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의 기초 없는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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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의 기초 없는 기독교

이윤석 목사 0 2023.07.17 12:56

거듭남의 기초 없는 기독교 (38절)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와 구세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충만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전에 이런 충만함을 받는 과정에서 범하는 잘못을 알아야 한다. 니고데모는 이런 잘못된 경우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문제는 그가 신앙생활의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전진해 나아가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란 독실한 종교인이다. 종교적 배경을 가진 신실한 자로서 자신도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하고 충만함을 얻는 방법을 찾기 위해 그 방법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렇게 늘 추구하지만 일평생 그것을 얻지 못하고 살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잘못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 이 설교는 필자의 것이 아니라, 로이드 존스의 요한복음 3장의 강해를 읽으며 이해한 내용이다).

 

* 니고데모의 문제는 거듭남의 기초 없이 신앙을 시작하려고 한 것이다

 

1. 자신이 필수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이었다


1) 잘못된 가정으로 신앙 생활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데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하는 위험을 가지고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항상 그리스도인이었소! 어려서부터 그렇게 자랐기 때문이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조금만 더하고 바꾸면 제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칭의를 얻기 전에 성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전혀 모르면서 성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마치 태어나기 전에 자라려고 하는 것과 똑같다. 그는 주님께 나아와 말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 그는 예수께서 가지신 그 특별한 것을 얻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말을 잘라서 말씀하신다: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커녕 보지도 못한다는 말씀이다. 생명의 씨가 속에 없으면 성장이 시작될 수 없고, 성장을 촉진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발견할 수도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생겼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이도 기독교의 진리를 적용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니고데모의 모습이다.

 

2) 이런 잘못을 부추기는 경향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이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신비주의는 신앙이 열심인 유형에 속한 사람들이 큰 매력을 느끼는 가르침이다. 그들은 자기 삶에 불만을 가지고 자신과 교회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간절히 알고 실어했던 과거의 수도사들이 그렇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려면 전력을 다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세상과 분리되거나 아주 엄격한 생활, 금식과 기도 등을 통해 육체를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적인 삶을 드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 연습]과 같은 책을 비롯한 다양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가르침은 수백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체계화되었다. 경건한 삶의 지침서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가르치는 교본들이 아주 많이 있다. 열심있는 종교인은 그런 책에 큰 매력을 가진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 하나님을 보는 최고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양심적이고 지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신비주의적 가르침을 접하는 즉시 받아들여 공부하고 실천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해도 만족함을 얻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니고데모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거룩은 추구하지만 주님으로 얻는 의는 알지 못한다. 자신은 벌써 오래 전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 채 그리스도인의 삶을 발전시키려고 애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과연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있느냐 하는 것을 점검해보아야 한다.

 

3) 우리보다 앞선 믿음의 선배들에게도 니고데모와 같은 과정이 있었다

루터는 스스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만족을 찾지 못했다. 수도사가 되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러면서 그 과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눈이 열리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17)의 중대한 진리를 보게 되었다. 믿음으로 살아나지 않는 한, 믿음으로 살아나기 전까지,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문제가 성화에 있는 줄 알고 거룩함에 이르는 길에 집중했지만, 사실은 칭의에 문제가 있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올바른 자리를 찾아 성장과 발전을 시작할 수 있었고 거룩해질 수 있었다. 루터가 잘못된데 빠진 이유는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그는 세례를 받으면 거듭난다고 믿었고 그래서 기본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후에도 그의 가르침은 칭의 위에 성화를 두는 것이 아니라, 성화 위에 칭의를 두는 경향이 있었다.

요한 웨슬리나 조지 윗필드와 같은 사람들도 처음에는 루터와 비슷하였다. 더 거룩하게 되기 위해, 별도의 무언가를 얻기 위해 니고데모와 같이 그것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기본적인 토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이 잘못되었다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찾아왔다. 자신에게 이미 생명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명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이전에 찾지 못했단 바른 자리를 찾았다. 만일 이것을 몰랐다면 그저 독실한 종교인으로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다. 이렇게 배우거나 가르친 사람은 니고데모처럼 스스로가 꼭 필요한 기초를 갖추었다고 가정함으로 결국 길을 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하고 출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전진하고 있는 것과 같다. 출생하지 않으면 결코 성장할 수 없다.

 

4) 때때로 사람들은 기독교를 삶이 아닌 사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사상과 관점으로 기독교를 대하며, 그 내용을 알고 이해하고 파악한 후 실천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여기는 것이며, 이런 오해에 치우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기독교를 어떤 학문의 과목을 듣는 학생과 같다. 그래서 항상 기독교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개념을 파악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상이 모르는 특별한 것이 있다. 그것은 성령님과 성령님의 활동하심이다. 기독교는 결코 하나의 과목이나 사상이 아니다. 기독교의 더욱 중요한 요소는 영적인 요소이다.

 

5) 기독교를 성경지식과 성경공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기독교를 이수해야할 할 하나의 과목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열심히 공부한다. 그래서 성경 지식은 완벽한데 그 메시지는 전혀 모른다. 성경 교실에서 지적인 지식과 정보는 많이 얻지만 그 메시지는 전혀 모르는 무서운 위험을 가진 사람들이다. 니고데모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이처럼 사람들은 기독교를 마음과 전인의 감성의 요소를 무시한 채, 순전히 지적으로만 접근할 위험가운데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

 

6) 어떤 사람들은 결단으로 거듭남을 대체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기독교라고 여기는 종교를 갖기로 결단할 수 있다. 거기에서 제시되는 진리를 듣고 지적인 확신이 들어 받아들이기로 결단한다. 그에 따라 의식적으로 생활 방식도 바꾼다. 비슷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런 모임에도 참여한다. 그렇게 결단하기도 하면서 열심히 종교생활을 꾸려 나간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아니다. 중생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부 자기의 행동으로 이루어가는 것이다. 영혼에 일어나야 할 가장 중요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사람 속에는 새 생명의 역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회심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것 같다. 기독교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열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들이 익숙했던 분위기를 떠나면 곧장 세상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이전의 기독교적 습관을 버리기도 한다. 그것은 그들이 잠시 동안 설득이 되어서 일종의 지적인 확신을 가졌던 것이기 때문이다. 주위의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니 자기도 따라서 한 것 뿐이다.

 

7) 어떤 사람은 사교를 믿는 방식으로 믿는다

취미생활처럼 거기에 빠져 아주 열성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래서 누가 보아도 기독교가 가르치는 내용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 훌륭한 교회 일군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니고데모처럼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단함으로 기존의 것에 신앙을 더하는 것뿐이다. 자기가 결단했으니 어찌되었든 그 자리에 있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니고데모에게 나타나는 요점이다. 이것은 거짓된 고백일 뿐이다. 마치 미련한 다섯 처녀가 자신들도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만족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나중에 그들은 문이 닫힌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도 마지막 날 큰 충격을 받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주여 주여 우리가 이런 저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실 것이다. 자기 속에 생명이 있다는 절대적인 확신이 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속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2. 이런 위험에 빠지는 이유


그 이유는 새롭고 신성한 생명, 완전히 다른 생명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주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6)”라고 말씀하신다. 이 생명은 전혀 다른 종류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출발점이 된 육에 속한 생각은 전부 사라져야 한다. 기독교는 우리가 취미를 고를 때처럼 선택할 대상이 아니다. 어떤 원리를 이해하고 파악해서 적용할 대상도 아니다. 고대의 펠라기우스라는 이단이 그랬듯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에게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을 기대하는 일이 오늘날에도 아주 흔히 일어나고 있다. 이 사람들은 기독교를 누구나 적용할 수 있는 한 가르침으로 간주한다. 기독교의 원리가 참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실천에 옮기고자 노력함으로 다른 이들을 설득하여 기독교 모임에 함께 참여하게 함으로 기독교인이 된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의 원리를 적용하는 상태에 이르고자 애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기독교가 아니다. 우리는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하기를 바라기 전에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를 보아야 한다. 타고난 자연스런 사람이 산상설교의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펠라기우스적인 이단에 빠진 것과 같다.

 

3. 주께서 그리스도인의 생명에 대해 말씀한 것이 무엇인가?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밝히신다. 이 생명의 영광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데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내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8) 말씀하셨다.

 

1) 사람은 스스로 태어날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새 출발은 곧 새 창조이다. 새 창조와 비슷하게 무에서 유가 생겨나고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거듭나는 것이요 위에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는 주님의 말씀대로이다. 이것은 완전히 우리의 일 밖의 일이다.

 

2) 우리는 결단으로 거듭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면 거듭나는가? 아니다. 그것은 순서가 뒤집힌 말이다.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는 사람은 다시 거듭날 필요가 없다. 성경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고 말씀한다. “이 세대의 통치자들”(고전 2:8)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다.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 까지도 통달하시는 (고전 2:10) 성령의 계시를 받는 사람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 먼저는 거듭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단할 수 없다. 믿기로 결단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영적인 지각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이런 지각이 전혀 없었다. 주님이 그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처음부터, 기초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완전히 새로 창조되어야 했다.

 

3) 이것은 근본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주 신비한 것이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7)는 이 말씀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육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니고데모는 “...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4)”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지혜로운 사람으로 분명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육체의 관점에서만 생각한 것이다. 거듭난 것은 결코 육체적인 일이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4) 주님은 분명한 비교를 통해 말씀한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8). 바람은 신비한 면이 있다. 그 영향과 결과는 눈에 보이는데, 머리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성령으로 난 사람이 바로 그렇다. 여러분은 지금 이해의 영역 밖에 있다. 그렇다고 비이성적인 영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성을 초월한 신성한 영역이다. 신비하고 초자연적이며 신성한 영역, 곧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이해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놀라고 경탄하면 된다. 이해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심히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가 가진 것을 주장하는 태도이다. 감사하게도 그것은 우리의 이해와 지성의 영역 밖에 있다.

 

5) 만일 이렇지 않다면 기독교는 특별한 사람만 누리는 특권이 되어버린다

지적이고 유능한 사람만 누리는 남다른 특권이 되어 버린다. 기독교가 사상과 이해와 철학적인 개념을 받아들여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면 누구보다 그 능력을 가진 자들에게만 크게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다. 지적인 자 못지않게 지적이지 못한 자에게도 소망을 주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소망을 주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영광이 여기에 있다. 기독교는 모든 계층과 모든 유형과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수용한다. 왜 그럴까? 사람의 행동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전부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은 바람처럼 역사하는 분이시다. 단순히 사상을 듣고 필기해서 파악하고 실천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 나를 사로잡으며 하나님이 내 영혼을 다루어 새사람으로 만드신 것을 내가 깨닫게 된다.

 

[나아가며]

 

내가 주님께 나아간 동기와 접근 방식이 잘못되었는가? 걱정하지 말라. 주님이 바로 잡아주실 것이다. 주님은 항상 바로잡아 주신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자리에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더 이상 따지려 들지 않는다. 자신이 파산상태와 필요를 인식하고 귀 기울이며 기다릴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자신에게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때부터 진정한 성장이 시작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에(5:1), 이제는 우리 주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일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이 기초가 없이 건물을 세우려 들면, 나중에 전부 무너져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 먼저는 출생해야 하고, 이 출발이 있어야 길을 제대로 갈 수 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 우리는 거듭났는가? 우리는 우리 영혼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는가? 이 중대한 질문 앞에 확실하고 분명하게 답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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