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의 특징 (요 3 : 8)

거듭남의 특징 (요 3 : 8)

이윤석 목사 0 2023.08.11 15:46

[들어가며]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들이다. 거듭남이 없다면 아무리 깊이 있고 높은 경지의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위로부터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신비하고 놀라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물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물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이해하려 드는 자에게 나타나는 미련한 모습이 바로 니고데모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것이다. 성경은 이 거듭남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먼저 이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남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와 또 거기에 따르는 특징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고 확실히 알아야하고 확신해야 한다.

 

1. 거듭남에 대한 다른 묘사들

 

1] 다양한 성경의 표현들

1) 먼저 거듭남(born again)을 다른 곳에서는 중생(regeneration)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발생(generation), 곧 생명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발생함으로 새 생명을 얻는 것이다.

2) 거듭남은 새 창조로 묘사된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라고 말한다. 새 출생은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는 말씀처럼, 첫 창조 때처럼 빛을 비추시는 것이며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시는 것이다.

3) 거듭남은 새로운 마음, 깨끗한 마음이 생기는 일이다. 베드로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된다고 한다.

4) 야고보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한다(1:18).

5) 요한은 요일일서에서 이 일을 생명의 와 연관시킨다. 우리의 본성과 마음에 뿌려진 씨, 새롭고 신성한 생명의 씨와 연관시킨다.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한다(요일 3:9) 말씀한다.

 

2] 성경은 이것을 부활에 비교하여 말씀한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2:1).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한다. 그와 함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6:5). 우리는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다. 새 출생은 다듬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새로운 성향, 신성한 새 생명의 원리가 속에 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오직 새 출생으로만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결단을 강조하는 성향을 우려하는 이들이 있다. 결단이 필요하지만, 결단보다 이 일이 먼저 일어나야 결단할 수 있는 것이다. 육에 속한 자는 결단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그들에게 어리석게보이기 때문이다(고전 2:14).

우리가 결단함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성령이 우리를 다루실 때, 스스로 죽은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고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것뿐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당신은 과연 거듭났는가? 태어나지도 못한 사람은 이런 것들을 알 수 없다.

 

2. 8절의 의미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그러하니라여기서 다 그러하니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세세한 부분까지 똑같은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다. 자연스런 출생의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이다. 갑작스럽게, 알아볼 수 있게 태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중생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 범위 밖에 있다. 그래서 주님이 드신 예가 매우 중요하다. ‘너희는 바람을 보지 못하며 궁극적인 의미에서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바람이 끼친 영향과 결과는 본다는 것이다. 새 출생은 빨리 이루어질 수 있고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고통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며칠 몇시, 어느 예배, 어느 성경 본문을 통해 거듭났는지 묻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나타느냐 하는 것이다. 자신이 태어난 과정을 일일이 설명하느라 시간을 쓸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 태어났는지, 거듭났는지는 확인해야 한다. 마귀는 이런 점을 이용해서 항상 혼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극적으로 회심했던 평범하게 회심했든 회심한 것은 사실이다.

 

3. 거듭난 새 생명의 특징

 

1) 일반적으로 가족으로서의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1)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가족이지만 많은 면에서 크게 다르면서도 일반적으로 유사성이 있다. 그들 속에는 신성한 생명의 씨가 있기에, 이제 그들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그 생명이 주요한 특징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2)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면 인종, 국적, 출신학교보다 이 생명이 더 두드러진 특징으로 드러난다. 직업이나 재능이나 온갖 특징보다 이 생명이 더 확연하게 나타난다.

(3)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영적인 정신을 나타냄으로 그런 인상을 준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영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 로마서 95절에서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씀한다. 이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차이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 설교를 하고 또한 설교에 관심을 갖는다고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다. 세속적인 정신으로 그럴 수 있고 순전히 지적인 활동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지적인 활동뿐이지 성령의 일이 아니고 영적인 정신이 없고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정신만 있을 수 있다. 설교자나 교사라고 하지만 행동을 보면 영적인 특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자들이 있다. 문자는 전달되는데 성령이 전달되지 않는다. 그 속에 메시지가 없다. 태도가 기계적이고 피상적이며 형식적이다. 아주 매력적이기는 한데 말하는 태도와 행동이 훨씬 더 중요하다. 정통신앙을 옹호하지만 정신은 세속적인 경우가 있다. 여러분 자신도 다른 그리스도인에게서 한 가족의 특징을 알아보고 감지할 수 있다. 이것이 여러분이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아주 좋은 증거이다.

 

2) 새로운 출생을 검증하는 철저한 시금석은 성령의 다루심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다

성령의 다루심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자기 속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거듭날 수는 없다. 거듭난 자는 누군가 자신의 삶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1) 자기의 행동은 크게 의식되지 않는다. 다른 존재가 나를 다루고 계신다는 이 사실, 내 삶에 들어와 흔드신다는 이 사실이 크게 의식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3:10-12). 바울은 이것이 자신의 큰 열망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과거 어느 때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날 위해, 날 받아주시기로 결단하셨다. 모태에서부터 날 택해 주셨다. 날 붙잡아 주셨다. 나는 지금도 그가 내게 행하신 그 놀라운 일을 붙잡고자 애쓰고 있다고 말한다.

(2) 바울은 그가 나를 잡아 주셨다. 붙잡아 주셨다. 그래서 나도 그를 붙잡고자, 그가 내게 주신 것과 내게 해주신 일을 붙잡고자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아본 것은 아니다. 막연히 의식할 뿐이다. 그 다루심에 맞서 싸울 수도 있고, 그 다루심을 싫어할 수도 있다. 다소의 사울처럼 가시 채를 뒷발질할 수도 있다(26:14). 이것은 기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며 절대 피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복음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조차 이 점을 잊은 채 인간과 인간의 결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의 입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일이 일어나면 본인 자신이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있다.

 

3) 더 중요한 시금석이 있는데 그것은 겸손해지지 않으면 거듭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라고 하셨다. 니고데모는 겸손해졌다. 이 또한 반드시 따르는 일이다. 새로워지고 거듭나는 것 외에 아무도 대책이 없는 상태이며 그런 형편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지금 죽어 있기 때문에 중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연히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다.

(1) 사람들이 중생의 교리를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종교인들이 무엇보다 싫어하는 두 가지는 바로 참된 대속의 방법으로 제시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거듭남이다. 그들이 중생의 교리를 싫어하고 대속 또한 그만큼 싫어하는 것은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일종의 속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생의 교리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자신이 기독교를 붙잡았다고 생각하는 자와 기독교에 붙잡힌 자의 가장 큰 차이점이 이것이다. 붙잡힌 자는 항상 겸손하다.

(2) 거듭난 자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자신이 완전히 쓰러져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물리적으로 쓰러질 필요는 없지만, 쓰러지고 겸손히 낮아지는 일은 항상 따라오게 되어 있다.

(3) 먼저 영적으로 죽은 자여야 한다. 사도는 로마서 7장의 자서전적 서술에서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자신이 살아있었다고 한다. 자신은 심지어 율법의 요구에 대하여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행복하고 자립적이며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령이 그를 다루기 시작하시면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정신과 마음과 영혼에 밝혀 주셨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7:9). 이처럼 그는 먼저 죽어야 했다. 누구나 먼저 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듭날 수 없다. 영적으로 자아의 죽음을 겪어야 한다. 완전히 쓰러져 끝장이 나야 한다.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4) 거듭난 자는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항상 겸손하다. 구약 성경은 경외감으로 가득 차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9:10). 아브라함은 무엇보다 겸손했다. 모세도 여러 차례에 걸쳐 경외감을 배워야 했고 그것이 그의 가장 큰 특징이 되었다. 모세가 완벽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도 죄를 지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을 평생 가지고 있었다. 다윗도 큰 죄를 지은 죄인이었지만 그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는 것이었다. 이사야가 부르심을 받는 장면에서도 그는 화로다 나여!”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에 신성한 생명을 심어주실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5) 부흥을 경험한 자들, 하나님의 성령이 능력으로 나타나신 현장에 있었던 자들을 만나 보아도 언제나 겸손이 그 두드러진 특징임을 알 수 있다. 경건함과 두려움(12:28)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영원한 세계의 손길을 느낀 자들이다. 베드로와 동료들이 주님의 기적으로 물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 베드로는 주님께 나아가 말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5:8). 주님이 그를 꾸짖으셨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데 기적, 신성의 나타남, 기사, 영원한 능력 때문에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전능자의 손길, 재창조의 행위는 사람을 겸손하게 낮춘다.

 

4) 거듭난 자는 항상 회개를 한다.

때로 우리가 회한이라고 부르는 가짜 회개를 진짜 회개로 착각하는 가짜 회개가 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7:8-11절에서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경건한]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라고 했다. 거듭난 자는 이 경건한 근심때문에 참으로 회개하게 되어 있다. 단순히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근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짓을 하고 싶게 만든 본성이 자기 속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훨씬 더 근심한다. ‘경건한 근심은 단순히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아는데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다. 단순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그 결과로 인해 괴로워하거나 불편해 하는 것이 아니다. 거듭난 자의 근심은 자기 마음의 악과 죄를 발견한데서 비롯된 근심이다. 그들은 사도 바울처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안다고 고백한다(7:18). 자기 마음의 악함을 미워하여 다윗처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라고 간구한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 주를 슬프시게 하고 자신의 가슴에서 몰아낸 그 일을 미워하는 것이 진짜 회개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중생해야 하는 이유, 중생 외에 다른 대책으로는 부족한 이유, 중생이 참으로 귀중한 이유를 바로 아는 사람들이다.

 

5) 거듭난 자는 항상 기본적으로 진지한 태도가 있다. 결코 경솔하거나 경박하거나 피상적이지 않다.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주제를 꺼내거나 어떤 집회에 대해 언급하면 갑자기 긴장하는 사람이 있다.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선 것처럼 자세를 바로잡고 태도를 바꾼다. 그것은 중생에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다. 신앙적인 주제가 나오면 일종의 가면을 쓰듯 태도를 바꾸는 사람은 그 속에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의 영역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새 본성이 없는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에게는 신앙적인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풍겨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진지한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엄숙하거나 경건한 체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행복하고 유머가 있다. 그러나 지나치지 않다. 그들의 유머는 그 속에 있는 생명의 표출이요 새 출생으로 얻은 속성의 표현이다. 그들에게는 항상 통제력이 있고 진지함이 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을 통제하는 요소, 중대한 원리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답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진지한 사람들이다.

 

[나아가며]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울처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8:23)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1-2)라는 마음의 고백이 있다. 그에게는 따뜻함과 사랑스러움과 다정함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기본적으로 진지하다. 거듭난 자는 그럴 수밖에 없다. 기쁨과 진지함은 모순된 것이 아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기쁨 또한 거룩하며 순결한 것이다.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주신 이 진리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과 근본 기초는 반드시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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