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은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실제적이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팬데믹의 위기를 살아갈 뿐 아니라, 여전히 많은 사회적 위기의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가 세상을 즐기며 살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즐기고 있는 그 평화는 매우 불확실하며, 매우 일시적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평화 속에도 다툼과 피흘림이 숨어 있으며, 얼마 안 있어 곧 그 평화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가 드러나는 삶의 무대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는 질문이 따른다. 이런 세상에 우리 기독교의 메세시는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할까? 이런 세상 형편에 대해 우리가 가진 메시지는 정확하고 분명하며 항구적인 것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정확하게 말해야 하는가? 성경만이 이에 대한 완벽한 답을 제시한다.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가짜 답들이 많이 유행했었다. 19세기에 활동했던 사상가들은 얼마나 세상이 좋은 쪽으로 진화하고 진보할지에 대해서 외쳐왔고, 정치가들은 세상이 얼마나 좋아질지 낙천적인 연설을 헤 왔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이 지나고 보니 그런 사상은 완전히 망상이고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그 이상주의적인 철학을 주장하는 철학자들과 진화론자들이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 가장된 무력한 답을 추구하고 있다. 여전히 인간의 이성이 모든 것의 전부라고 인본주의에 궁극적인 믿음을 두는 사람들과 더불어 맹종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떤 답을 말해야 하는가? 유일한 대답은 복되신 인격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가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상황을 바꾸어 놓으셨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역사의 대전환점은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획기적인 새로운 시대는 언제부터인가? 갈라디아 4장 4절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라고 말씀한다. 모든 문제에 대한 열쇠는 그 안에, 그가 행하신 일에 달려있다. 어떤 시대에 교회가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주위에서 우리가 지금 보고 듣는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청종하며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많은 교인들이 그를 청종하는데 실패했고, 곁길로 나아갔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축복과 이익들을 깨닫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이 오늘의 교회의 큰 고통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이 말씀하시도록 허용하지 않고, 자신들이 너무 말을 많이 하고 있다.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자기 생각을 성경에 집어넣고 있는 이기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이 있다. 성경은 잠시 빌릴 뿐이며, 그 가르침을 왜곡시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주려는 축복을 놓치고 있다. 다시 주님의 모습을 보며 그분을 따르자!
I. 사 복음서에서 주님의 오실 때에는 언제나 그분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신다
1. 우리의 자세는 그분을 청종하는 것이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던 순간, 고통과 혼돈이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할동하기 시작하셨고 문제는 해결되었다. 해답은 언제나 그분 안에 있다. 그는 오늘의 고통과 혼돈의 상황에 대해 명령을 내리시며 말씀하신다. 우리 삶에 있어 지혜의 본질은 바로 그분을 청종하는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고 중요한 것이다.
1) 우리가 깨달아야만 될 우선적인 일은 예수님께는 여러 측면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어떤 사람은 이런 측면, 다른 사람은 다른 측면의 진리들을 치우쳐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만을 강조하는데, 그 목적은 전쟁을 반대하고자 하는 논리를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주님을 성경에 있는 그대로, 그 좁은 문맥과 넓은 문맥의 여러 측면들을 먼저 볼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분을 우리의 일방적인 견해나 어떤 특별한 사람의 특정한 견해로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2) 이 본문은 앞선 본문과 대조적이다.
앞선 본문에서 혼인잔치의 행복은 혼인잔치 집에 계신 주님을 보는 것이다. 그분은 잔치석상에서 포도주를 공급하고 계신다. 얼마나 행복한 장면인가!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진심으로 깨닫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자신들에게 할 일이 무엇인가 말씀해 달라고 요청하며, 그를 의지할 때, 충만한 복을 받는다는 것을 배운다.
이 본문은 앞선 부분과 대조적이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삶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충격적인 대조를 이루는 것 같지만, 더 중요한 것은 똑같으신 분이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례요한은 이 분에 대해,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눅 3:16)라고 말씀한다. 성령, 충만한 축복과 성령의 세례는 놀랍고 영광스런 말씀이다. 그러나 그분은 성령으로만 아니라, 불로 세례를 베푼다. ‘불로 세례를 베푼다’는 말은 누가복음에 잘 표현되어 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7).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평화의 왕으로만 인정하는 것이 문제다. 주님이 동시에 공의의 왕이심을 망각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지혜의 본질은 그분 발 앞에 엎드려 그 분을 바라보며,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일 부분 만이 아니라, 모든 부분을 청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공정하고 정직하게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II. 주님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1. 세상이 반드시 들어야 할 메시지다.
1) 세상의 메시지는 심리적인 것이다
세상 리더들과 교사들은 주로 감정을 치료하고 위로하는 메시지를 말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그런 심리적이거나 사람의 마음과 환경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진정한 주님의 위로요, 근본적인 주님의 평안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정확히 말씀하신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주님은 세상이 알고 있는 평안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평안은 언제나 그 속에 의와 정의가 들어 있는 평안이다. 그것은 단지 다툼과 논쟁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놀라운 희생에 대한 것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서도 고상하고 놀라운 희생을 말하지만, 복음의 희생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 교인들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세상적인 희생과 의무감, 용기를 성경의 메시지로 매도하고 착각하며 주입할 때가 많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아들로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오는 희생과 의무감과 용기가 아니다. 또한 복음은 사회의 사상가들이나 정치가들에게 주는 충고의 메시지가 아니다. 교회는 더 크고 더 깊은 하나님의 부르심, 곧 소명이 있다. 세상 지도자들에게 평화를 추구하고 전쟁을 추방하고 사회적인 의를 실천하라고 호소하는 것이 기독교인과 설교자의 임무는 아니다. 설교자와 기독교인들은 늘 진리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
2) 그러면 복음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기본적인 메시지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소망되심과 구원의 유일한 방법 되심을 말하는 것이다. 본문은 성전을 정결케 하실 것을 경고하시는 주님의 말씀이다. 지금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라는 최후의 경고를 보내고 계신다. 지금 이 말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끝장이 온다는 사실을 말씀한다: “내 말을 듣고 실천하라.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40년 후(AD 70) 로마 군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 도성을 포위하고 성전을 파괴할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다른 이방 나라에 흩어질 것이다. 이 파국을 피할 길이 있다” 주님의 공생애 사역 3년 후, 주님이 십자가 지시기 직전에 주님이 탄식하신 것이 무엇인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이것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을 말씀하고 계심이다. 지금 위기의 교회에서 해야만 될 일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메시지이다.
2. 메시지의 우선적 강조점은 우리와 하나님과 관계이다
1) 이 모든 것을 성전을 통하여 보여 주신다
주님이 찾으신 예루살렘 성전은 47년 동안에 지은 가장 웅대하고 장엄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복된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예비하였고, 이는 삶의 중심이었다. 여기서 주님은 말씀하실 바를 분명히 말씀하시고 그에 따라 행동하실 바를 즉시 행동하셨다. 문제는 성전이 문제가 아니라, 그와 관계된 사람들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고 예배에 대해 변질이 생겼다는 것이다. 제사장들이 타락하니 백성들도 타락하기 시작했고, 삶의 전반에 부패가 찾아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토라(율법)의 말씀은 변하지 않고 여전히 사람들을 안전하고 평안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여전히 말씀하고 있다. 구약성경은 이런 것을 요약적으로 분명히 지적한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도다”(잠 29:18). 그들이 얼마나 부자인가 가난한 자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묵시(비젼)가 없는 것이 문제다. 여기서 비젼이라고 할 때, 그것은 자기의 소망이나 이상이 아니라, 선지자의 말씀의 비젼이다. 모든 것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 당시 왜 선지자(제사장)가 없겠으며, 왜 말씀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듣지 못했고 무시했으며 무관심했다. 한 나라 공동체가 쇠퇴하고 패망하는 것은 즉각적이기보다 점진적으로 온다. 무엇을 가졌는지, 재력이 얼마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공의가 문제이다. 솔로몬은 말한다: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 14:34). 개인이나 공동체나 의를 행할 때, 다른 것들이 따라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
2) 쇠퇴는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어보자. 대제사장 엘리는 선량한 사람이지만,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으로 가정을 이끌어 가기보다, 감성이나 성품을 따랐다. 그는 두 불량한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두었다. 그들은 자신의 직책을 남용해서 돈을 마음대로 쓰고 여인들을 건드렸다. 말씀으로 마땅히 책망하여 바로잡아야 하는데, 비도덕적이고 가치 없는 삶을 사는 아들들이나, 말릴 수 없을 만큼 나약했다.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쇠퇴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전 나라에 엄청난 패배를 끼쳤다. 그로 인해 이방 블레셋이 일어났고 선민은 엄청난 피해를 맛보고, 심지어 하나님의 법궤까지 빼앗기고, 그들을 죽음을 당했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전형적인 메시지지만, 신약도 마찬가지다. 성전(교회)이 잘못되어가니, 모든 면에서 잘못되어 가기 시작한다.
3.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서는 것이 주도적인 원리이며 필요이다
1) 우리가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위험은 우리에게 주신 예배, 은혜의 수단을 오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 말씀을 따라 자신의 목적과 목표를 수정하거나 그 말씀에 적합하도록 그의 말씀을 사용하는가?. 유대인들이 겪는 고통은 언제나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것을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며, 성전을 잘못 사용했다는 것이 원인이었다. 문제는 성전 예배가 형식적이고 외적인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는 것이다. 개인이나 공동체에서 형식적인 신앙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참된 신앙도 없이 그저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추어 가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형식화나 외식화는 엄청난 저주이다. 우리 항상 먼저 우리의 기도나 찬양이나 예배의 마음에 외식(형식)적 신앙이 없는지 철저히 점검해보아야 한다.
2) 청결하게 해야 할 위험 요소를 파악하자
성전 바깥뜰에서 소나 양, 비둘기를 파는 것은 매우 합법적이고 필요한 일이다. 예배를 위해 멀리서 오는 사람들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꼭 필요했다. 세계 여러 나라서 오기 때문에 환전하는 사람이 꼭 필요했고 그 자체에는 잘못이 없다. 문제와 위험요소가 무엇인가? 사고파는 일이 성전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점차적으로 사람들의 목적이 물건을 성전 안에 들여와 자기 이익을 만드는데 사용했다는 것이다. 주님은 바로 이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미 예배의 방법을 미리 성경에 정해주셨다. 우리가 지금은 보다 내면적이고 영적인 방법으로 예배(요 4:23)하지만 원리는 같다. 하나님께서 이것도 그것도 정하셨기 때문이다. 청결하게 되어야 할 위험한 것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그것으로 우리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우리 자신의 방법대로 사용하며, 우리 만족을 위해 사용하는 것들이다. 하나님이 주신 교회의 예식은 목적과 목표에 따라 적절하게 활용되어야만 한다.
3) 교회와 국가관계를 혼동하지 않는지 파악하자
교회가 개인에게나 유명인사들에 의해 이용당해서는 안된다. 이런 면에서 국가를 교회와 동일시하면 안된다. 국가가 변화되면 교회도 변화 되야 하는가? 예를 들어, 러시아 귀족들과 러시아 정교회의 연합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던가? 이것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돌아서게 하는 원인이 되게 하였다. 또한 영국이 식민지 사업을 벌일 때, 독립하는 국가마다 기독교를 버렸다. 왜 그랬는가? 그들은 식민정책을 기독교와 같이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교회와 국가가 함께 갈 때, 이런 현상이 따른다. 중세 천년 동안의 교회를 보라! 교회는 곧 쇠퇴해 버리고 만다. 과거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교회가 영웅주의와 희생정신, 용기를 추구하는 것을 위해 이용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옹호하였다. 교회를 이용해 인간 이론과 교훈을 선전하지 않는가? 이 모든 것들이 청결하게 제거되어야 할 위험요소들이다.
4) 교회가 문화에 의해 이용당하지 않는지 파악하자
교회가 그렇게 어리석게 될 때, 교회는 죽어갔다. 많은 사람들은 노래를 하거나 듣는 것을 좋아한다. 찬양이라고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많은 사람이 음악을 듣고 찬양대가 부르는 특별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음악과 세련된 음악이 있는 교회 예배에 참석해오고 있다. 중세 이후, 교회의 찬양은 음악과 예술 등을 위해 이용되었다. 그래서 찬양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이용해서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 경력을 쌓거나 그것을 이용했다. 교회는 음악이 목적이나 중심이 되어서는 안된다. 찬양을 음악이란 문화의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된다. 특별한 찬양 인도자보다 다같이 찬양하는 것이 신약의 성경적인 모습이다. 누구를 자랑하고 내세워 그에게 주목하게 하는 것은 인간적이다. 교회 특별한 사람 몇이 아니라, 성도들이 다함께 찬양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신약교회와 요한계시록에서 찬양을 잘 하는 사람만 찬양에 참여했던가? 사도행전의 성도들은 모두가 찬양했으며, 장차 144,000명 곧 모든 성도가 함께 이 예배와 찬양에 참여한다. 음악과 각종 예술을 포함한 문화의 명목으로 교회 안에 양과 소와 비둘기 환전상과 같은 것들이 있지는 않는가?
4. 우리는 주님이 성전에서 하신 것을 제대로 청종하자!
1) 우리는 교회에 주님이 능력 가운데 임재하심을 인식해야 한다.
왜 사람들이 교회를 무시하는가? 교회가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한 때, 정치가들이 교회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던 때가 있었다. 존 낙스(John Knox)가 설교할 때, 스코틀랜드의 피의 여왕 메리는 벌벌 떨면서 설교를 들었다. 그것은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하실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는 그리스도께서 성전에 들어오면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실 때 나타내 주셨던 그 메시지다. 우리 첫 번째 임무는 나 자신, 곧 교회의 회복(부흥)을 위해 먼저 기도하는 것이다. 교회의 내부와 내용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인식하는 내용으로 가득 채워지도록 기대하고 기도하고 사모해야 한다. 거룩하신 분이 정결하게 되어진 곳에 임하실 것이다.
2) 다음으로 우리는 예수께서 오셔서 행하시는 일을 보아야 한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1절). 그리고는 곧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타남과 권세, 그리고 그분의 열심과 능력을 발견한다. 이것이 바로 표적(기적)이다. 성전을 정결하게 한 사건도 가나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된 만큼 기적(표적)이다. 그 당시 부자요, 지혜롭고 근엄했던 리더들이 성전에서 거대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것만 가지고 그들의 모든 양들과 가축들을 쫓아내셨다. 작은 노끈 채찍만 가지고도 이 같은 놀라운 일을 하셨다. 이것이 기적이다. 왜 기적인가? 가나혼인잔치와 똑같은 영광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앞선 사건의 결론을 이렇게 말씀한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절). 그의 말씀은 능력이 있었다. 육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답게 권세 있게 말씀하셨다. 성전에 있던 사람들은 권세있는 자의 새로운 교훈과 모습을 직관적으로 느꼈다. 우리가 사복음 전체에서 보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쳐다보기만 해도 살금살금 도망갔고, 그들은 주님을 바로 쳐다볼 수 없었고 주님과 맞설 수 없었다. 왜 그런가? 그분은 탁월한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나타내실 능력을 위하여 기도하자! 우리는 만드신 분이 주님이요, 우리를 능하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신 분도 주님이시다. 우리가 그 안에 있고 그 능력이 그분께 있고, 우리와 함께해 주신다면, 주님처럼 말씀을 전하고 주님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도록 기도하자!
3)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예수께서 활동하심을 알아야 한다(히 13장 8절)
우리 주님은 심판을 명하시며 집행하신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14절). 주님은 진노하는 모습으로 보고 계신다. 하나님 아버지 집을 사모하는 열정이 그를 삼킨 것이다(17절, 시 69:9). 그분은 거룩한 경외감으로 충만하게 되었고 드디어 심판을 선언하신다. 오늘날도 교회 위에 심판을 선언하심을 깨달아야 한다. 아니면 그 교회는 절망일 뿐이다. 사람들이 교회를 얼빠진 곳으로 보고 비판하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다. 세상이 교회를 욕하고 있는 것은 악한 마귀의 일이지만, 그것은 또한 어쩌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을 잘못 사용하고 있거나, 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주님이 활동하시도록 말씀으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며 깊이 상고하자!
4) 나아가 주님이 개혁을 주도하고 계심을 인식해야 한다
주님은 성전에 합당하지 않는 것들을 깨끗하게 제거하신다. 현재교회는 개혁이 필요하지 않는가? 교회 안에 들어온 가시적인 것이나 비가시적인 모든 비성경적인 잔재들을 멀리 던져 버려야 한다. 보기에 괜찮고 편리하다면서 교회 안에 들어온 비성경적인 것들은 없는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까지도 성경의 기준 아래 심판받아야 한다. 모든 미신적인 것들과 가식적인 것들을 없애려는 개혁의 의지가 주님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실천과 행위에 있어 가식적인 것들을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에게 동참해야 한다. 주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몸의 순수성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주도하고 계신 개혁에 동참하자!
5) 우리(교회)는 주님이 자신에게 집중하게 하심을 알아야 한다
주님의 진단이 무엇인가?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3).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인가? 성도들이 하나님께 인도되고, 그와 더불어 교제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교회는 늘 그런 능력으로 충만해야만 하고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진리에 근거하여 단순하게 만들 때 능력이 나타난다. 우리 교회는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말씀의 인도하심과 기도의 교제로 정결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 주위와 사회를 향한 소망이 실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역사의 위대한 변화는 5가지 기치(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를 가지고 실행할 때, 진정한 개혁을 체험할 수 있었고 우리는 그 자랑스러운 변화의 후예들이다. 영국의 역사에 있어 영국의 청교도들이 있었던 엘리자베스 시대, 크롬웰 시대, 공화정시대가 영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대였다. 일반 역사가들도 영국의 위대한 초석이 그때 놓아졌으며 국가 도덕 기틀이 만들어졌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잠언 14장 13절 말씀 그대로 의로서 나라를 영화롭게 한 것이다. 미국의 19세기가 위대하고 영광스러웠던 것은 18세기 복음적 대각성운동의 결과이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교회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청종하고, 말씀을 배우며 그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성령을 따라 사는 일이다. 교회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기도로 정결하게(거룩하게) 되어야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니 당연히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다.
[나아가며]
우리의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어 바로 세워지고, 그의 말씀을 따라 교회가 정결하게 개혁되며, 새로워질 때, 변화가 삶의 모든 영역 속으로 파고 들어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시(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망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때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말씀이 있을 때, 백성들은 복되고 일어서는 부흥의 때를 맞이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도 주님이 주신 그 말씀의 비젼을 붙잡자!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 우리 주님으로 행하게 하시고, 그분이 말씀하게 하시며, 그분께서 정결케 하시고, 이끌어 가시도록 맡기고 간구하자! 그분이 임재하사, 다시 채찍을 드시고 진노하며 상을 엎으시고 짐승을 쫓아 내시며 교회를 정화하셔서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순수함을 일깨워 주시도록 간구하자.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종하며 복된 성령으로 충만케 되기를 원하는 우리에게 반드시 능력을 주실 것이다. 그분이 지금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가정에 오시도록 기도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를 채워달라고 간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