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일 말함을 들으라

하늘의 일 말함을 들으라

이윤석 목사 0 06.03 21:44

[들어가며]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우리 자신이 참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려면, 자신이 새롭게 출생한 그리스도인의 특징들을 알아야 한다. 바울 사도는 우리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권면한다(고후 13:5).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닌데도 그리스도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듭남은 반드시 그 끼치는 영향과 결과가 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도 여기에서 혼란에 빠져 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 그가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를 가로막는 중대한 장애물이 그를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 위에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2:7)이 주어졌고,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3:8)이 주어져 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3:19) 충만해질 수 있다고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과연 이 충만함을 받으며 그에 따른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니고데모를 넘어뜨린 바로 이 방해물이 주된 원인이 우리에게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충만함과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는 대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하늘의 일을 사모해야 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로이드 존스의 강해를 참조하여 하늘의 일을 가로막는 장애적인 요소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지적인 교만이 최고의 방애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생명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지적인 교만과 우리 머리로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심지어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이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 다니며 괴롭히는 문제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하나의 원인도 이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3:3)고 책망한다. 이런 문제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뒤를 따라 다닌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도 인간의 공로와 능력과 이해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늘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충만함과 은혜 위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최고의 방해물이다.

주님은 새 출생에 대해 가르치면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고 하셨다.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의 능력이나 기질이나 힘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한다.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는 이런 질문, 바로 여기에 우리의 어려움이 있다.

 

1) 사람들은 다 이해하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성경의 말씀을 들으며 혼란을 느끼며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해하기를 원한다. 마땅히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잘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창세기 3장은 그것이 바로 최초의 죄, 곧 원죄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 싶어 했고, 마귀는 바로 그 방향에서 인간을 유혹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와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그 말을 믿지 마라고 했다. “이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어 다 이해하게 된다니까라고 했다. 인간이 원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완전히 이해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바로 그것이다.

 

2) 그래서 그 다음에는 이해할 수 없으면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본주의자를 비롯한 비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입장이며 주장이다. “이해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이런 입장을 취하는 자들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일관성이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전기를 다 이해하는가? 결코 그렇지 못하다. 가장 훌륭한 과학자들도 전기를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잘 사용한다. 이해하지 못함에도 기꺼이 사용한다. 전기 자체는 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 영향과 결과는 기꺼이 활용한다. 만일 태도의 일관성을 지키려면 전기도 이해하지 못하니 사용하지 말아야 할까? 그래서 불신앙과 죄는 일관성이 부족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3) 이런 태도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까지 들어오기 쉽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진리를 자기 이해의 수준에 맞추어 제한하고는 단계로 연결된다. 어떤 교인들은 자기가 복음을 믿는다고 말하며 자기의 한계에 맞추어 복음의 의미를 제한하기 쉽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회가 가장 큰 죄를 짓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무한하고 영광스럽고 영원한 복음을 우리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축소해 왔다. 그렇게 축소하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 우리 자신이 진리를 정의하고 그 경계를 정함으로 축소하기도 한다. 결국 성경의 권위를 밀어내고 계시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면서 자기가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는 진리만 진리라고 말하는 자는 바로 이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성경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다. 자신이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계시의 말씀은 더 이상 권위를 갖지 못한다. 무엇이 권위를 갖는가? 인간의 이해와 철학이 권위를 갖는다. 그러니 그가 가진 복음은 인간의 정신과 이해 정도의 수준에 맞추어 제한된다.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사건은 내던져 버린다. “과학적인 현대인은 이런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런 것을 제외시켜 버린다. 복음의 영광이 제한되고 격하되며 협소해지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충만함과 은혜 위에 은혜를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4) 자기만족이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무엇인가? 회심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결단하고 영접한 것이 고작일 때가 너무 많다. 오직 그것만 의지한다. 물론 자기 의무를 다한다. 교회의 사역을 열심히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이다. 자기만족을 느끼며 그것이 기독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기독교인가? 하나님의 충만함과 은혜를 받고 마침내 하나님 자신의 충만하신 것을 알기까지 그 은혜가 자라는 것을 경험해 보았는가? 복음을 왜소한 것, 말뿐인 것, 처리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탓에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가능성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5) 여전이 우리가 복음을 우리가 파악하는 수준으로 제한한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이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경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작은 경험을 기준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위험에 빠져 있다. 그들은 성령과 그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성경의 가르침까지 제한하려 든다. 자기 이해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해석해 버린다.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버린다. 상식적인 일 이상은 절대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규탄하는 큰 위험한 행동이다.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주신 메시지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6) 그러나 주님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

마태복음 11장에 주님은 기도하며 말씀하신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11:25-26). 이것은 영원히 불변하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난 이해가 안 되는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라고 한다. 지적인 거인이었던 사도 바울이 이 점을 지적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강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6-27). 고린도전서 214절에서도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이해가 안 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의 가능성을 억제하고 제한해버린다.

 

2. 인간의 지혜를 신뢰하며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는 것은 무익하며 어리석다


주님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믿을 수 있겠느냐?)(3:10, 12)”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는 질문을 하며 나는 이해되지 않으면 믿지 않겠어라고 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취한다. 이런 어리석은 인간에게는 화가 있을 뿐이다. 이 어리석음 때문에 오늘날 세상이 이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어리석음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며, 그의 가르침과 다스리심을 거부한다. 이것은 인간이 처음 불순종하여 타락한 결과 빚어진 혼돈의 반복일 뿐이다.

 

1) 인간은 땅의 일조차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이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바람의 예를 들면서 말씀하신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다. 당황하는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이 일은 마치 바람이 부는 것과 같다. 너희는 바람 소리를 듣지만 바람 자체는 보지 못한다. 바람을 이해하지 못하며 바람이 부는 법칙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소리는 듣는다. 빨래가 펄럭이는 것도 보고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도 본다. 바람이 끼치는 영향을 보는 것이다. 바람이 어떻게 부는지, 어떻게 생기는지 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렇게 징후를 보는데 만족하며 바람을 활용한다. 내가 말하는 이 일도 그와 같다. 신비한 면이 있지만 그 영향과 결과는 볼 수 있다라고 설명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이해하지 못하고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물었다. 그때 주님이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은 세상의 삶과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복음의 작용이나 가시적인 것조차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2) 이것은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된 내용이다

그래서 주님은 너는 유대인의 선생으로서 마땅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선지서를 읽어보지 않았느냐? 선지자들은 새 시대가 오면 저는 자가 사슴처럼 뛰고, 눈먼 자가 앞을 보며, 귀머거리가 들을 것이라고 했다. 성령이 부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선지자의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을 모른단 말이냐? 이것은 네가 읽는 성경에 다 나오는 일이다. 너는 유대인으로서 마땅히 이 일을 준비했어야 한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너는 나를 보았다. 기적을 행하는 능력도 보았다. 내 가르침을 듣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내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임을 확신했다. 그런데도 왜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냐? 왜 너 자신의 논리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냐? 왜 아직도 당황하는 것이냐?”

 

3) 기독교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성도들이 세상에 살면서 일어난 놀라운 일들과 그들이 행한 경이로운 일들이 역사상 분명히 일어난 일이지만, 그 모두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아무리 지혜로운 자들도 이해하지 못한다. 현대인들은 이것을 이해해 보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심리학은 처음부터 분석을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해 보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설명해 보려고 했지만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완전히 부적절한 접근법이다. 사도 바울은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라고 지적한다. 이 말은 거듭난 그리스도인 안에 성령이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이해할 지각이 잇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모든 비그리스도인의 문제거리이다. 사람들이 전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하나님의 생명이 안에 들어왔는데 전과 똑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낯선 존재가 된다. 차이가 생기고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하며 의아해 한다. 그리스도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을 보지만 달라진 모습을 본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땅의 일 조차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이 처한 상황이다. 우리의 비극은 이런 태도를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까지 끌고 들어오기 쉽다는 것이다. 완전히 이해되지 않으면 기꺼이 믿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은혜의 가능성을 제한단다.

 

3. 하늘의 일


주님께서 니고데모야 이 일을 이해하려 들지 말라. 내가 네 수준으로 낮추어 인간의 예와 땅의 예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땅의 일이 아닌 다른 일, 내가 주는 큰 구원의 상한선과 범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어찌 이해하려 드느냐? .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시도인지 깨닫고 그만두어라라고 말씀하신 셈이다. 그 하늘의 일이 무엇인가?

 

1) 삼위로 계시며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 복되신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최대한 생각해보라. 이 주제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단순히 친절하고 선량하고 도덕적인 사람, 분명한 죄인보다 조금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의 정치 현안에 대해 견해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부 땅의 일이다. 기독교의 내용, 실제 토대, 실제 핵심은 하늘의 일에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알려주는 것이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영생의 정의는 무엇인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이다. 기독교는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믿고는 것, 작고 멋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가 종교와 도덕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은 성부, 성자, 성령을 아는데 있다.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역으로 들어가는 데 있다. 아직도 이런 일을 머리로 이해하려 드는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삼위로 계신 한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가 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자기 자신이나 주변 현상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유한하고 왜소한 인간으로서 감히 아무도 모방할 수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측량하려 드는 것은 아닌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노라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이 영역에 그런 말을 끌어들일 만큼 무모한 것은 아닌가? 이것은 하늘의 일이다.

 

2) 하나님의 영광과 천국의 영광이다

이사야는 아주 훌륭하고 능력 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중대한 임무와 사명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 보았을 때 어떻게 되었는지 알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문지방 터가 흔들리고 연기가 성전을 가득 채웠다. 그것을 본 이사야는 큰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하나님을 직접 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반응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6:5)라고 외쳤다. 그는 대체 이것이 어찌된 것이지? 대체 무슨 현상이 일어난 것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과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무모하지 않았다. 그가 본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그는 땅바닥 위에, 흙바닥 위에 엎드렸다.

 

4. 적용해보자


1) 기독교는 모든 설명과 통제가 가능하도록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여러분은 이 하늘의 일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우리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하늘의 영역으로 끌려 올라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소를 지으시며 우리를 사용하실 것이고, 온 세상은 다시금 큰 부흥으로 진동할 것이다.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을 때의 설명(고후 12:1-3)에는 인간의 이해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사도는 이 일을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묻지 않았다. 그저 그 일이 일어났고 사도는 그 자리에 있었다. 하늘에 끌려 올라갔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3-5).

 

2) 이는 하늘의 일을 잠간 엿보는 경험이다

우리는 하늘의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 우리는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는가? 기독교가 여러분이 만든 작은 체계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이 위대한 사도의 특별한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이해를 완전히 뛰어넘는 영역으로 끌려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요한 계시록의 말씀을 들어보라(4:1-8)! 기독교는 이런 것이다. 하늘의 일을 아는 것,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를 깨닫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자?”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며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그런 영역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어, 나는 그런 것이 두려워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 짓인지 모른다.

 

5. 구원에 대한 이해도 동일하다


1) 작고 하찮은 인간의 이해를 내려놓으라.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신 말씀을 들으라. 땅의 일도 이해할 수 없는데 하늘의 일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구속의 전체적인 설계와 계획과 목적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이해할 수 없다. 누구인들 그 영광스럽고 놀라운 설계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사도 베드로는 인간뿐 아니라 천사도 구속의 계획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0-12)”

사도 바울도 구원은 하나님의 큰 계획으로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3:10)“ 하신다고 말한다. 천사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구원은 영원하시고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일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목적하시는 일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해가 안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나는 이해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겠어라고 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자 영원토록 애쓰는 것이 곧 지옥이다.

 

2)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영원한 영광과 축복을 스스로 차단하지 말라.

혹시 주님의 위격도 이해하려 들 만큼 어리석은 것은 아닌가?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우리가 하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하늘에 올라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니고데모 앞에 계신 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자신의 두뇌를 의지하는 자는 비참해지게 되어 있다. 그런 자는 항상 비참했고, 영원히 비참할 것이다. 여러분은 거듭나야 한다.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이 일을 깨달아야 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상에 오셨다. 그는 인간이 동시에 하나님이신 분이다. 두 분이 아닌 한 분이다. 한 인격 안에 두 본성을 가지신 분이다.


3) 세상의 미래는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

이런 일을 이해하고자 아직도 애쓰고 있는가? 이것은 하늘의 일이다. 영광스러운 구원의 복음이요 이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다. 세상의 미래가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세상의 미래는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3:156). 성육신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사람으로 태어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하늘에 계셨으며 또한 땅에 계셨다. 그는 한 인격 안에 섞이지 않는 두 본성을 가지신 신인이시다. 여기에 복음 핵심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생명다운 생명을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이것이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는 우리의 모든 어리석은 질문과 발언에 대한 대답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한없는 존귀를 받으소서! 나뉘지 않은 세분이자 신비한 한 분이시여! 이성과 이성의 능력이 무너진 곳에서 믿음이 이기고 사랑은 흠모하도다“(찬송시인 Isaac Watts). 참 그리스도인은 이런 것을 경험한다. 이 일에 하늘의 특징이 있다는 것, 자신을 인간 성취의 발치에서 인간 너머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주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대면한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요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딤전 3:16).

 

4) 우리는 오직 이분만, 철저히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현대의 지식과 이해를 의지하는 한, 그것이 발전하여 궁극적인 진리를 아는 위대한 지식을 얻게 되리라고 희망하는 한, 아무도 하늘에 올라갈 수 없다. 인간의 지식을 의지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이다. 자기 힘으로 하늘에 올라갈 자는 아무도 없다. 인간은 하늘에 올라가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오직 우리는 주님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왜 그런가? 우리의 관심이 하늘의 일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고, 본 적도 없고 가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여기 하늘에서 친히 오신 분이 계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3:11). 예수님은 철학자나 사색가나 진리의 추구자나 탐색자도 아니며, 또한 과학 실험에 참여하신 적도 없으시다.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일 4:12).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추측한다. ‘존재의 최고봉이요, ‘절대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말에는 아무 뜻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고 볼 수도 없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또한 하나님을 보고도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 분은 본 것을 증언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영원하신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부의 품속에서 나와서 하나님을 나타내신 분이다(1:18). 하나님의 얼굴과 눈을 직접 들여다보신 분이시다. 증인이시며 하늘에서 오신 분이시다. 하늘에 이르려 애쓰는 분이 아니다. 하늘에서 직접 내려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알려 주시는 분, 우리를 세상에서 이끌어 내서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나아가며]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의 증언과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는 우리가 거듭나야 한다고 하신다. 거듭날 수 있다고 하신다. 그는 이 일을 가능케 하려고 오셨다.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고 우리 눈을 가린 죄를 없애려고 오셨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려고,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오셨다.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이 하시는 일은 이 지각과 지식과 깨달음과 경험을 주시는 것이며, 하늘의 일이 속한 영역으로 우리를 끌어올려 더 많이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이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사도 바울처럼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해 주시기를 간구하자. 무엇을 위해서인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충만해지기 위해 강건해지기를 구했다(3:16-19). 여러분은 하늘의 일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늘과 교통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는가? 무릎 꿇고 기도할 때 혼잣말을 하는가? 하나님께 말씀드리는가? 하늘의 일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성도들이여! 이 은혜의 삶, 성령 안에 있는 삶의 가능성을 알기만 한다면 우리 자신 뿐 아니라 교회의 위치 전체가 달라질 것이다. 하나님의 복주심이 우리를 통해 죄와 악의 무지와 어둠 속에서 죽어가는 멸망의 무리에게로 퍼져 나가게 될 것이다. 이 일에 쓰임을 받는 성도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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