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뿌리가 베어지고 잘라진 나무나 가공된 나무로 된 성탄절 츄리를 보라. 아름답게 장식되어진 크리스마스 츄리가 어떨 때는 훨씬 더 사람의 이목을 끌게 한다. 그것은 단지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사람들에게 보일 뿐 다시 창고 속으로 들어가거나 쓰레기통에 버려질 뿐이다. 그것은 마치 주님께 찾아온 니고데모처럼 생명이 없는 종교적인 것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원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사복음서가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사실은 지금의 시대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거듭나야만 한다. 이것은 새로운 생명이 들어옴으로 새로운 성향과 새로운 본질과 새로운 마음이 생기는 일이다. 새 창조가 일어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거듭난 지를 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거듭났는지 알아보아야만 한다.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는데도 그 생명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영혼 안에 들어오면 명백하게 나타나는 특징들이 있다. 지난번 메시지에서는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언급했다. 사도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요일 2:15-16)”라고 말씀한다. 거듭난 자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육신의 일을 생각하기보다 하나님의 영의 일을 생각(롬 8:5)하며 살아간다. 이제 더 적극적인 측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거듭난 자는 의를 사랑하여 의를 추구한다
이는 종교적인 것이거나 도덕적인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교회를 교회답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자신이 될 수 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성전을 자기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종교인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눈에 보이는 것에 치중함으로 종교적인 삶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기독교와 종교를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참된 기독 신앙, 곧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주시는 새 생명을 떠난 종교는 아무가치가 없다. 종교의 관심은 항상 도덕에 제한된다. 물론 우리는 도덕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도덕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문제이다. 종교는 무엇보다 행동에 관심은 갖는다. 종교는 사람의 외면을 보고 있다. 내면을 잘 보지 못한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눅 11:30)라고 말씀하신다. 도덕에 대한 최종적인 비판은 행동에만 관심을 가지고 사람의 됨됨이 보다는 행동을 중시한다는 데 있다. 이런 태도가 우리 신앙에는 없는가? 도덕적인 것만 지향하는 사람들의 겉치레나 겉모습은 그럴듯한데 속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도덕은 완전히 소극적인 것이다. 무엇인가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아주 잘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처럼 겉모습만 보는 것은 특정 잘못을 범하지 않는데 만 관심을 갖는 완전히 소극적인 태도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진리의 원수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영광스런 진리는 본질적으로 적극적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2. 거듭난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
주님은 이것을 팔복의 하나로 말씀하셨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마 5:6). “ 복 있는 사람은 이런 저런 일을 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은 거기에 관심이 있었다. 주님은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 23:23)라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적극적으로 의를 원하는 자이다. 바울 사도가 편지한 로마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던가? 교회에 들어온 거짓 가르침에 넘어가 율법적인 성향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이 안식일 같은 특정한 날을 지키는 문제, 고기를 먹어야 하는 문제와 같은 것으로 논쟁에 휘말렸다. 바울 사도가 그 문제를 다루며 결론적으로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라고 했다. 무엇인가를 먹고 마시는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으로 독실한 종교인이나 도덕적인 종교인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와 행동과 행위만 교정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은 적극적으로 거룩해지고 싶은 큰 열망과 갈망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3. 그러면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고 있음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을까?
1)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계명이 무겁지 않게 느껴진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1-3). 하나님의 계명을 대할 때에 주춤거리며 짜증스러워하며 편협하다고 느끼는가? 이것은 매우 좋지 않은 표지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계명은 무거운 것이다. 독실한 종교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계명을 무겁게 느낀다. 그래서 계명을 조정하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며 자신들에게 편하게 맞추려 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면이 아니라, 외면이다. 유대인의 율법 체제는 멍에였고 메기 힘든 무거운 것이었다. 어떤 교인들이 그들의 삶에서 계명을 멍에로 여기는 자들이 있는가?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그것 때문에 주일이나 다른 날 하고 싶은 많은 일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장애물이자 율법이다. 그것은 거듭난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은 항상 무겁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이 아닌 생명이기 때문에 무겁지 않다.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의 생명을 얻은 자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말한다.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기 때문에(시 1:2),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 때문에 무거울 수 없다.
2)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는 본능적으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싶어 한다.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인식하며 ‘그 앞에 즐거운 것’(히 13:21)이 되고 싶은 열망을 느낀다. 이런 삶의 영광은 항상 인격적이라는데 있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을 단순한 입법자가 아니라 아버지로 여긴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며, 새로운 영역에서 살아간다. 율법과 규범이 아닌 인격적인 관계의 지배를 받는다.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싶은 열망을 품는다. 이것은 새 생명을 얻은 자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하나의 관점을 받아들이거나 새로운 규범을 택하거나 종교를 갖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주신 새 생명으로서 반드시 이런 결과를 낳게 되어 있다.
3) 구원의 전적인 목적이 자신을 의롭게 하기 위함인 것을 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처음 접할 때 구원을 거의 죄 사함, 곧 죄책과 정죄와 형벌에서 건져 주시는 일로만 이해하기 쉽다.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제 다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실제 목적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목적일까?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알려준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1-14). 이것이 하나님이 소유하신 백성의 특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책과 형벌뿐 아니라, 모든 불법에서 속량 받고 깨끗해져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게 된다. 새 생명을 받은 자는 죄 사함만으로 만족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결코 그리스도의 피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히 10:29).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일을 하신 목적이 우리를 적극적으로 의롭게 만드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라고 말씀한다. 사도 바울은 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고 말씀한다. 우리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따라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는 삶을 살게 된다.
4) 새 생명을 가진 자는 의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분명한 기초임을 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인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목적은 단지 지옥에서 건져 내는데 있지 않다. 단순히 나를 의롭게 하는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과 다시 교통하는 것에 있음을 잘 알게 된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였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이라고 말씀한다. 신약성경은 이것을 화목이라고 표현한다. 단지 율법의 측면에서만 화목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다시 알고 교제하고 교통한다는 측면에서 화목해지는 것이다. 구원이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상태와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시는데, 그 말의 의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자신을 친밀하게 안다는 것이다. 영혼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는 새로운 본성이 생겼기 때문에 의로운 본성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5) 새 생명을 가진 자는 성별된 삶을 산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후 6:14). 그 이유가 무엇인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본질적으로 구별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신의 약함 때문에 마귀와 그의 유혹 때문에 어리석게 자기 자신과 자신이 떠나온 옛날의 삶, 이미 분리된 예전의 삶과 계속 소통하려 들 때가 있다. 그래서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다. 왜 그러한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는 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구원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새 생명을 받는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겠는가? 절대로 함께할 수 없다. 의와 불법은 섞일 수 없고 그 정의상 영원히 반대되는 것이며, 본질과 성격 자체가 아예 다른 것이다. 빛과 어두움은 완전히 다른 것이며 분리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5-16).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새 생명을 받은 자는 의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초임을 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열망하기에 그의 말씀을 준행하는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령들은 그와 교통하는 길을 알려주는 수단, 자신이 그토록 열망하는 교제로 이끌어 주는 수단으로 여긴다.
6) 새 생명을 가진 자는 더욱 계명을 지켜 거룩을 추구한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3-4)이라고 말씀한다. 주를 안다고 하면서도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이 큰 구원의 성과를 완전히 뒤집는 행동을 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에 불과하다. 그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으며, 남들을 오도하고 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와 교통하기를 열망하는 자는 당연히 그 교제와 교통을 누리기 위해 의를 추구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받은 새 본성, 하나님의 새 생명,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는 사실만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 의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도 그처럼 의로워지길 열망하게 된다. 베드로 사도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5-17)라고 권면한다. 거듭난 자는 새롭고 거룩한 본성이 속에 생긴 것을 느낀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을 상기시키며 이것을 강조한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2-23), 이 씨가 자라고 성장하면서 썩지 않는 것을 얻고 싶은 열망, 의를 얻고 싶은 열망, 적극적으로 거룩해지고 싶은 열망, 하나님의 의도대로 그의 자녀다워지고 싶은 열망, 그럼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싶은 열망이 생긴다.
여기서 자신을 향해 질문해보자. 나는 행복해지고 싶고 놀라운 체험을 하고 싶은 열망보다 의로워지고 거룩해지고 싶은 열망이 더 큰가? 마귀는 친구처럼 광명의 천사로 다가와 성경을 인용해가면서 ‘무엇보다 네가 원하는 것은 행복이야’라고 속삭임으로 행복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려 한다. 당신은 이런 행복에 주리고 목마른 자인가? 여러분은 실제로 행복해지는데 관심이 있는가? 아니면 거룩해지는데 관심이 있는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의를 추구하고 있는가? 마귀는 다가와서 ‘신앙생활도 네 행복을 위해 필요한거야’라고 속삭이면서 체험과 황홀경과 감정과 흥분에 온 관심을 집중하게 한다. 당신은 이 둘 중 무엇이 먼저인가? 이런 종류의 신비적인 체험이 먼저인가? 아니면 의와 거룩함이 먼저인가? 우리 영혼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증거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개의치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모든 상황이 나빠져도 거기에 마음을 쓰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가장 열망하는 것이다. 세상 어떤 것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태어난 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외에는 누구도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7) 하나님의 생명을 받으면 성령의 열매가 그 증거로 나타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그 열매를 사랑으로 표현하며, 갈라디아서에서는 성령의 열매로 표현한다(갈 5:22-23). 종교인들은 성령의 열매와 아주 비슷한 것을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을 제조할 수는 없다. 진짜처럼 보여도 그것은 진짜 열매가 아니다. 생명과 그에 따른 열매는 만들어 낼 수 없다. 열매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저절로 맺히는 것이다. 속에 있는 생명과 본질이 나타나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처음에 가졌던 것이 바로 종교이며 이 종교는 결코 기독교와 같지 않다. 이것은 영혼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과 기계가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다. 종교와 도덕에는 진정한 열매가 없다. 독실할 수 있고 정통 신앙은 지킬 수 있고 다른 모든 것은 갖출 수 있어도 열매는 맺을 수 없다. 바울 사도가 주님을 만나기 전이 그렇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이기 때문에 교회를 핍박하였지만(빌 3:5-6).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긴 것은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었다. 종교적인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긴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이다. 그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이다(빌 3:8-9). 영혼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에게는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그 열매의 모습은 무지개처럼 아름답고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먼저 사랑으로 나타난다. 우리 안에 그의 생명이 있다면 당연히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함이 있다(눅 10:27). 또 기쁨으로 나타난다. 이 기쁨을 전혀 모르는 교인이라면 그는 독실한 종교인에 불과하다. 그는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롬 5:3). 주님은 이것은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다고 하신다(요 16:22). 세상이 주는 기쁨은 순식간에 말라 버린다. 새 생명을 가진 자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 1:9)이 자기 속에 있다. 이것은 인위적인 기쁨이나 쾌활함이 아니다. 오직 성령께서 만들어 내시는 영혼의 빛이다. 또한 평강의 열매가 있다.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 평안을 체험하며 산다(빌 4:6-7). 또한 오래 참는 태도가 나타난다(인내). 주님과 같은 부드럽고도 강한 자비가 나타난다(자비). 이런 자비는 우리 안에 계신 복되신 주님의 특성이다. 또한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 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한다(양선). 신실하여 믿고 신뢰할만하게 된다(충성). 일부러 겸손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팔복에 나타난 온유함이 있다(온유). 마지막으로 자기 통제를 할 줄 안다. 단순히 규칙이나 법을 준수하는 훈련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는 절제된 모습이 분명하다(절제). 그리스도인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열망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모든 일을 하면서 본능적으로 균형을 잡으며 자기 훈련을 하면서 통제한다. 노력하는 이상 그는 이미 무엇인가 되었음을 알고 있는 자이다.
[나아가며]
참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시는 것이다. 이 새 생명은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생명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에게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당장에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주님께 나아가 “저는 이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주님께서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만이 내 영혼에 이 일을 하실 수 있고 하시길 원합니다”라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간구해야 한다. “스스로 태어날 수 없사오니 주님의 복되신 성령을 보내사 이 일을 해 주소서” 라고 성령 하나님을 열망해야 한다. 주님의 복되신 성령을 구하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면 필연적으로 이런 증거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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