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주님은 우리 대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시고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채우고자 오셨다. 단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순종하시면 되는 것이 이상이였다. 우리가 받을 율법의 형벌도 담당하셔야 했다. 우리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수동적으로 순종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의 몸이 찢기고 피가 흘렀다. 이처럼 그는 반드시 들려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일이 없으면 우리의 구원도 없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일어난 이 일이 없으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도 없고 인간 사이에 화목도 있을 수 없다. 감사하게 이 일의 결과 우리에게 죄 사함과 용서뿐 아니라 생명까지 주셨다.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 생명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거듭남에 있어서 사람이 가진 뛰어난 재능과 이해력은 오히려 매우 위험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왜 그럴까? 사람들이 그것을 의지한다는 점에서 실제 큰 방해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명을 얻는 일에 종교나 도덕이 아무 가치가 없다. 오직 거듭나야 하며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 더 나아가 주님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 라고 말씀하신 것이 신약 성경의 중대한 메시지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인 것을 점검해 보았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사실을 믿는데 그치지 않고 새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자녀로서 인격적으로 성삼위 하나님을 알아가며 교통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종의 영에서 풀려나는데서 더 나아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이는 양자의 영이신 성령이 그리스도인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라고 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로이드 죤스 목사의 요한복음 3장 강해를 인용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이 확신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성령은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신다
이것이 바로 구원과 거듭남에 대한 확신이다. 단순히 구원받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음을 알게 된다. 사도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했다. 우리 자신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1)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영생을 누려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종의 영에 잡혀 있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은 이 확신의 교리를 믿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종의 영에 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고, 면죄부를 사며, 촛불을 밝힌다. 가톨릭과 그들의 모든 형식은 확신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이다. 항상 사제가 필요하고, 죽을 때도 사제가 필요하며, 연옥에서도 사제가 필요하다고 한다.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한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구원받은 것을 확신하고 알고 자신해야 한다.
2) 신약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언하신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롬 8:15-17). 기독교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서 벗어나 성령의 증거로 확증되는 큰 확신을 갖는 것이다. 이는 가장 높은 차원의 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심으로 얻는 확신은 우리 스스로 느끼는 확신이나 성경에서 추론해 내는 확신과 완전히 다르다. 성령이 친히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확신을 주신다.
3)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고 말씀한다(롬 5:5)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 우리 죄가 사함 받았다는 확신을 성령이 친히 우리에게 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 마음에 확신을 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큰 일은 하늘과 땅 어디에도 없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된다. 모든 의심이 흩어져 사라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애써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에 놀라게 된다.
2.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친히 확신을 주실까?
이 일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즉각성과 직접성에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거기서 하시는 말씀을 살펴보다가 확신을 얻는 경우가 많다.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7-18). 이처럼 참으로 믿는 자는 성경에서 확신을 얻는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구원을 인치고 보장하는 아들의 영, 양자의 영을 받는 경우가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해 주시는 경우다.
1) 성령님은 때로 성경의 한 단어를 통해서 이 일을 하심으로 확신을 주신다
환상을 볼 필요가 없다. 오히려 환상을 본 것처럼 느껴질 때 아주 조심해야 한다. 환상은 마귀가 위조할 수 있기 때문에 환상을 보거나 소리나 음성을 듣기를 바라면 안 된다. 이 구절의 의미는 성령께서 우리의 영에 어떤 감동(impression)을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영에 작용하시며,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시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영에 아주 확실하게 주시는 감동, 눈에 보이는 증거보다 더 강력한 감동이 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 이 일을 해주실 수 있다. 과거에 읽었던 말씀의 부분인데 마치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단어를 보는 것과 같이 그 단어가 내 속에 “아들아! 네 죄가 사함 받았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말씀해준다.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는 이 특권이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졌다. 이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온갖 은사를 훨씬 뛰어넘는 은사이다. 이것이 최고의 확신이다. 이 확신에 다른 은사가 따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산 증인으로 만들어 주는 이 확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그의 은혜를 증거할 힘을 주는 확신 그 자체이다.
2) 애매모호한 행복감을 뛰어넘는 확신을 주신다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나 그 밖의 경우에 애매모호한 행복감을 느껴본 이들이 많다. 그것도 괜찮다. 하나님은 종종 그런 행복감을 주신다. 또한 어느 정도의 행복감은 마귀도 위조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은 모호한 행복감을 뛰어넘는다. 하나님께서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사랑을 알려 주시는 특별한 것이다. 일반적이거나 모호하지 않은 구체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가 그의 자녀임을 친히 알려주시는 것이다. 언어는 그런 일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찬송가 85장의 가사처럼 “주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발견하는 사실은 그 경험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저 “하나님이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긍휼로 그 사랑을 내게 주시길 기뻐하셨다”고 겸손히 증언할 수밖에 없다. “성령의 인치심”(엡 1:13)이란 말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임을 확신시키기 위해 성령이 이 일을 해주신다. 단지 종교인은 이 영역에 이르지 못하며 이 영역을 알지도 못한다. 종교인은 이런 일에 관심을 갖지만 실제적이고 본질적인 영광을 얻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이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애쓰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애쓰고, 또한 되었다고 믿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종교인의 상태가 니고데모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인은 이 일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영적인 영역의 실재와 경험을 전혀 모른 채 늘 도덕과 행위의 영역에 머물며, 자기 의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시는 세상 최고의 축복을 놓친다.
3. 이 확신의 결과는 무엇인가?
1) 기쁨의 영이다
복되신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자원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우리가 이 축복을 마음껏 누리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 대신에 고난당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주신 축복을 누리는 것이다. 고난당하신 주님을 불쌍히 여길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값을 치르고 사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라. 이것들은 우리가 거듭나 새 생명을 받았으며 성령으로 태어났다는 절대적인 증거라는 점에서 아주 귀중한 시금석이 된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기쁨의 영이 전체에 흐르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라고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쓰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본도, 갑바도기나, 아시와아 비두나에 흩어진 나그네“(1절)라고 불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그들에게 ”나는 너희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예수를 기뻐하고 있음을 안다“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란 사람의 기쁨에 천국의 영광이 살짝 닿았다“는 의미로서, 이것은 영광 가운데 있는 복된 영이 특권적으로 누리는 기쁨이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에 부어진데서 비롯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기쁨을 이야기한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빌 3:1)하며, 4장 4절에서 다시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한다. 이처럼 기쁨이 신약성경의 핵심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 요한은 노년에 쓴 마지막 편지에서 편지를 쓰는 이유에 대해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4)라고 밝힌다. 주님이 왜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시기 위해서인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나타나는 주된 효과는 비참해지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런 경험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신앙이 자신을 불행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이 보인다. 그래서 항상 크게 희생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는 이 기쁨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그의 기쁨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충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
(1) 세상과 마귀가 위조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린다
종교가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다. 종교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종교와 기독교를 구분하는 좋은 방법 한 가지가 이것이다. 종교는 항상 과업과 부담이 된다. 하나님을 알수록 두려워진다. 종교는 항상 우리를 침체시키며 불행하게 만든다.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종교, 우리를 사제의 지배 아래 두어 억누르며 잘못된 의미에서 비겁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종교로 돌아가지 않도록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마틴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를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노래하기 시작했고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신약이 말하는 기독교는 이런 것이다. 기쁘지 않은 것은 기독교가 아니며 종교에 불과하다. 참 기쁨을 뻬앗아 가는 비참하고 불행한 종교에 불과하다. 이로 인하여 감사드리자.
(2) 이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핵심에서 나오는 기쁨이다
성령으로 태어나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3-5).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6-7절). 이 얼마나 놀라운 조합인가? 바울 사도도 동일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바울 사도는 덧붙여 말씀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3-5절). 환난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할 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환난의 가치를 안다. 환난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기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그리스도인이 과거의 회심만 추억하며 그런 이야기만 한다면 이것은 매우 비성경적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라고 발전하며 놀라워져야 한다. 사람들은 처음 느꼈던 기쁨을 다시 느끼기를 원하지만, 지금의 기쁨이 처음 믿었을 때의 기쁨보다 크지 않다면 근본적으로 어딘가 잘못된 것이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는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당연히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즐거움, 하나님의 자녀가 느끼는 기쁨은 결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참 기쁨과 위조된 기쁨의 큰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조작 가능한 인위적인 기쁨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공적인 모임에서 종종 기쁨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심리학자들이 찬송이나 합창이나 다른 여러 형태의 조작을 통해 흥분을 일으킨다. 그럴 때 사람들은 스스로 기쁨이 충만하다고 착각한다.
(3) 이 기쁨은 거짓된 기쁨이 아니라 참 기쁨이다
거짓 기쁨은 어려움에 이르는 순간에 사라져 버린다. 거짓 기쁨은 좋을 때만 다가오는 친구와 같다. 환난이 오고 시련이 닥치면 완전히 낙담해서 기쁨도 잃고 행복감도 잃어버린 채 하나님이 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다며 원망하고 불평한다. 그것은 거짓 기쁨이다. 참 기쁨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기쁨으로 환난 중에도, 환난의 한복판에서도, 환난의 심연에서도 환난의 절정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주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기쁨은 어떤 상황, 어떤 형편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귀한 시금석이다. 모든 것이 자신을 대적함을 아는데도 여전히 그 안에 기쁨의 영이 있다. 물론 그 기쁨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점증하는 시금석이 바로 이것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잘아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빌 3:3).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사랑한다. 바울도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다(갈 6:14). 참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기뻐하기에 상황이 어찌되든지 얼마나 큰 환난이 닥치든지 상관없이 계속 기뻐한다. 그것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참 기쁨이다.
2) 이에 따라오는 것은 찬양과 감사이다
찬양과 감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특징이었다. 이것으로 자신을 검증해 보아야 한다. 이런 찬양과 감사는 위조할 수 없다. 찬양과 감사는 단순히 좋아하는 찬송을 부르거나 곡조에 매혹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 찬양과 감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도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충만히 누리지는 못했다. 사도 요한이 말씀하듯이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셔서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7:38-39). 시편 기자 다윗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나이다”(시 4:7)라고 했다. 신약 시대 오순절 이후로 넘어오면 그 기쁨이 솟아나 충만히 넘치는 것을 본다.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가 바로 이 기쁨의 분위기였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41절). 그 당시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동료 유대인에게 박해를 받고 가족에게 배척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상황을 보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2-47절). 기독교는 이런 것이다. 감사에 넘쳐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1) 때로는 잠시 기쁨이 무뎌지는 것 같을 때가 있을 수 있지만 곧 회복된다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으며 그의 약속과 큰 구원을 믿음으로 환난 중에도 기뻐하지만 너무 짓눌려 잠시 기쁨이 무뎌지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의 깊은 곳에는 기쁨이 조용히 고여 있다. 분석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기쁨이 있다는 것을 자신이 잘 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심을 알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기에, 지금 그가 하시는 일이 잘 이해되지 않더라도 여전히 그를 신뢰하고 사랑하며 그의 손에 자신을 맡긴다. 밝은 곳을 찾아가기보다 하나님의 어두운 손안에 머물려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만 아는 일이다. 그에게는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신뢰가 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권면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바울 사도는 감옥에서 그렇게 말한다: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0-13절). 바로 이것이다. 사도는 감옥에서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괜찮다는 것만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다.
(2) 그러기에 감사는 계속된다
교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서신 시작부터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벧전 1:3). 신약의 서신들은 도입부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높이는 찬양과 감사로 시작된다. 왜 감사했을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을 아는 자들이다. 그의 죄는 사함 받았다. 왜 사함 받았는가? 선한 삶을 살거나 종교적 의무를 다했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고 구제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은 종교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와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주시고 수치와 고난과 고통을 겪으심으로 우리 자신을 사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사실, 그래서 자신이 지금 이런 모습이 되었다는 사실, 죄 사함과 새 생명을 비롯한 모든 것을 그분께 받았다는 사실을 안다. 이것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감사하지 않는 믿음은 가치가 없다. 순전히 지적인 동의에 불과하다. 사람이 친절을 베풀어도 어떻게든 감사를 표하려 든다. 편지를 쓰거나 찾아가 만나서 감사를 표현한다. 만날 때마다 그가 베풀어 준 친절에 감사하는 말을 쏟아낸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해주셨는가를 보라! 우리의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생각하거나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면 감사와 찬양과 경배와 흠모의 말을 쏟아낸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종교인은 이런 감사를 전혀 모른다. 모든 것이 흐릿하고 어두울 뿐이다. 힘을 주시고 죄를 사해 주시길 기도할 뿐, 감사하지 않는다. 감사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나아가며]
그러므로 생명의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이런 감사와 기쁨 뒤에 평안이 뒤 따른다. 그의 영혼은 깊은 평안을 느낀다. 그리스도인이 쉴 수 있는 마음,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벗어나 쉴 수 있는 마음이 있다. 주님을 의지하며 그 안에서 쉬는 자는 “여호와를 의지하고 잠잠히 참아 기다리라”(시 37:7)는 말씀이 실생활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진리를 본능적이며 직관적으로 안다. 이것은 오직 자녀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불쌍한 종교인은 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생명의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죄와 수치와 시련과 환난의 세상에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복된 것을 누리며 산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마다 이런 확신으로 인한 감사와 기쁨과 감격과 평안이 날마다 더욱 넘치기를 축복한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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