤석 목사 2023.10.28
10 성령으로 난 사람의 모습 요 3:8 이윤석 목사 2023.09.21
9 거듭남의 특징 (요 3 : 8) 이윤석 목사 2023.08.11
8 거듭남의 기초 없는 기독교 이윤석 목사 2023.07.17
7 니고데모와 그의 미덕 요 3:1-5 이윤석 목사 2023.06.30
6 니고데모라는 사람 요 3 : 1 - 3 이윤석 목사 2023.05.20
5 넘치는 생명의 축복 (요 2:9-11) 이윤석 목사 2023.04.20
4 변화시켜 주시는 복 요 2:9-10 이윤석 목사 2023.03.17
3 진정한 축복의 성격 (요 2:7-11) 이윤석 목사 2023.02.27
2 교회를 정결하게 하라! 요 2:13-17 이윤석 목사 2023.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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