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볼 수도 없다고 하셨다. 물과 성령으로 난 사람의 특징을 살펴보고 점검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니고데모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며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 3:9)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하신다. 보통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런 가르침은 틀렸다고 생각하며 기꺼이 믿거나 승복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바람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활용하며 그 영향과 결과를 친히 보고 있다. 문제는 ‘이해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하는 태도이다. 이런 태도는 치명적으로 위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먼저 자신이 거듭났는지 아닌 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사람이 거듭나면 명백한 특징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1. 자기 안에 새 생명과 새 본성이 생긴 것을 의식한다
1) 그래서 두 본성의 갈등이 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새롭게 태어나면 새 생명의 원리가 속에 들어온다. 그러면 본인 자신은 그 사실을 필연적으로 인식한다. 전에 없었던 표현 가능한 요소들이 속에 생겨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라고 묘사한다. 한 인격 속에 있는 두 존재가의 서로 반발하거나 충돌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1) 양심과 어떻게 다른가?
양심의 소리가 그것인가? 아니다. 양심은 언제나 소극적으로 작용한다. 우리의 행동이나 생각에 대해 판결을 내릴 뿐, 결코 주도하지 않는다. 무엇인가 하도록 자극하지 않는다. 그것은 양심의 역할이 아니다. 양심은 소송을 다루는 일종의 법정과 같다. 우리의 행동과 잘못에 판결을 내리는 것 이상의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안에 생긴 이 새 원리의 중요한 특징은 적극적이고 살아 있으며 능동적이라는 것이다. 항상 우리를 주도하기 때문에 우리 속에 있는 새 생명과 새 본성을 의식한다. 단순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을 때 정죄감을 느낀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을 포함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포함한다. 거듭난 자는 무엇인가 더 좋은 일, 더 고상한 일을 하도록 자극을 받고 있다.
(2) 성령으로 일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대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이 새 본성을 통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일하신다는 원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성령의 일하심을 인식한다.
2) 논리적으로 거듭난 자는 자기 자신을 보고 놀란다
내가 싫어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옛 본성도 인식하고, 내가 아는 내 천성보다 훌륭하게 행동해서 나도 놀라게 만드는 새 본성도 인식한다. 신성한 본성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베드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되면, 요한의 말처럼 신성한 생명의 “씨”(요일 3:9)가 우리 안에 심기면, 새 원리가 우리 안에 심겨서 작용하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자기 모습을 보고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새 생명은 옛 생명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신약 성경이 말하는 변화이다. 우리 본성은 비틀리고 왜곡되고 오염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 모두 타고난 모습인데, 신성한 생명의 씨가 우리 안에 들어와 작용하기 시작한다. 이런 일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인식할 때, 경이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말한다. 그는 어떤 면에서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소의 사울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딤전 1:13)였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딤전 1:1)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필연적인 결과요 변화이다. 견해는 논박할 수 있어도 생명의 변화는 논박할 수 없다.
2. 거듭난 자의 변화의 모습
1) 영적인 흥미와 관심이 생긴다
그리스도와 교회 밖에 있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영적인 관심이 전혀 없다. 정치적 관심, 예술과 음악과 연극에 대한 관심 등 다른 관심은 많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영혼에 관심이 없다. 자기 자신을 깊이 생각해 보거나 의식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경우가 있지만 정작 하나님에 대해 깊이 아는 바가 하나도 없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 매일 똑같은 삶을 반복하는 사람은 스스로 영적인 자가 아님을 알리는 것이다. 기도에도 관심이 없고 성경에도 관심이 없다 이것이 육에 속한 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다르다. 영적인 일에 관심이 있다. 이런 일, 영적인 일이 삶의 중대사가 되었다. 영적인 일은 가끔 하면 되는 일이거나 바쁘면 빼먹어도 되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여기는 자들이 있다면 단지 교회 회원권을 가진 종교인에 불과한 자이다. 여러분에게 영적인 일은 삶의 중대사인가? 이 영적인 일이 아주 큰일이며 주요 관심사인가? 그렇다면 의문의 여지가 없이 거듭난 것이다. 이처럼 영적인 일이 삶의 중대사가 된 것을 발견할 때 누구보다 본인이 먼저 놀라고 기이히 여기게 된다.
2)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자신이 거듭났음을 실제 알게 된다
(1) 우리 눈에 다른 사람들이 달라 보이는 것을 통해서이며 그들 눈에 우리가 달라 보이는 것을 통해서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많은 사람에게 기쁘고 즐거운 대접을 받지 못할 것을 경고하신다. 주님은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마 10:17-18)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하시고, 이어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37-38)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원리이다.
(2) 그래서 영적인 일에 지각이 생긴다
같은 부모 밑에 태어나 성격도 같고 본성도 같은데 한 사람은 거듭났고 한 사람은 거듭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형제는 서로 달라진 것을 의식한다. 일부러 달라지려고 애써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달라진 것이다. 서로 간에 여전히 사랑하고 염려하고 무엇이든 도와주려고 하지만 중생하지 못한 형제는 무엇인가가 끼어들어 이른 바 ‘둘 사이의 장벽’으로 작용하는 것을 안다. 이런 일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독실한 종교인은 남들의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남들도 독실한 종교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든지 세상은 독실한 종교인을 반대하지 않는다. 가끔 교회에 가는 신자, 주일예배만 참석하는 신자로 알려진 사람은 박해 받을 일이 없다. 오히려 아주 고상하고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대접받는다. 그러나 신앙이 삶의 가장 큰 일에 내 인격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인상을 풍기면, 바로 상황이 돌변하면서 일종의 박해가 시작된다. 세상은 대개 종교는 박해하지 않지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은 박해한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 갈수록 세상이 주님을 대하듯 우리를 대할 것이라고 하셨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라고 말한다.
3) 영적인 관심만이 아니라 진정한 영적 지각이 생긴다
이것이 참 종교와 거짓 기독교, 혹은 기독교와 종교를 구분하는 방법이자, 자신이 거듭났음을 나는 참 지식과 마귀가 그럴듯하게 위조해 낸 가짜 체험을 구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마귀는 늘 기독교를 위조하려 든다. 거듭남의 결과를 체험하는 자를 발견하는 즉시, 비슷한 체험을 위조해 낸다. 종교는 위조하지 않아도 되지만 기독교는 위조해야 한다. 사람들이 참으로 거듭나면 마귀의 나라와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1) 특이한 체험이나 사교나 강신술의 결과로 나타나는 체험과 참된 중생의 체험을 어떻게 구별할까?
참된 영적인 지각은 중생한 자에게만 생긴다. 거듭난 자는 진리를 믿고 받아들인다. 여기서 진리란 성경의 핵심 메시지를 말한다.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진리를 명확히 안다는 뜻이다. 진리를 이해하고 파악한다는 뜻이다. 진리 저부를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본능적 지각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자의 지각이 온전한 것이 아니기에 마귀도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을 괴롭힌다. 어느 시대에나 교회가 목회자와 교인의 자격을 구분한 이유가 여기 있다.
(2) 이것이 육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의 차이점이다.
고린도 전서 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라고 말씀한다. 육에 속한 사람이란 타고난 천성 그대로 사는 사람이다. 신령한 자는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 하나님의 성령이 안에 거하시는 사람이다.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해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기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라고 설명한다.
(3) 그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는가?
학식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영적 지각, 영적 통찰력, 영적 분별력이 없는 것이었다. 육에 속한 자는 영적인 지각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만들어 낼 수도 없다. 아무리 배워도 오히려 지적인 자부심만 커져서 영적인 지각을 얻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머리에서 출발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은 어리석게 보일 뿐이다. 이것이 독실한 종교인과 거듭난 자를 구분하는 완벽한 시금이다. 어떤 의미에서 종굔느 이해 가능한 것이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고전 2:9)라고 말한 후에 그 다음 절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거듭난 참된 그리스도인)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은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한다. 12절에서도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며, 16절의 말씀으로 마무리 짓는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 이처럼 영적인 지각을 가진 자만 영적인 일을 이해한다.
(4) 육에 속한 자는 가련하게도 영적인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듬거린다.
종교는 기꺼이 믿을 생각이 있다. 독실한 종교인이 되려는 생각이 있고 그런 종교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종교서적도 읽고 철학 토론 등도 즐긴다. 그러나 거듭남에 대해 그리스도와 속죄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리석은 헛소리로 생각한다. 육에 속한 자는 그런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연하고, 세련되고, 지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종교를 좋아한다. 그러나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니고데모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4) 계시의 절대 필요성을 알게 된다
거듭난 자는 단순한 철학 논쟁이나 과학 논쟁 등에 더 이상 시간을 쓰지 않는다. 논쟁에 있어서도 아주 많은 경우 상대방의 주장이 아무 성과 없이 늘 똑같은 막다른 벽에 부딪친다는 점을 알려 줄 수 있으며, 이런 추론과 논쟁으로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가 깨닫고 승복하는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그 모든 단계를 넘어선다. 예비적인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하지 않는다. 입장 전체가 변화된다. 계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안다. 옛 본성의 실상을 안다. 죄와 이 세상 신이 자기 눈을 가렸다는 것, 그 상태에서는 믿을 수 없었다는 것, 따라서 영적인 일이 전부 어리석게 보였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역사가 자기 영혼에 일어났다는 것을 안다. 그는 더 이상 기적에 대해 논쟁하지 않는다. 본인 자신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기적은 초자연적인 일, 기적적인 일은 명백한 사실이다. 본인 자신이 기적의 영역에서 살고 있다. 초자연적인 영역으로 넘어와 살고 있다. 거듭난 자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만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계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것이다. 거듭난 자는 계시와 기적과 초자연적인 일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의지한다고 말한다.
(1) 성령의 외적 증거와 내적 증거를 잘 알게 된다
칼빈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성령의 내적 증거’라고 부르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내적인 증거를 통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다. 성령은 외적 증거와 내적 증거를 주시는 이 두 가지 일을 더하신다. 외적인 증거란 성경이 서로 다른 시기에 그토록 긴 간격을 두고 66권이나 되는 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지에 일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내적인 것은 내 안, 나의 내부에 나타나는 성령의 증거를 말한다. 성경을 믿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모든 말씀되어진 것들을 정리하는 것뿐이다. 성경을 믿는 자들은 그 말씀의 진술들이 아주 강력하고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거듭난 자에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이 이것이다. 그 속에 영적인 원리가 있기 때문에 성경이 열린다. 성경을 믿지 않을 수가 없다.
(2) 거듭난 자는 구원의 방대한 교리를 받아들이는데 어떤 어려움도 없다
온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죄에 대한 성경의 교리가 참된 것을 알며, 그 교리가 자기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을 안다. 정죄와 지옥 교리를 믿는데도 곤란을 겪지 않는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믿는데도 어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로 인해 즐거워한다. 우리에게는 이런 신적인 일이 필요했고, 성육신이 필요했고, 주님이 오셔서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셨고 내가 받을 형벌을 친히 담당하시고 자기 몸에 지셨다. 거듭난 자는 이런 일을 받아들이는 것에 곤란을 겪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이 필연적인 것을 알 뿐 아니라, 이런 것 때문에 더욱 기뻐한다.
[나아가며]
우리는 거듭남의 표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과연 자신을 보면서 감격하며 놀라고 있는가? 그리고 남들까지도 놀라게 만들고 있는가? 성령의 일을 알아보는 본질적이고 새롭고 직관적인 지각을 가지고 있는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셔서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그분을 통하여 알게 하신다. 이런 영적인 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가? 그것이 인생의 목적인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1분). 우리는 이 모든 일을 해주신 성삼위 하나님께 모든 찬송과 영광을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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