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장 삼위일체(2): 우리가 방금 말하고 있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여러분에게 놀랍게(seem surprising to) 보이지 않는가? 아마 그것은 놀랍게(seem to be surprising) 보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특성들 - 지혜와 의와 선과 진실 - 은 아주 놀랍게도 인간적인 특성들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우리가 방금 말하고 있었던 그러한 무한하시고(infinite) 영원하시고(eternal) 불변하신 하나님(unchangeable God)께 돌릴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그러한 하나님께 돌리려 한다면, 천진난만한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 anthropomorphism)의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을 마치 하늘 위에 계신 어떤 큰 사람처럼 생각하는 어린아이 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형상(image)대로 하나의 신을 만다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대답은 ‘아니다’이다. 우리는 그러한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가지고 있는 어떤 속성들을 가지고 계신다고 만약 우리가 생각한다면, 우리는 2가지 이유 중의 하나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형상대호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성경은 우리에게 후자(候者)가 옳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것이 사람도 소유하고 있는 어떤 속성들을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시는 이유이다. 물론 그는 그 속성들을 무한히 높은 수준으로 소유하고 계신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놀랍게 온유하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이 표현되어 있는 구절들에서도 그렇다. 이사야서에서 말하기를,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사 20:22) 또,“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사 40:17)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동일한 이사야 40장은 이 동일한 두려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여기 그 말씀이 있다.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성경은 하나님의 온유하심을 얼마나 놀랍게 표현하는가! 그것은 단지 상징적인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어린아이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인가? 많은 철학자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격(person)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를 완전히 우리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창백한 추상개념으로 만든다. 하나님에 대해 따뜻하고 인격적인 방식으로 말하는 성경을 그들은 유치하게 생각한다.
그러한 철학자들이 옳은가 그렇지 않으면 성경이 옳은가?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나의 친구들이여, 성경이 옳다. 그 철학자들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생각하는 어린아이들을 멸시한다. 그러나 그 철학자들이 잘못이고 어린 아이들이 옳다. 우리 주 예수께서 이렇게 말하지 않으셨는가?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창백한 추상개념이 아니다. 그는 인격(person)이시다. 단순한 그 진리가 단순한 영혼들의 귀중한 소유물인 그것이 모든 시대의 모든 철학들보다 더 깊이가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의 큰 신비에 도달한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인격(one person)이 아니시다. 한 하나님 안에 있는 세 인격(three persons in one God)이시다. 그것은 삼위일체(Trinity)의 위대한 신비이다.
삼위일체는 오직 성경 안에서만 우리에게 계시되어 있다. 우리는 이 짧은 연속 강연의 처음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들을 자연을 통하여 그리고 양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셨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그것들 중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초자연적인 계시에 의해서 그리고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에서, 자연과 양심이 계시하는 것을 더 분명하고 더 풍부하게 해주는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과 양심은 사실 죄인이 거의 받지 못할 계시로 세사의 창조주이신 인격적이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계시한다. 그러나 인격적이고 거룩하신 존재가 어떻게 전적으로 홀로 존재하실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도 신격(神格)안에 인격적인 상호 교제가 존재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삼위일체 교리는 그러한 어려움을 놀랍게 극복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극히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비록 인격이시지만 유한한 인격인 우리와 매우 다른 인격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과 양심을 통한 일반계시에 근거하여 무한하신 인격은 전적으로 홀로 존재하실 수 없을 것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문제들을 옆으로 우선 치워놓자.
우리가 그것들에 마음을 쓰고 있을 때, 기껏해야 단지 떨리고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걸을 수 있는 거룩한 땅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완전하게 분명한 사실은, 만약 그 신비(神秘)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서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삼위일체의 그 거룩한 신비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 특히 신약성경에서 나타나 있다. 구약성경에는 그 교리에 대한 암시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단지 암시들에 불과하고, 이 귀중한 교리가 분명하게 계시된 것은 신약성경에 와서이다.
신약성경에서 그 교리는 매우 분명하게 가르쳐 진다. 그리고 B. B. 워필드(B. B. Warfield) 박사가 삼위일체에 관한 한 훌륭한 논문에서 잘 지적한 바와 같이, 그 교리는 명백하게 가르쳐진 정도가 아니고 전제되어 있다(is presupposed). 다시 말하면, 신약성경은 삼위일체 교리 위에 철저히 기초하고 있고, 그 교리가 말로 표현되기 전에도 그 교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成育身, incarnation)과 성령의 사역이라는 위대한 사실들에 의해 사실 확립되어 있었다.
삼위일체에 관한 신약성경의 교훈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이, 그 교리가 전체적으로 서술된 구절들에서 발견된다. 신약성경이 일반적으로 하는 것은 그 교리의 부분들을 서술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부분들을 모야 요약할 때 우리는 세 인격이신 한 하나님이라는 위대한 교리를 가진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이 표현된 신약성경의 모든 구절들은, 성경의 신성과 인격성(人格性)에 대하여 표현하는 구절들과 함께, 삼위일체 교리를 지원(支援)하는 구절들이다.
그러나 비록 삼위일체에 관한 성경의 교훈의 아주 많은 부분이 그렇게 부수적이고 부분적인 방식으로 주어지지만 - 다시 말해 그 교리 전체를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그 교리를 전제하는 방식으로 주어지지만 - 아버지와 아들과 성경이 함께 언급되어 그 교리가 명확하게 제시되는 몇 개의 구절들이 있다.
그러한 구절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대 위임’(大委任, the Great Commission)에서 발견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마태복음 28장에 나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거기에서 우리는 가장 완전한 동등 속에 있는 삼위일체의 세 인격 모두에 대한 언급을 본다. 그러나 세 인격은 분명히 세 하나님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 우리 주님의 이 엄숙한 부탁에서,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영원히 묘사된다.
우리는 또한 고린도후서의 마지막에 있는 사도의 축도를 생각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고후 13:13). 여기의 용어는 ‘대 위임’의 용어와 조금 다르다. 바울은 아들(Son)을 ‘주님’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서 ‘주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로 변역되는 다른 헬라어와 같이, 분명히 신성(神性)에 대한 명칭이다. 그것은 바울이 사용한 구약성경 헬라어 번역에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번역하기 위해 사용된 헬라어이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여호와에 대해 말하는 구약성경의 구절들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은 삼위일체에 관한 신약성경 전체의 교훈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어떤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것은 이것이다. 즉, 신약성경 기록자들은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제시함에 있어서, 자기들이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구약성경의 교훈과 충돌한다고 간주될 수 있는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의식이 결코 한 순간이라고 없었던 것이다.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교훈은 구약성경의 핵심이다.
그것은 그대로 신약성경의 핵심이다. 한분이상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상에 대해, 신약성경은 구약성경과 똑같이 반대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똑같이 분명하게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하나님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셋은 같은 한 인격의 세 모습이 아니고, 서로 간의 참으로 인격적(人格的)인 교제를 가지시는 세 인격이시라는 것을 가르친다.
그 교리는 하나의 신비이다(That doctrine is a mystery). 인간의 지성은 그것을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복된 신비인지! 이처럼 가리워진 것을 벗기시고 죄인인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존재(the being of God)의 그 깊은 세계를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겸손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의 마음(Christian's heart)은 감사와 기쁨으로 녹는다.
각주
B. B. Warfield, “Trinity” in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lopedia. 그의 저작집 Biblical Doctrines, 1929, pp. 143-147에 수록되어 있음.
ⓒ 복음뉴스(BogEum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