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생명의 축복 (요 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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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생명의 축복 (요 2:9-11)

이윤석 목사 0 2023.04.20 15:20

넘치는 생명의 축복 (요 2:9-11)

 

[들어가며]

 

우리는 계속해서 혼인잔치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고 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사건인가? 첫째로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의 기록인 동시에 첫 번째 기적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기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나타내주는 기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또 다른 특별한 이유는 이것이 하나의 비유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한이 복음서 처음부터 강조하는 가장 큰 주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려 오셨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 충만함을 받아 은혜 위에 은혜가 되는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충만한 주의 복을 설명하기 위한 가시적인 사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축복의 성격과 본질은 무엇인가? 본문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는 것은 첫째는 우리가 절박한 상황으로 반응할 때, 축복이 온다는 것이며,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활동하실 때에 모든 상황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장에서는 늘 간절한 사모함과 절박함과 목마름이 필요하다.

 

1. 그러면 우리 주님이 주시는 만족할만한 축복이 무엇인가?

 

이것은 단지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보다 거기에는 넘치는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의 실례를 들어보자.

 

1) 첫째의 실례는 예수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14:15-20). 사람들이 표적을 체험한 후 배부르게 먹고 난 다음, 제자들은 필요를 채우고 남은 것들을 거둔다. 그랬더니 열 두 바구니가 남았다, 이것이 주님의 방법이다. 주님은 언제나 풍성하고 넘치도록 충만한 것을 보여주셨다. 우리가 바로 그런 주님을 믿고 받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2) 둘째 실례는 다윗의 고백에서 찾을 수 있다. 다윗은 목자의 시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23:5)라고 고백한다. 그의 고백은 잔의 아구까지 가득차서 넘쳐흐르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특징을 나타내주는 고백이다. 바로 목자 되신 주님으로부터 자유로움과 충만함과 풍성함이 주어진다는 다윗의 고백이다.

 

3) 셋째 실례는 아가서에 나타난다. 아가서는 신약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사이에 가지는 관계의 그림이요 예언이다. 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완벽하게 상징하고 있는 시적인 드라마이다. 또는 구약적으로 읽으면 솔로몬이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묘사하는 방법이다. 솔로몬이 말하는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 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2:4,5)라는 고백은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병이 들 정도의 압도적 사랑,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인동형적(anthromorphims)인 시적 표현이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2:11)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가 영적인 겨울에 살고 있지 않는지를 직시하게 한다. 내 영혼의 상태는 겨울이 지났고 비도 그쳤는데 아직도 거기에 살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 영혼의 상태는 어떤가? 여전히 흐리고 구름 끼며 이슬비 내리고 안개 낀 날씨인가? 솔로몬의 대답은 무엇인가?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2:11-13)”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 도다”(2:16). 이것은 솔로몬의 연애편지가 아니라,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4) 네 번째 차고 넘치는 그 풍성함에 대해 이사야는 노래하고 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35:1,2).

 

5) 다섯 번째 실례는 가나 혼인잔치와 같은 말씀 후에 나오는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의 내용에 나타난다. 그 여인의 생애 가운데 고된 업무 중에 하나는 물을 길러 우물에 나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오의 뜨거운 사막기후에 물 길 으는 모습을 상상을 해보라. 그때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4:10). 그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설명해 주신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13) 이 물은 세상의 생명이다. 그것이 영원한 만족을 줄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물은 또 목마르고 또 와야만 하는 물로서 결코 궁극적인 만족도 그 풍성함도 줄 수 없다. 그 여인이 계속해서 더 많은 물을 긷기 위해 우물에 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삶에 계속해서 벌어지는 비극이다. 주일에 교인들은 교회에 와서 약간의 힘을 얻는다. 월요일에 약간 힘을 잃고, 화요일에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하고, 수요일에는 거의 모든 에너지가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수요예배나 특별예배에 와서 힘을 얻는다.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3,14). 이제 주님은 아예 우리 안에 우물을 넣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바깥 어느 곳에서든지 물을 긷지 않는다. 그 우물 곧 원천은 우리 속으로부터 흘러넘치게 해주셨다.

 

2. 이것이 신약성경의 대주제요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이다

 

1) 이것이 바로 주님의 선포 속에 나타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7:37,38) ‘그 배에서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의 안에서부터라는 말이요, 곧 사람의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작은 시냇물이 아니라 강이요, 생수의 강물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말씀하심이다.

 

2) 사도행전에는 그것을 부어주셨다고 표현한다.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주셨다고 말씀을 하는데, 그 표현은 넘쳐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에게 내리는 소낙비와 같다. 우리가 놓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에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졌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도행전 4장과 그 이후에도 충만한 내용을 말씀한다.

 

3)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5:5)고 말씀한다.

약간의 습기만 적시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이 엄청난 양으로 부어졌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심령 속에 부어주셨다고 고백한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그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풍성한 열매라고 말씀한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3). 바울은 거기서 훨씬 더 진전하여, 에베소서 2장과 3장에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라고 말씀한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9).

 

4) 베드로 사도도 이에 대해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벧후 1:4)라고 말씀한다. 모든 신약의 기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받은바 삶의 충만하고 넘치는 말씀을 계속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3. 그러한 넘치는 축복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어떤 분은 말한다: “그건요. 그때만이 아닙니까?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시작하던 초기에만 일어난 일입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 사람들의 주장이 성경이 말하는 것일까?


1) 결코 아니다. 이런 축복은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에게 한 것이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요(3:19). 첫 세대와 2세대 뿐 아니라, 계속되는 세대, 우리에게까지도 말씀하신 것이다.

 

2) 로마의 원형극장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넘치는 축복의 역사 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즐겁게 고통을 받고, 오히려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더 어두웠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과 고통 속에 있었던 것은 구경자들이었다. 그것은 고통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충만한 생명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이런 넘치는 축복의 역사는 여러 세기에 걸쳐 경험되는 일들이다. 17세기 청교도들이 그랬고, 영국의 죠지 휫필드와 미국의 요나단 에드워즈가 그러했다. 휫필드는 너무 많이 설교해서 탈진 상태에 빠져, 그의 청중들이 침대에 휴식을 권할 정도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무 풍성하고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갈릴리 가나에서 일으켰던 표적을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부흥이라고 한다. 우리 모두는 인위적이고 부흥이라는 외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참된 부흥을 사모하자!

 

4. 넘치는 생명의 진리를 우리 자신에 적용하자!

 

이런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실 때, 쏟아 부어주시는 선물이다. 그 결과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물처럼 흘러넘칠 것이다. 이것은 강권적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 우리 몸의 머리이시며, 우리는 친밀하고 유기적인 관계 안에 있다. 영광의 주,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부요하시니, 어찌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난하게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분 안에 있고, 우리는 그분에게 속하여 있다. 어제도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부요하시다.

 

1)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왜 우리가 그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정말 그 분 안에 있고, 그분과 우리와의 관계가 풍성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과 성령을 믿는 대신에, 혼동케 하는 마귀에게 귀를 기울이고, 속이고 대적하는 자의 말을 들으며, 우리 자신의 헛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지금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의 영광 가운데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무한한 부드러움으로 그것을 그림과 같은 형식으로 설명하고 계시는 중이다.

 

2) 지금 우리는 그 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모자랍니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같다.

우리는 요한복음 2장의 주님을 보고 있다. 그분이 일어나신다. 그분이 명령하신다. 그 결과 차고 넘치는 역사가 나타난다. 우리 모두 그 사랑과 그 축복 안에 살자. 이런 사랑 안에 사는 자는 두려움이 없을 것이며, 진정한 평안이 있을 것이다. 폭풍과 같은 현실이 몰아쳐서 잠시 마음에 떨림이 일어나도 주께서 나의 곁에 계심을 의지하면 겁낼 것이 없을 것이다. 과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자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은 그 주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나는 그분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그분은 내 앞길을 밝혀주시니 나는 그 주님의 길을 따르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는 말씀을 기억하자. 먼저는 그를 믿고, 사모하자. 늘 기도하자! “주님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내 마음에서 때마다 일마다 주님이 솟구치소서! 영원토록 샘물 솟듯하게 하소서!”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이요, 이것이 참된 기독교의 실상이다.

우리가 늘 그러하지 못해 부끄러워하고 있는가? 만일 우리가 그 복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잘못 나타냈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무서운 책임이 아닐 수 없다. 바울사도는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딤전 1:11)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차고 넘칠 정도로 충만하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기 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목자로 삼자!

 

3)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지금 여기에서 계속되는 경험이다

가나에서 예수께서 제공하신 포도주는 결혼식 손님들에게만 제공되고 얼마 되지 않아 곧 떨어지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끝날 때까지 모든 상황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생애 가운데, 계속 그분이 행하시는 하나의 그림이다. 연회장의 말을 들어보라: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10).

여기서 놀라운 것이 무엇인가? 처음보다 나중이 점점 좋아지고, 끝이 더욱 좋았다는 것이다. 나이가 든 교인들이 이렇게 간증할 때가 많다: “제가 여러분 나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젊을 때로 돌아간다면 이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그런가? 결코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이 더 좋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생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좋아지는 것이다.

교회 안에 희망은 2세뿐인가? 어떤 분은 2세대, 청년세대, 젊은 세대에 소망만을 운운한다. 합당한 생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1세대이거나 2세대이거나 3세대이거나 과연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가가 중요하다. 그것을 모르니 젊어서도 마음이 늙어가고 늙어서도 마음은 더욱 늙어간다. 주님은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는데도 핑계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만 성경도 과연 그렇게 말하는가? 우리는 세사의 상식을 따라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성령에 감동된 시인의 말을 들어보라: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 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92:12-14). 거듭난 인생이라면 반드시 계속 성장하는 존재이다. 인간적인 지식이나 건강은 시간이 흐르면 약해져도, 예수 안의 생명은 더욱 장성하고 풍성해져가기만 한다. 우리가 왜 이렇게 늙어가도 더욱 나아질 수 있는가? 이사야의 대언의 말씀을 듣자: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46:4)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노년이 되었을 때, 우리가 별로 사용하기에 적합지 않다고 제쳐두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13:5)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4) 바울 사도는 가장 높은 산등성이 하나를 올라가는 모습으로 말씀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신앙생활은 반드시 점진적이다.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듯이 확장되고 증가하는 것이다. 거듭나서 거기 머물고 정체하는 것이 아니다. 변화되어가고 변화시키는 삶이 계속된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우리에게 주님이 주신 생명의 특징이다. 그들은 찬양한다. “저 넓고 푸른 동산 내 앞에 열리고 그 검은 구름 걷혀 새 하늘 보인다. 끝없는 나의 소망 저 환한 생명 길 참 보배 되신 주님 늘 함께 하소서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온전한 사랑을 말씀하면서 말한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랬다. 임종 직전까지 그들의 모습을 보면 은혜를 받아왔고, 엄청난 은혜를 받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우리의 신앙은 최종 결과에 이르기까지 믿음이 증가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갈릴리 가나에서 나타났던 표적을 이렇게 결론 맺는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 제자들은 벌써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있었다. 이미 신자요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표적의 결과로서 그들은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믿었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큰 원리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가 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많은 것을 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확신을 주고 지식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더욱 더 찾게 된다! 우리 모두 이런 은혜 속에 살자! 매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사모하고 찾아가며 집중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듣자!

 

[나아가며]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는 그의 사모함을 고백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을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2-14). 과거의 것들은 잊어버리자! 지금 일어나는 일과 일어날 일이 중요하다. 이 때문에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름의 상을 위해 좇아가고 달려가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나 혼인잔치를 통해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넘치도록 주시는 표적을 통해서 우리 신앙생활의 영광스러운 충만함에 대한 가능성에 우리 눈을 뜨게 하시는 분명하고 명료한 그림을 주셨다. 참되고 넘치는 풍성한 생명! 온전히 알게 되고 채워지며 영광스럽게 되고 주님처럼 될 때까지 계속 발전하고 성장하는 풍성한 생명이 되자! 이것이 기독교이며,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성령께서 계속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고, 충만하게 채워주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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