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우리는 지금 종교와 기독교 신앙을 혼동했던 요한복음 3장 전반부에서 니고데모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거듭난 사람이라고 해서 거듭난 증거를 충분히 이해하고 충분히 나타내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계속해서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3:9)라고 물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거듭남이 정의상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신성한 영역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질문 전에 주님은 8절에서 이것을 완벽하게 요약해 주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거듭남은 신비로운 성령님의 역사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거듭남이야말로 가장 이치에 적합한 일이다. 여기서 이치는 사람의 이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치에 맞는다는 말이다. 교회 역사에서 어느 시대에나 종교는 기독교 진리와 신앙에 대하여 가장 큰 원수가 되어 왔다. 기독교회에 종교가 침투하여 확장될 때, 교회는 단순한 종교의 한 형태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사도 바울은 한 때 기독 신앙을 철저히 반대하던 사람이었다. 교회를 박해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모독자로 취급하며 기독교회를 없애고자 전력을 다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바울이 순전히 종교에 독실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충분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런 열심을 기뻐하신다고 확신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양심을 따라”(행 23:1) 행동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종교와 종교를 의지하는 태도는 참된 신앙과 참된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매우 해로운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참된 생명의 특징을 살펴왔다. 생명은 항상 드러나기 때문에 그 특징으로 자신을 검증해보면 종교와 참 신앙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은 베드로 사도의 말처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이며, 요한의 표현대로 “씨”(요일 3:9), 생명의 씨, 신성한 생명의 일부를 가진 자이다. 이제 바울은 전에 유익하게 여기며, 의지할 뿐 아니라 자랑하던 것들이 있었는데 전부 쓸모없는 쓰레기임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빌 3:7-8). 계속해서 새 생명을 가진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살며보자. 새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싶은 열망이 점점 커진다.
1.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과연 참되게 아는 것인가?
1)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싶은 열망이 생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실을 알고 싶은 열망과 하나님 자신을 알고 싶은 열망을 구분하고자 한다. 참 기독교와 종교만 다른 것이 아니라, 참 기독교와 철학도 다르다. 철학은 어느 시대에나 기독 신앙의 큰 원수가 되어 왔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아예 저주거리가 되고 있다. 많은 종교 서적이 대담하고 특별한 내용으로 큰 인가를 누리며 홍보되는데, 그들의 문제점은 지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에서만 하나님께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성경과는 정반대가 된다. 그들은 ‘절대자’, ‘원인 없는 원인’, ‘궁극적 실재’, ‘존재 기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처럼 늘 비인격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적인 핵심은 인격적인데 있다.
2) 내적인 지식을 강조한다
우리는 종종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기 쉽다. 철학자들도 종종 그렇게 치우친다. 수년간 머리로 이해해 보려고 애쓰다가 실패하면, 갑자기 전부 내려놓고 이른 바 신비주의로 돌아선다. 예를 들어 지성을 팽개치고 내적인 체험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자기 밖에서 신을 찾으려고 했다면, 이제는 자신의 내부에서 신을 찾으려 한다. 많은 지식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외적인 접근의 무익함을 깨닫고 주관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방향으로 돌아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인 것을 강조하는 태도는 옳은 것이다. 참되게 내적인 태도를 지향하는 이들은 성경 인물들의 이야기와 교회성도들의 생애에서 이런 점들을 연구하고 알아낸다. 그들에게 체험적이고 내적인 무엇인가가 있음을 알아차린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적이고 객관적이며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관심이 아닌 하나님을 아는 내적인 지식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참된 기독 신앙은 늘 내적이고 활기차며 경험적이다. 단순히 객관적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2. 거듭나면 하나님을 아는 그 열망이 무엇보다 중요한 목표가 된다
1) 그것이 종교보다 더 중요해진다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런 내용이다. 니고데모는 종교적 배경에서 종교적 훈련을 받은 독실한 종교인으로 주님을 찾아왔다. 그는 유대교의 성전과 성전 예배, 번제와 희생제사, 의식과 의례를 비롯한 모든 배경을 두루 갖춘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들이 다 쓸데없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종교적 관심에 의존하기가 매우 쉽다. 종교적 활동과 의무에 의존하기는 더더욱 쉽다. 우리는 니고데모에게서 그것을 보며, 주님을 만나기 전의 사도 바울에게서도 동일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빌립보서 3장에 의하면, 그는 참으로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해 살았고 마음과 뜻을 다해 전력을 쏟았다. 그는 종교적 관심과 활동과 여러 가지 의무에 기대어 살았다.
2) 잘못된 교회의 모습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교회는 조직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대한 기관으로 전락하기 쉽다. 교회는 교인들이 할 일을 정확히 알려주고 거대한 체계의 일원으로 참여시킨다. 어떤 의미에서 인생 전체의 계획을 세워준다. 무엇을 읽어야 할지, 사순절을 비롯한 절기에는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할지, 어떻게 죄를 고백해야 할지를 알려준다. 그래서 그런 종교 체계 및 조직의 일원으로 만들어 간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다 외적인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기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진심으로 믿으며, 그런 행위를 의지할 때가 많다. 그들은 종교적 관심과 활동의 의무를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실상을 파악하게 된다. 종교의 실상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로마서 12장은 우리에게 최소한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 조직과 지금 다루는 제도중심의 종교 체계는 다른 것이다. 기독교는 모든 것을 단순화시킨다. 모든 위대한 종교개혁과 부흥운동은 언제나 아주 단순하게 일어나 신자들을 신약성경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주님은 아무데서나 설교하셨고, 그때마다 성령의 기름부음과 능력이 임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참 기독교가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종교보다 하나님을 아는 내적인 지식을 앞세운다.
3) 신학과 교리는 알지만 이 지식이 앞선다
어떤 분들은 신학자가 되어 교리 서적을 읽는다. 물론 목회자는 신학적이고 교리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거듭나지 않고도 신학과 교리에 관심을 쏟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학과 교리는 훌륭한 체계이다. 종교가 실천적인 차원에 속한 것이라면 신학과 교리는 지적인 차원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신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며 함께 모여 결정적이고 미묘한 논점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거듭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신학 지식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모든 지식과 이해의 목적과 역할은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으로 이끄는 것이다. 우리가 신학 지식을 쌓는 목적은 단순히 논쟁을 하려는 데 있지 않다. 영적인 영역에서 그런 사람은 무한히 더 어리석다. 거듭난 자는 모든 지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이 지식이 이론에 그치면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한다. 이런 결론에 이르지 않는 자는 거듭나지 못한 자이다.
4) 체험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더 간절히 열망한다
나아가 거듭난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체험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을 더욱 간절히 열망한다. 거듭난 자는 ‘진리와 성령으로’ 태어나 신성한 씨를 가진 자이기 때문에 이 지식을 열망한다. 새로운 생명을 드러나게 되어 있다. 계속 드러냄으로 생명이 아닌 것들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하여 가장 멋진 점은 이 삶이 축복으로 이어지며 체험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인인데 체험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이런 축복과 체험 자체에 더 큰 관심을 가질 위험이 있다. 선물을 주시는 분보다 선물 자체에 더 큰 관심을 가질 위험이 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하면서도 미묘한 일이다. 마귀는 우리를 그 수준에 붙잡아 두려고 한다. 이 축복과 체험 때문에 사이비 종교가 성공하는 것이다. 그들도 비슷한 결과물들을 만들어 낸다. 마귀는 이 무기를 손에 쥐고 기독교가 하는 일을 똑같이 흉내 내는 것이다. 기독교 용어를 사용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축복과 은사의 차원에서만 관심을 붙들어 매며 그것만 추구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생명을 받은 자는 축복과 체험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순서를 뒤집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보다 축복과 체험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무엇인가? 아이 때는 상대방 자신보다 그가 주는 물건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그 나이 때의 판단을 믿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장성한 성인은 유년 시절 이후 사람에 대한 평가가 크게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도의 표현대로 ‘장성한 사람’(고전 13:11)이 되면 그 판단이 완전히 바뀐다. 유년 시절에는 재미와 웃음을 주며 선물을 주는 사람들이 좋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그 사람들이 조언과 지식을 구하러 찾아가고 싶은 이들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그것을 깨닫게 된다. 문제의 원인은 자기가 받는 혜택이나 재미나 선물이나 체험에 따라 판단하기 쉬운 아이의 특징에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성품과 인격의 가치를 판단하기 시작한다.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인격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성숙의 표지이다. 여러분의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아이는 훈련과 질서와 단호한 것과 이해가 필요한 것을 싫어한다. 선물이 따르고 재미있고 즐거운 차원에 머물고 싶어 한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 훈련에 도움이 되는 이들을 귀하게 여긴다.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바로 그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을 영적인 영역으로 옮겨서 생각해보라.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보다 하나님 자신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이야말로 생명과 성장의 표지이다. 욥은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13:15)라고 고백한다. 거듭난 자는 결국 이 일 외에 중요한 일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새 본성, 새 생명, 아버지를 간절히 찾는 새 갈망이 인생 최고의 목표가 된다.
5) 구원의 주된 목표를 깨닫는다
거듭난 자는 실제로 하나님을 깊이 아는 이것이 구원의 주된 목표라는 것을 깨닫는다. 예수님은 제사장적 기도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기도하신다. 주님은 영생의 정의를 내려주신다. 거듭난 자는 바로 이 영생을 얻은 자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영생은 단순히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여기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안다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이고 인격적이며 직접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다. 주님은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17:25)라고 하셨다. 본문에서도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13절)라고 하시고,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1-12절) 하셨다. 이것이 지식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지식은 단순히 대상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책과 성경에서도 얻을 수 있고 자연과 피조 세계에서도 얻을 수 있다. 철학자들은 이런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데 평생을 바친다. 그런 논쟁이 아무 가치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는 그 생명을 주어 구원해 주신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 자신을 인격적으로 알게 하시려는데 있음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6) 외적인 신앙이 아니라 참 예배를 하나님께 드린다
종교인은 외적이고 형식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과 뜻을 다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리지만, 아무 감흥이 없을 수 있다. 이것은 참 예배가 아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교제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의 임재하심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앞선 성도들의 생애를 보면 이런 일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기도의 확신으로 유명한 조지 뮐러(Gorge Muller)가 그러했다. 그는 기도할 때 첫 번째로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간구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의 임재부터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깨달을까?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 하나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계시며 자신의 말을 듣고 계신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일에 관심을 갖는 자는 거듭난 자 뿐이다. 거듭나지 못한 자는 무릎을 꿇고 몇 마디 기도하거나 약간의 성경을 읽는 것으로 만족하며, “아 나는 그리스도인이야”라고 말한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통한다는 것을 지금 인지하고 있는가?
7) 성경의 하나님과 교제한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창 5:24)은 단지 경건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라고 칭함을 받았다는 것(약 2:23)도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구에게 말하듯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형을 피해 도망치던 야곱이 피곤하고 지쳐 쓰러져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다루기 시작하셨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달은 야곱의 고백을 들어보라: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 그는 자신이 하나님과 교제했음을 알았고 그 체험을 결코 잊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야곱은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많이 했지만 그때마다 첫 체험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인생의 결정적인 전기요 중심 사건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형을 대면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때에도 다른 무엇보다 브니엘에서 만난 하나님이 다시 평안을 보장해 주실지 알기 위해 밤새 씨름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우리도 이런 체험이 필요하다. 모세도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고 인격적으로 다루신 첫 번째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체험을 하였다. 나중에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나님께서 우상숭배 했던 백성을 벌하시고 “사자를 너보다 앞서서 보내겠다”(33:2)고 하셨을 때, 그는 주님이 친히 가지 않으시면 자신도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바로 이런 것이다. 천사의 인도를 받는 간접적이고 희미한 수준에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모세는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15절)라고 함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체험하기를 주장했다. 불쌍한 다윗은 친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반란을 피해 목숨을 구하고자 예루살렘에서 광야로 탈출해야 했다. 언제 죽을지, 언제 모든 것을 잃을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가 무엇이라고 기도하는가?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라고 신음했다.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2절). 그에게는 하나님과 만나는 성소의 체험이 있었다. 우리가 교회에 오는 이유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시편 84편의 표현처럼 다윗은 성소에게 “은혜와 영화”(11절)를 찾았다. 하나님의 집에서 그가 “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는 체험을 했고, 그 영광의 일부를 보았다. 다윗은 건물도 없고 예배의식도 없는 광야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성소에 계시듯이 광야에도 실제로 계심을 알았다. 그의 열망은 압살롬의 군대를 무찌를 힘을 주신다는 확신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지금도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싶어 했다. 이 최고의 체험은 모든 곳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이런 갈망이야말로 우리 영혼 안에 신성한 생명이 있다는 절대적인 증거이다. 사도 바울도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여”(빌 3:10)라고 고백한다.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설교해 온 사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정보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이방인의 사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말하는 지식은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온전히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가 알고자 했던 지식은 바로 이론적 지식이 아닌 경험적 지식, 마음의 지식, 내적인 지식이었다. 그의 큰 열망은 바로 이 지식을 얻는 것이었다. 그 속에 있는 생명이 이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생명은 생명을 찾게 되어 있다. 생명 아닌 것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열망이 새 생명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증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갈증을 느끼며, 직접적이며 즉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한다.
[나아가며]
거듭난 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알고자 갈망함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삶의 태도가 있다. 이미 주신 체험에 대해 감사를 드리며, 자기 삶에 주신 모든 축복과 은혜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그 모든 축복보다 더 갈망하는 것이 있다. 성령의 은사보다 더 갈망하는 중심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인격적이고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마귀는 지금이라도 당장에 체험과 은사를 비롯한 거의 모든 것을 위조할 수 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이 열망만큼은 위조할 수 없다. 신학에 대한 관심을 부추길 수 있다. 신학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광대한 지식을 자랑하는 마음도 커지게 마련이다. 아버지를 찾는 아이의 갈망, 친자식의 갈망과 열망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 열망은 마귀가 위조할 수 없다. 마귀는 이 열망에 대해 실제적으로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만들어 낼 수 없다. 이런 열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성령을 통해 살아있는 생명의 씨를 우리 안에 심으시는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참된 지식을 더욱 더 갈망하는 삶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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