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생명을 얻은 자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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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생명을 얻은 자는 사랑한다

이윤석 목사 0 01.20 14:57

[들어가며]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의 특성이 나타나는 사람이다. 다양한 특징이 나타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도 한 가족이 가진 생명의 특징은 온 가족에게 나타나지만, 가족들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다. 어떤 가족에게는 더 많이 나타나고 어떤 식구에는 더 적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징들은 분명히 나타나며 또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 지난 호에는 새 생명을 가진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곧 행복해지는 일보다는 거룩해지는 일에 관심을 갖는 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더하여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난다는 면을 살펴보았다. 갈라디아 522-23절의 성령의 열매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자신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관계와 관련이 된다. 첫 번째 모습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 서로 간에 나타나는 특징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라고 믿음으로부터 사랑까지 연결시킨다. 우리 안에 새 생명이 있는지에 대한 시금석은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에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1. 거듭난 자는 그 생명의 특징이 사랑으로 나타난다


사도 요한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일 3:14)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알거니와는 단정적인 표현으로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절대적인 증거가 형제 사랑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사도행전에 오순절에 모였던 120명 정도의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베드로의 예루살렘설교 후 삼천 명이나 더 늘어났다. 그때의 특징에 대해, 누가는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라라고 말씀한다. 그들의 특징이 무엇이었는가? 누가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4-47)라는 역사적인 진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이렇게 행동하게 되어 있다. 가족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본능적으로 한데 묶이게 되어 있다. 이런 특징은 영적인 영역에서도 그대로 해당된다. 이 생명의 특징 자체가 더 크고 순전하며 강력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교회의 연합에서도 이것이 중요한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교회의 연합을 주장하지만, 그 전에 먼저 교회가 어떤 곳이며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보아야 하며, 이에 따라 교회의 연합이 결정되는 것이다. 교회는 결코 대기업의 이익창출의 사고방식처럼 접근하는 곳이 아니다. 이것은 매우 비성경적인 태도이다. 교회는 사랑이 그 중심에 있는 곳이다.

 

2. 그러면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1) 먼저 사랑한다는 말과 좋아한다는 말의 차이가 필요하다.

형제를 좋아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형제를 사랑함으로라고 말씀한다. 그 차이점이 무엇인가?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이다.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고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구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특히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다. 좋고 싫은 것은 통제하기 불가능한 감정이다. 이것은 타고난 기질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며, 서로 끌리는 요소가 있고 또한 쉽게 밀어내는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성경은 좋아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라고 그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말씀한다.

 

2) 이것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좋아하는 사람처럼 대하라는 의미이다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실제로 좋아하지 않아도 좋아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다. 좋고 싫은 감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싫은 사람이라고 다르게 대하지 않는다. 좋은 사람처럼 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 사람과 나는 연결되어 있는 형제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라고 명령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라고 명령할 수는 있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좋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거듭나도 기질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바뀌지 않아도 되는 개성의 기초를 이루는 것들이 있다. 말하는 방식을 비롯하여 모든 면이 똑같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오히려 이상하고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현상이요 심리적인 현상이다. 제자들과 사도들도 각자 다 달랐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다양하게 만드셔서 영광을 받으시듯, 그리스도인들도 다양하게 만들어 영광을 받으신다. 사람마다 재능과 역량과 개성이 다르고, 새로 태어난 후에도 그 차이가 남아 다양성과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똑같이 좋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3) 그래서 거듭난 자는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발견하고 이에 따라 행동한다

거듭나지 못한 육에 속한 사람은 좋고 싫은 감정의 전적인 지배를 받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면 모든 것을 달리 보게 된다. 실제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더 좋아하는 이들이 있지만,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그들과 똑같이 대하며 사랑한다. 이 요점을 모르면 쓸데없이 자신을 정죄하게 된다. 사랑하는 것은 고갯짓으로 인사할 만큼 알고 지내는 것이 아니다. 형제 사랑을 제도적인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제도 중심주의는 기독교 역사에서 항상 큰 저주가 되어 왔다. 큰 조직에서 사람은 거의 기호가 되어 버린다. 그것은 신약성경의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교회는 형제의 모임이다.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회적 교제를 나누거나 그런 식으로 일정한 사람들과 알고 지내는 일이 아니다. 교회에는 사랑이 있다. 더 깊은 것, 훨씬 더 적극적인 것이 있다. 아주 실제적이고 생생한 교제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형제와 이런 관계를 맺고 있는지 분명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새 출생을 했는지에 대한 가장 정교하고 섬세한 시금석이다.

 

3. 그러면 거듭난 자들이 반드시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1) 거듭난 자들은 항상 서로 끌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 생명은 불가피하게 항상 서로 끌리게 되어 있다. 우리는 다 한 성령으로 거듭나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이것은 당연히 인생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이 같다는 뜻이다. 그런 것들이 우리를 한데 묶어 주고 서로 사랑하게 해준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자들은 항상 서로 끌리게 되어 있다.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을수록 더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형성하게 마련이다. 서로 다른 요소가 많더라도 이 요소가 그들을 단단히 결속시킨다.

 

2) 거듭난 자는 바라보는 시각을 함께한다

거듭난 자는 세상에서 벗어난다. “이 악한 세대에서”(1:4) 벗어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1:13) 옮겨진 사람들이다. 거듭난 자는 이 일을 경험한다. 그래서 같은 인생관을 갖게 된다. 거듭나는 즉시 세상 사람들과 분리되어 다른 거듭난 자들과 연합하며 모든 것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시각을 함께하는 것이다.

 

3) 언어가 통한다

거듭난 자들은 서로 말이 통한다. 보통 세상에서도 나는 그 사람하고는 잘 지내, 서로 말이 통해라고 하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한다. 영적인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관점에 따라 사용하는 말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왜 그런가?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2-13)라고 말씀한다. 거듭난 자는 특정한 말, 영적인 말을 쓴다. 사용하는 단어는 똑같지만, 사용하는 방식과 어법이 달라진다. 새로운 말이 생기는 것이다. 항상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그 말을 이해한다. 그것은 영적으로 상투적인 표현과 전문용어를 쓴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영적인 말을 하지만 흉내 내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 생명을 얻은 자는 자연스럽게 영적인 말을 한다는 것이다.

 

4) 이해와 관심과 열정이 같다

한 가족이라면 자동적으로 공유하는 이해관계가 있다. 이 기본 요소가 궁극적으로 가족을 하나로 만들어 주며, 그 이해관계가 위협받거나 위험에 처할 때에는 힘을 합쳐서 맞서게 해준다. 자녀는 필연적으로 가족의 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 있다. 가족이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잘되길 바라게 되어 있다. 그 모든 특징을 영적인 영역과 하나님의 자녀에게 적용해보자. 그들도 항상 가족의 관심사와 열망을 함께 한다. 아버지의 가문과 가문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가 잘되는데 큰 관심을 갖는다. 우리 자신을 검증해보자. 세상의 지금의 모습과 삶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영혼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와 영광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문제를 바라보며, 그 불경한 모습에 비통함을 느끼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 나라가 잘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어 있다.

 

5) 비밀을 함께 나누고 있다

가족끼리만 알고 밖에서는 말하지 않는 일들이 있다. 영적인 영역에서는 더 그렇다. 비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있다. 그들에게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을 우리는 안다. 비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7:6)라고 말씀한다. 영적인 이야기는 가족들이나 형제들과 있을 때에만 할 수 있다. 우리 찬송 중에 주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라는 찬송이 있다(85). 가족 안에서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영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할 수 없다. 이것이 우리를 한데 묶어 주는 특징이다. 우리는 지금 함께 영적 원수와 싸우고 있는 중이다. 교회 역사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느 때보다 박해의 시기에 굳게 뭉쳐 결속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하나님의 백성은 공동의 적과 싸우기에 한데 뭉친다. 서로 알아보고 더 긴밀히 뭉쳐야 한다. 상황이 열악할수록 더 사랑해야 한다.

 

6) 그리스도인은 같은 영광의 소망을 가진 자들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비밀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한 소망이시라는 것이다(1:27). 이 세상은 일시적인 곳이며 불안전한 곳으로서 우리는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영광의 소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알지만 비 그리스도인은 모른다. 세상은 이것을 모를 뿐 아니라, 믿지도 않는다. 그들은 죽으면 아무 것도 없고 끝이라는 말은 믿지만, 우리의 복되신 주님과 그의 영원한 나라가 마지막 날 영광스럽게 나타난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는 거류민과 나그네라는 의식을 갖는다. 이 사실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준다. 한 공동체, 공통된 시각과 믿음, 한 열망과 소망을 가졌다. 두려움과 싸움과 문제가 있을 대 그것은 오히려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며 마침내 형제를 사랑하는 자리로 이끌어 준다. 실제 삶에서 우리의 어려움은 마귀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서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착각을 심어주고 현혹하는데 있다.

 

4.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사랑하고 있는지를 점검해보자


1) 우리는 형제를 바로 알아본다

이것은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놀랍고 가슴 떨리는 일이다. 우리가 서로 모르는 곳에서 만나는 모르는 사람이지만 몇 마디 말을 나누다 보면 그의 표정과 언어에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금방 알아보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본성이란 늘 나타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런 형제관계야말로 다른 어떤 관계보다 더 중요하며, 이 형제들과 만나는 것이 기쁜 일이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임을 자랑하였다. 주님께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고(1:14), 이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형제가 되오, 한 성령을 통해 한 몸이 되어 같은 주와 구주를 전하게 된 것을 무엇보다 기뻐하는 사람이 되었다. 옛적에 가졌던 편견들이 사라졌다. 우리는 결코 서로의 피부색이나 인종이나 모든 차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3:11). 우리는 단지 동료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우리 주와 구주되신 복되신 분의 생명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하면 계층, 인종, 재능을 비롯한 모든 요소들은 퇴색하고 밀려나게 되어 있다.

 

2) 거듭난 자는 거듭나지 못한 혈육보다 다른 거듭난 자들을 더 사랑한다

우리들의 가족을 엮어주는 것은 육신적인 의미의 혈육관계이다. 그런데 거듭난 자들을 엮어 주는 것은 신성한 씨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더 순전한 사랑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 신성한 씨가 다른 모든 끈에 우선하는 것이다. 혈육으로 엮인 가족보다 물리적인 의미에서 아무 상관없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더 깊은 유대감과 애착을 느낀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간단하고도 분명한 사실이다.

 

3) 거듭난 자는 다른 거듭난 자들과 함께 있을 때 영적인 의미에서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어리고 미숙한 것은 알지만, 다른 거듭난 자들처럼 되기를 원하기에 그들과 함께 하기를 좋아한다. 자신은 겸손하고 온유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지만 어색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거듭난 자는 자신이 그 무리에 속한 것을 안다.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영적인 일을 이해하는 지각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세상이 주는 최고의 모임보다 형제의 모임을 더 좋아하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왕의 자녀가 맞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세상에서 가장 큰 자보다 크다. 배우지 못한 소박한 그리스도인과 하루를 보내겠느냐, 아니면 가장 세련되고 명석한 세상 사람과 하루를 보내겠느냐고 물을 때, 그리스도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박한 그리스도인을 선택한다.

 

4)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만나고 대화하길 즐긴다

말라기 선지자가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3:16)라고 말씀하듯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서로 모여 함께 하길 좋아한다. 사도행전 2장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한 일도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오직 기도하기를 힘쓰기 위해 매일 만났다. 예배가 너무 길지 않길 바라면서 집에 가려는 사람처럼 성전에 오지 않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며 배우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 서로 어울리고 교제하기를 즐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적인 일을 이야기하기에 형제의 모임만큼 좋은 곳이 없다. 그들에게는 영적인 일이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안다. 왜냐하면 영적인 일은 영원히 계속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서간 성도들, 보좌 가까이에 있는 성도들을 생각한다. 곧 함께 하게 될 성도들을 생각하며 산다.

 

5) 거듭난 자들은 서로 공감하며 서로 염려한다

거듭난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의 행복을 염려한다. 헤롯왕이 사도 베드로를 체포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잡아 아무 이유 없이 참수하더니 베드로를 참수하려고 했다. 그래서 옥에 가두고 군인 열 여섯 명으로 밤낮 지키게 했다. 그런데 그때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다(12:5). 옥에 갇힌 자는 베드로이지만, 온 교회가 함께 기도했다. 사슬에 매여 고난 받는 자는 한 사람이었지만, 온 교회가 차꼬와 지하 감옥과 옥살이의 잔혹성을 느끼며 그를 위해 기도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형제가 갇혔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속한 자가 갇혔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한 사람이 고통을 받으면 당연히 모든 사람이 함께 고통을 받는다고 했다(26). 또한 갈라디아 교회에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6:2)고 했다. 지금도 국내 뿐 아니라, 가까운 나라와 먼 나라에서 여러 가지 면에서 고통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다. 그것이 부담으로 다가와 그들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며 고통이 느껴지며 그들과 공감하는가? 우리 안에 한 생명이 있고 한 영적인 피가 흐른다면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다.

 

6)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생명에 들어간 것을 확신하는 자이다

요한 사도는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3)라고 말씀한다. 여러분은 형제에 대해 오래 참고 인내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다 쉽지 않은 사람들이다. 타고난 천성으로는 도저히 참아 줄 수 없다. 우리는 다 전에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3:3)“이었다. 그러나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 그러므로 서로 알아보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꺼이 참아준다. 밖에서 참지 못하는 것도 가족 간에는 참아 주고 용서해 준다. 이 사실을 무한히 확대해보라. 하나님의 자녀와 가족은 서로 짐을 지며 서로 참아준다.


[나아가며]


하나님께로부터 났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한다는 자가 있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자기 자신이 아무 자격 없이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사고에는 이 새로운 논리가 들어와서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남들을 대하듯이 하나님이 나를 대하시면 어찌될까?”하며 즉시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사람들이다. 나같이 비열한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원수였던 자가 용서받았고 사랑받았다면 우리도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마땅함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기꺼이 형제를 용서하며 오래 참음으로 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형제 사랑의 적극적인 증거가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모든 시금석을 적용하는 은혜를 주시기 바란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며 확신을 갖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실제로 형제를 사랑함으로 영생을 얻은 것을 증명하고 그 증거를 가진 자로서 형제를 사랑하며 성령으로 거듭난 자답게 그 특성을 점점 더 풍성하게 나타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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