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축복의 성격 (요 2:7-11)

진정한 축복의 성격 (요 2:7-11)

이윤석 목사 0 2023.02.27 15:56

[들어가며]

 

우리 구주 예수를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이 황홀한가? 이런 경험을 자주 체험하며 신앙생활 하는가? 진정한 기독교는 지식이 아닌 충만한 삶의 모습이 표현된다. 우리 기독교인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는 삶, 곧 은혜가 계속 성장하고 증가는 삶이 정상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많은 이유가 있지만, 이것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께서 잔인하게 십지가 위에서 죽으셨다. 세상은 속박되어 있고 무언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삶에 나타나는 삶의 질을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그렇게 해야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비극은 교회들이 사람들 마음에 드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끄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풍성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만 진정한 회복이 가능하다! 그러면 우리에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충만함이 무엇인가?

 

I. 주님은 우리에게 충만함을 주고자 하신다.

 

  1. 우리는 마리아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먼저는 믿음에 따른 순종이 필요하다.

 

     충만함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마리아가 종들에게 명한 것처럼, 순종할 때 얻는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에 응답할 때 얻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적 은사를 구하려 할 때, 수동적이면서 동시에 능동적이다. 믿기만 하고 순종하지도 않으면서 기다리고 바란다고 해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먼저 믿음과 순종이 축복을 향한 고속도로와 같은 것을 믿어야 한다. 성경은 언제나 동일하다. 우리를 향한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의 온전함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결과 거룩함에 관심을 가지신다. 우리 자신이 받을 용서와 천국이 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8:29)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것은 아들 그리스도의 모습과 일치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그 목적을 위해서 이 땅에 첫 번째 아들로서 오셨다.

 

  2. 그래서 우리의 입장은 항상 주님의 입장과 같아야 한다.

 

    1) 가나 혼인잔치에 가장 감동적인 축복의 내용은 주님이 거기 그 자리에 계셨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상황을 다스리신다. 왜 그럴까? 그에게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본문도 그 영광(능력)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11)라고 말씀한다. 그렇기에 여기서도 보여주신 것은 1장에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영광이신 하나님의 아들 되신다는 사실이다.

 

    2) 여기서 모든 축복은 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 강조한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것은 우리의 삶을 위한 교훈이나 이론이 먼저가 아니다. 아무리 좋은 삶의 규칙일지라도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으면 기독교가 아니다. 바울 사도는 신앙의 내용을 말할 때,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2:2,3)라고 했다.

 

    3) 이렇게 신약성경은 그리스도 중심성을 끝까지 나타내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몸의 비유를 통해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시다(4:15,16) “...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머리는 모든 힘의 자리, 모든 신경적인 에너지가 연결되는 자리이다. 모른 것이 머릿속에 있고, 몸의 나머지 부분 전부가 거기에 의존한다. 이와 똑같이 모든 충만함과 능력과 우리 삶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 인해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2:9,10)라고 한다. 우리의 모든 축복과 능력과 좋은 것들이 다 그 안에 있고 그에게로 나온다. 그렇기에 가나 혼인잔치에 참석했던 이들은 그 능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기적과 축복의 현장에 이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신앙생활에 어떤 초자연적인 신비한 현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10:10)”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그리고 더 풍성히 주시려고 하셨다. 주님은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을 주려고 하셨다. 그 생명이 무엇인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하셨다. 주님은 그 생명을 우리에게 풍성히 주셔서 누리도록 하기위해 오셨다.

 

  3. 혼인잔치에서 중요한 것은 그분이 행하시며, 그분이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신약은 우리에게 주님이 전능하시며, 그분과 더불어 살아있는 관계를 가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말씀하신다. 왜 그런가? 우리가 복된 이 충만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말씀하실 때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이제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하실 때, 이 일이 실천되는 우리 입장과 그의 입장을 살펴보자!

 

    1) 우리 모두가 다 보았다는 것이며, 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실제를 본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일을 보고 있다. 본다는 것이 무엇일까? 바울 사도는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고 했다. 우리 눈으로 그분이 하신 일을 계속 바라보는 것이다. 모친 마리아가 처음에 불평했지만, 책망을 받고 나중에 깨달았듯이 우리도 그렇다. 우리는 능력과 삶, 영광이 모두 그분 안에 있음을 깨닫고 바라보자! 이것이 우리가 축복을 위해, 풍성한 삶을 위해 매일 해야 할 활동이다!

 

    2)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은 일어났던 일이다. 그들은 변화의 발생을 보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분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우리는 주의 성령을 통해서 주의 영광으로부터 영광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집중해 바라볼 때 우리를 영광에서 영광으로 점점 변화시키시리라.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2,13). 우리는 밖에서 일하시며 동시에 그분은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항아리를 채우는 바로 그 시간에, 그분은 기적을 행하신다. 이것은 주님의 활동과 우리의 활동을 통해서 나타난다.

 

II. 그러면 풍성한 축복의 성격이 무엇일까? 우리를 위해 무엇이 가능한가?

 

이것을 위하여 늘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을 기도로 표현 한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8,19). 가난한 신앙생활 하지 말고, 풍성하게 왕의 자녀처럼 살라는 것이다.

그 엄청난 부를 즐기고 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기도 한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8,19). 많은 지도자나 교인들은 말한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에 많은 것을 적용치 마세요. 거기 있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록되었어요. 꼭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다 받은 사람이에요그들은 성경의 전체적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소멸하는 사람들이다.

 

# 그러면 Θ이 약속하신 축복의 일반적인 성격이 무엇일까?

 

  1. 그 축복은 기적적이라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셨다(11)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던 일이 기적이듯, 그의 충만함으로 들어가는 것도 기적이다. 이것이 바로 충만함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의 본질이다. 충만함을 받는 것이 전적으로 초자연적이며 완벽히 하나님의 활동의 결과이다. 바울은 그가 믿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1:16). 다른 말로 지극히 자랑했다. 왜 그러했는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말한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1) 신자란 기독교 철학을 받아들이거나 주님의 가르침을 습득한 사람인가?

        결코 아니다. 거듭나지 못하거나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교회 오래 다니고, 기독교 윤리나 가르침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 속에 기적을 일으키셔야 한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생명을 받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2;1)라고 표현한다.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과 영적으로 산 사람의 차이이다.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인간복제를 말하지만, 그것은 웃기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만이 생명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이 놀라운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 기적이요 표적이다. 그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 창조의 표적을 행하셨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변화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것이다. 그래서 물로 포도주를 변화시킨 사역을 통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2) 기독교란 무엇인가?

        우리가 믿는 기독신앙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영혼 속에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근대 교회 역사의 위대한 복음적인 각성 운동의 이유는 모두 우리 영혼 안에 실제로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는 단순히 기독교의 가르침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영혼 안에 실제로 예수께서 성령으로 거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주심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생명을 사람들의 영혼 속에 끌어들이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종교적인 사람으로 금식하고 선행하고 하는 것이 이런 것들에 도달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렇게 금식과 선행과 기도를 통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자신 속에 생명으로 충만함을 체험하는가? 아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시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신적인 생명의 씨앗을 우리 속에 심어주시는 놀라운 일이다.

 

    3) 가나 혼인잔치에서 주님의 초자연적 활동에 의해 상황이 변화되었다

        그가 활동하시는데, 그것은 초자연적인 활동이다. 무엇인가를 행하시니 그것이 기적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라고 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라는 말씀은 언제 하신 말씀인가? 천지 창조 때이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우리에게 하셨다. 어떻게 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통해서이다. 기독교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새 이름을 새기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활동이다. 우리 인격의 깊은 곳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이다. 우리의 속에 새겨주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사랑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라고 표현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내주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기록해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가 된다는 것이 바로 기적 중의 기적이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주시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함께 앉게 해 주셨다(2:5,6).

 

  2. 그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갑자기 된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이다. 이는 기적적인 하나님의 활동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순식간에 홀연한 섬광같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8), 그 기적은 벌써 일어났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비극은 사죄함 받고 초보 단계에 머물다가 일생이 끝난다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데, 실패와 좌절의 삶을 살다가 가는 것은 아닌가? 신약의 그리스도인을 특징짓는 것은 능력과 확신이다. 우리는 그런 것이 부족한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위로는 오늘도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그리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는데서 나온다.

     성령으로 인한 부흥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홀연히(갑자기)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2:2). 그러나 이런 교회부흥의 역사는 잠간 동안만 지속되다가 사라지고, 교회가 둔해져갔다. 참 시간이 지난 후, 어떤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고, 각성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며 애원하게 된다. 몇 년 동안 이렇게 하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갑자기, 기대하지 않을 때에 성령이 부어지는 역사가 일어난다. 성령께서 갑자기 강림하셔서 모든 상황을 변화시키되, 마치 갈릴리 가나에서처럼 변화의 역사가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기적적으로 갑자기 하시니,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수동적인 상태에서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뜻인가? 아니다! 주님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라”(7)고 하신다. 물을 길었고 채우니, 완벽한 포도주가 되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행하자! 행하지 않은 채 남겨두지 말자! 최선을 다하여 실천하자! 모든 조건을 이행하자! 그러나 기억할 것은 모든 능력이 그분께 있으며, 그것이 바로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기대하지 않을 때, 어느 순간에 갑자기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부흥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에게 희망이 있다. 지금 이런 어려운 시기에도, 절망 직전에도, 이런 불만족의 상황 가운데서도 기도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하고 있는 어느 순간,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때, 그가 임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말씀하시는 바를 행하되 개인의 삶 속에서 그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인내하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역사하실 것이다.

 

  3. 여기에는 비밀적인 측면이 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9) 연회장과 잔치의 주빈들은 다 몰랐다. 맛보고 알았을까? 맛보고도 몰랐다. 그러나 누가 알았는가? 물 떠온 하인들만 알았다. 이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오순절 아침 다락방에 모여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모든 백성이 놀랐다. “이 어쩐 일이냐?:(2:7-12) 라고 물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산헤드린 공회외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겼다.(4:8). 그들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럴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물 떠온 종들만 알듯이, 하나님의 성령을 모신 사람만이 깨닫고 이해된다. 육에 속한 사람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적이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철학자나 과학자들은 소경과 다를 바 없다. 결코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갈릴리 가나 혼인잔체에서 연회장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과 똑같다. 그러나 여기 무시 받을 수 있는 종들은 잘 알고 있었다. 왜 그럴까?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다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분임을 알았다. 그들은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이성을 초월하는 영역에 속한 것이다. 명상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마음과 이해력을 공급해 주시며, 우리 영혼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활동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강하게 역사하시고,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자신에게 풍성하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받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나아가며]

 

아직 우리 신앙생활에 만족함이 없는가? 복되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확신을 기대하자.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시고, 충만한 영광 누리게 하시는 것을 기대하자! 찬송가 가사처럼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려 그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85). 이것을 체험하는 신앙생활이 축복이다. 혼인잔치의 연회장은 깜짝 놀라기만 했지만, 물을 길어온 종들은 다 알았다. 이 놀라운 비밀의 축복이 그것을 받은 사람들만 안다는 사실이다. 계시록의 말씀을 읽어보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 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2:17). 여러분의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 그것을 받은 사람 외에는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흰 돌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있는가? 주께서 그것을 쓰셨음을 과연 알고 있는가? 여러분은 그에 대한 비밀의 지식과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시고 만족케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가졌는가? 이 축복의 본질을 사모하자!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다리자! 성령께서 언제나 갑작스럽게 부어주심을 소망하며, 하인과 같은 축복을 받고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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