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 살아있음의 결과

그리스도 안에 살아있음의 결과

이윤석 목사 0 07.13 07:18

[들어가며]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들은 만날 때 평안이라고 인사했지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만날 때마다 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가 일상적인 인사말이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상황을 만나도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주고 받는 말이었다.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 말을 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 모든 소망과 확신의 토대이기 때문에, 그런 핍박 속에서도 그렇게 인사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원수가 무슨 일을 하든지 궁극적인 승리자가 우리 편이시니 그분의 목적과 그분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막을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라고 인사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살아나셨습니다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요약한 말이기 때문에 거듭난 자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는 삶의 중심이나 소망의 토대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 이런 시금석은 마귀가 위조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마귀는 그렇게 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이 크게 패배한 자리가 바로 그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이라도 어떻게 하든지 부활을 부인하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로이드 죤스 목사는 부활과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강조하면서 거듭난 자의 분명한 증거로서 우리의 삶에서 부활의 결과가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을 강조한다.

 

1.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출발점이다

 

1) 부활은 관념이 아니라 분명한 실제이며 역사이다

부활의 의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의 몸을 내려서 장사지냈고,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고 인봉한 후 경비병을 세워 지키게 했다. 그런데 천사가 그 돌을 치웠고 주님은 문자 그대로 몸으로 부활하여 무덤 밖으로 나오셨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우리의 위치의 기초를 이루는 사실이다. 그 사실이 있기 전에 니고데모는 어떻게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수 있지?”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하신 것이며, 십자가에서 정신을 잃으신 것이라고 한다. 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꾸미기 위해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고 말한다. 이런 말로 인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마저도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가장 큰 기적인 부활을 머리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2) 기독교 신앙은 기적이며 개인적 삶의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다

동정녀 탄생이 기적이며 초자연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다. 우리도 이 땅에 살지만 초자연적인 영역에 속해 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믿겠느냐?”(3:12). 부활을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현대 과학이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믿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은 스스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불가능한 일, 초자연적인 일, 기적적인 일을 문자 그대로 물리적인 사실로 믿는 능력을 받는데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는 살아나셨습니다라는 말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 신앙의 내용도 세워질 것이 없다. 그런데 과연 이것은 개인적 삶의 경험을 통해 부활의 결과를 알고 있는가?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개인적으로 경험적으로 모를 수도 있다. 우리가 거듭났는지 아닌지 검증할 수 있는 실제적인 시금석은 우리 삶 속에서 경험을 통해 부활의 결과를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 위로부터 난 사람, 새 출생과 중생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만 아는 일이다.

 

2. 그러면 부활의 결과는 무엇인가?

 

1)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이 세상과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을 안다.

갈라디아서 614절은 말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로마서 66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이라고 부정과거의 시제를 사용한다. 이 일은 과거에 단번에 일어난 일이다. 주님이 못 박히실 때 우리도 못 박혔다. 사도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1)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14)라고 한다. 또 다른 곳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3:1). 왜 위의 것을 찾아야 하는가?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3:1). 그리스도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한다(2:20).

 

(1) 이것이 기독신앙의 본질적인 핵심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 일어난 모든 일은 주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6:5). 여러분은 죽었는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이것은 천성 그대로, 태어난 모습 그대로 살아가던 자신, 아담 안에 있던 자신, 세상과 세상의 방식과 죄의 삶에 속했던 자신, 죄와 사탄의 지배를 받던 자신을 인식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죄 가운데 출생했고 죄 중에서 잉태되었다(51:1),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모가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어도 자녀는 다 아담의 자녀로 태어난다. 세상의 삶과 세상의 방식에 속한 자로 태어난다.

 

(2) 그리스도인이면 과거의 자신은 죽은 것이다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그와 함께 못박혔. 로마서 66절 이후의 구절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죽으신 것을 믿는가? 그렇다면 그와 함께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럴 수 없다! 로마서 66절이 말하듯이 우리는 이미 그와 함께 죽었다. 그와 함께 못 박혔다. 주님은 우리에게 죽으라고 말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그와 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옛 사람이 이미 죽고 없어졌다는 것을 명확히 하자! 이것은 옛 본성이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는 것이다. 옛 본성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래서 바울이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에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다(6:12).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할까? 우리 옛 사람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제 두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새사람만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옛 본성이 남아있음을 인식하지만 처음 태어났던 자기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아는 것이다. 여러분도 이것을 분명히 아는가? 이것을 아는 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죄를 짓고 실패한다. 이처럼 잘못된 부분이 많음에도 과거의 자신은 죽었으며, 과거의 자신이 아님을 확실히 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죄와 사탄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상태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요약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자신을 보면서 내 모습이 지금 어떻든지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사람은 죽었다. 세상은 여전히 날 유혹하지만 지배하지는 못한다.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내가 새 나라에 합당하지 못할지는 몰라도 더 이상 옛 나라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과거의 나는 죽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우리와 세상의 관계는 끝났다. 여러분은 자신이 더 이상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을 아는가? 이 본질적인 죽음, 단번의 죽음을 겪었는가? 더 이상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가? 과거의 그 사람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2) 적극적 단계로 나아가 거듭난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고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안다

부활의 결과에는 이 두 측면이 다 중요한 측면이다. 사도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6:6-7)라고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죄의 요구와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것, 더 이상 죄의 영역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6:8-11). 이 말씀이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인가? 단순히 그럴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하지 말라. 분명한 사실로 믿고 알자. “이와 같이 너희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이 말의 의미는 자신에게 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심리학일 뿐이다. 이 말씀은 심리학이 아닌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우리가 죄의 지배와 영토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임을 깨닫자!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호소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6:12-13). 우리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임을 깨닫자!

 

(1) 질문의 형태로 바꾸어 보자!

여러분은 자신이 살아난 것을 알고 있는가? 죄로 죽어 있던 상태에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영적인 실제에 대해 철저하고 완전하게 죽어 있던 상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 것을 알고 있는가? 살아난 것을 알고 있는가? 여러분은 살아났고 일어났는가? 사도 바울은 지치지도 않고 이 말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그는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위대한 기도에서 항상 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한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토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1:18-21). 여러분은 이 능력을 알고 있는가? 바울은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너희가 알도록 기도한다는 것이다. 그 능력이 어떤 것일까? 사도는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능력과 동일한 능력이라고 말한다.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그 능력을 인식하고 있는가? 이것이 거듭난 모든 자에게 해당되는 진리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바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만 부활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영적인 생명이 없는 자는 거듭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이다. 그와 함께 못 박히고 장사되고 다시 살아나 생명을 얻은 자이다.

 

(2) 부활의 권능을 아는 자이다

사도는 에베소서 3장에 이렇게 기도한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8-19). 사도는 더하여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20)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여러분 안에서도 이 능력이 역사하고 있는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은 부활의 능력이다. 이 능력이 성령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 안에서 역사한다. 그들은 자신의 머리와 이해력과 육신의 힘과 에너지로 살지 않으며, 세상이 그 방면에서 제공하는 도움을 받아 살지 않는다. 그들은 새 삶을 산다.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산다. 부활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능력으로 산다. 바울 자신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마음의 열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4:10-11). 사도는 부활의 권능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3:12)라고 했다.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달려간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라는 것을 아는가? 여러분 안에 생명의 원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가? 여전히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아는가? 여러분 안에는 다른 유형의 생명과 특질과 성품이 있다. 새 생명, 부활의 생명,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가?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며 용기와 기운을 솟구치게 하는 힘에 대해 알고 있는가?

 

(3) 사도에게 이것은 일상적인 경험이었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 말한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1:28-29). 위대한 바울 사도 같은 인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에 담긴 기본적인 의미는 바울사도와 우리나 다를 바 없다는 표현이다. 바울 안에 역사했던 능력이 우리 안에서도 똑같이 역사하고 있다. 정도의 측면에서는 그가 더 위대하지만 역사하는 능력 자체는 동일하다. 성령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신선한 생명을 얻는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철학적 신같은 존재가 아니다. 단순한 절대자원인 없는 원인이 아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요 아버지이시다. 자신과 상관있는 분이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감옥에서 그들이 만날 때에도 그리스도는 살아나셨습니다라고 인사했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정말 그리스도는 살아나셨지요 내 안에서 살아나셨지요, 저도 그것을 압니다. 그 임재와 능력을 느낍니다. 내가 죽은 것도 알고 지금 살아있는 것도 압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3) 부활의 결과,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음을 알기에 항상 안전하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

 

(1)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이 부활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가 계신 곳에 나도 있는 것이다. 그는 하늘에 앉아 계시며, 나도 영으로 하늘에 앉아 있다. 몸은 땅에 있지만 영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 골로새서 33절에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라고 아름답게 표현한다. 여러분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의 생명은 지금 이 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리스도인이 두려워하고 변명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그리스도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태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전하다. 두려울 것이 전혀 없다. 왜 그럴까? 우리 주님이 우주의 보좌에 앉아 계심으로 우리도 하늘에앉아 있다.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3). 마태복음 28장에 주님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28:18). 그는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

 

(2)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위치와 그들 안에서 역사하는 능력에 대해 밝힌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1:20-21). 현재 그리스도인들은 유물론과 공산주의를 비롯한 많은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위에 계신 분이다.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1:22-23). 그는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 우리 모든 원수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정복하셨다.

 

(3) 환난의 시기에도 절망할 필요가 없다

바울 사도는 시련과 환난의 시기를 거치던 로마 교인들에게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절망할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킨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8:33-35, 37). 바울 사도의 마지막 주장은 이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왜 끊을 수 없는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며,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것이 성도의 최종적인 견인 교리이다. 우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에 안전하고 든든하고 확실하게 보호받는다. 부활의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그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 높아졌다. 하늘에 앉아 있다. 어떤 것도 거기서 우리를 끌어내리지 못한다. 그래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만날 때마다 그리스도는 살아나셨습니다라고 인사한 것이다.

 

4) 거듭난 자는 하나님께 대해 살아있고 자기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음을 안다

 

(1) 필연적으로 그가 다시 나타나실 날의 영광을 고대한다

자신을 기다리는 영광을 고대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태어나고 거듭난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이것 또한 마귀가 위조할 수 없는 것이다. 마귀는 이미 패배했다. “이 세상 임금자리에서 쫓겨났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쫓겨났다. “이제 이 세상에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12:31). 그는 과연 쫓겨났다. 우리의 크신 주요 구주되신 분이 복되게 나타나시는 날, 최종적으로 멸망의 못에 던져질 것이다. 만일 기독교인이 아니라 독실한 종교인이라면 종교인은 세상의 어리석은 자 중에 가장 어리석은 자이다. 그들은 이 땅에서 자신이 이해하는 만큼만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자신의 선과 종교의 성취를 의지한다. 기쁨도 없고, 행복도 없다. 무엇보다 이 소망이 없다. “복스러운 소망”(2;13)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여러분은 바울처럼 죽음을 고대하는 종교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1:23)라고 한다. “너희를 위해서는 내가 여기 남아 있는 편이 더 좋지만, 나로서는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편이 훨씬 더 좋다는 것이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1:21). 종교인은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끈질기게 붙잡고 놓지 않는다. 왜 그럴까? 다른 세상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안에 무엇이 있는가 모른다. 그들의 영혼에는 그리스도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 그들은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께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강력한 능력이 자기 안에서 역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안다. 물론 그 정도는 매우 다양하고 다르지만, 이런 일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영광이 온전히 완성되어 나타나기를 열망한다.

 

(2) 로마 교인들은 고난 속에서도 상속자의 영광을 알았다

로마 교인들은 곤경에 처했고, 사도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요 따라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라는 것,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8:17).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18-23). 그렇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이 영광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영광이 여러분을 떠받쳐 주고 있는가? 이 영광이 시련과 실망과 불행과 질병을 겪을 때 죽음에 직면할 때 여러분을 붙잡아 주고 있는가? 여러분은 맨 나중에 원수인 사망을 이기는 승리를 확신하는가? 지금 이 영광을 향해 나아가는 중임을 알고 있는가? 모든 일에 당당히 맞서며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선포하고 있는가? 바울은 더하여 말씀한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보이는 것을 보는데 시간을 다 쓰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유다는 짧은 서신의 마지막 축도에서 이 모든 내용을 잘 요약해준다. 그 편지를 받는 이들 또한 박해뿐 아니라 교회 안의 거짓 가르침이라는 무서운 시련을 겪고 있다. 거짓 교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워 복음의 핵심을 부인하고 자기 가르침을 덧붙였다. 초창기부터 그런 자들이 있었고 유다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24-25).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있다면 그 생명의 환성을 바라는 갈망과 열망을 희미하게라도 느낄 것이 틀림없다.

 

[나아가며]

 

우리는 여전히 몸 안에 살면서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중이다. 우리는 구원받았지만, 몸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 그러나 몸도 곧 구원받을 것이다. “홀연히 다 변화될것이다(고전 15:51). 영화로워질 것이며 완전해 질 것이다.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생명이 영혼 안에 있는 자는 그가 나타나실 영광스럽고 큰 날, 온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놀랄 날이 올 것을 고대하며 여러 모양으로 부르짖는다. 그 때 자연과 피조세계 자체가 변모하고 변화하는 광경은 참으로 굉장할 것이다. 그것은 장엄한 종말이 될 것이다. 위대한 신생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그의 백성이 되어 그의 얼굴이 발하는 햇살을 받으며 영원토록 즐거워할 것이다. 이것이 부활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지금 시련과 곤란과 환난을 겪고 있는가? 모든 것이 여러분을 대적하며 절망으로 몰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그리스도는 살아나셨는가? 세상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우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오늘도 하나님의 주시는 복음의 내용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빼곡하게 살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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