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산상수훈과 그리스도의 신성
(The Sermon On The Mount and The Deity of Christ)
13장 산상수훈과 그리스도의 신성: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위대한 교리를 토론하는 와중에 있습니다. 예수는 단순히 인간으로서 좀 더 고차원적이고 더 나은 종류의 종교적 경험으로 인도하는 지도자였습니까? 아니면 죄의 권세와 죄책(the guilt and power of sin)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고자 인간이 되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우리는 사복음서에서, 그리고 맞든지 틀리든 일부 사람들이 복음서의 출처라 주장하는 자료들에서도, 예수가 단순히 믿음의 본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고 소개함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자료들은 단순히 "내가 하나님께 가진 믿음처럼 너희도 하나님을 믿으라”라고 말하기보다는 "나를 믿으라”라고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복음서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치고 예수 자신도 그렇게 가르치심을 나타낸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종교적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God)뿐입니다.
이제 저는 자신을 믿음의 대상으로 제공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이 고귀한 견해가 어떻게 복음서 전체를 압도하는지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고귀한 견해를 피하려고 합니다. 예수를 단순히 교사와 본보기로 생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신성에 관한 모든 생각들은 애석하게도 생명력 있는 종교와 무관한 형이상학적인 생각이라고 말하지요.
그들은 이제 형이상학과 신학으로부터 벗어나자고 합니다. 이제는 일어나서 예수의 명령을 따르자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명령에 순종한다면, 그분의 신성을 지적으로 확신함으로써 그분을 높이는 것보다 더욱더 그분을 높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나의 친구 여러분! 이런 입장을 가진 사람에게 저는 복음서 어디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이 고상한 주장을 피해 갈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단지 그들의 삶을 정비하는 지침만 제공하고, 그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는 요구하지 않는 예수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친구 여러분! 여기 신약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을 펴고 당신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구절을 제게 보여 주시겠습니까? 교리적이지 않은 기독교를 주장하는 사람 중 한 사람에게 제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아마도 신약성경의 모든 구절 가운데 산상수훈을 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하기를 산상수훈에는 정통 신학의 세밀함과는 독립된 기독교 생활의 프로그램이 있어서, 만일 그런 삶을 살기 원한다면 그것은 신학적인 질문을 다루는 논쟁이나 심지어 예수 자신에 관한 정통적인 개념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하다고 합니다.
친구 여러분! 여러분이 산상수훈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변호하는 것처럼 산상수훈이 정말로 교리적이지 않은 종교를 가르치는지 살펴본다면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할 것입니다. 특히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여러분을 그렇게 힘들게 하는 예수에 관한 엄청난 주장에 대해 과연 산상수훈이 침묵하는지 살펴본다면 반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일단 선입견을 제쳐 두고 산상수훈을 직접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서의 다른 모든 부분에 깔려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엄청난 견해를 동일하게 산상수훈이 가르치고 전제함을 발견할 것입니다. 산상수훈(마5-7장)이 한편으로는 예수가 어떤 인물인가 하는 질문에 관심이 없는 교리적이지 않은 기독교에 더 호의적이고, 그 반대 입장에는 호의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산상수훈은 팔복으로 시작하는데, 언뜻 보기에 팔복은 이것을 말한 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와 상관없어 보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이 말은 그렇게 말한 분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사실이지 않습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 팔복 모두에서 우리는 성경의 예수가 아니면 그 누구도 그렇게 교훈하고 말할 수 있지 않을 신기한 권위를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천국에 있게 될 것인지 이토록 확신을 가지고 말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보상을 사람들에게 선언하는 이 분은 누구입니까? 이 문제도 잠시 보류해 두겠습니다마는, 분명한 것은 예수가 자신에 관한 엄청난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 팔복을 끝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팔복의 마지막 복이 무엇입니까? 특별한 종류의 영적 자질을 가진 사람에게 임할 복의 선언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 자신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사람에게 임할 복의 선언입니다. 여기 그 복이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5:11).'나로 말미암아'라고 한 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예수에 대한 엄청난 주장을 포함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분의 이름을 붙들기 원하고 그분의 이름 붙들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냥 보통 사람이 이 말을 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한다면 네가 복이 있다”라고 말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렇게 말한 그 예수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라고 말하고,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8:38)라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전적인 헌신, 지상에 존재하는 거룩한 관계보다 우선시 헌신, 한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달린 헌신을 요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단순한 인간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산상수훈에서는 예수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따라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를 너희가 들었노니”라고 말씀하시고 난 후에 몇 구절을 인용하십니다. 부분적으로 이 구절에는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문장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예수는 그 인용과 대조해서 자신만의 말을 합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5:21-22). 의심의 여지없이, 이 모든 경우에 예수는 구약성경에서 말한 바와 대조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이 말했다고 잘못 주장하는 유대 지도자의 말과 대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구약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바른 해석을 제시하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이상으로 그분은 신선하고 새로운 어떤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는 자신의 말을 자신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라 여겼던 구약성경의 선언과 동등한 위치에 놓는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렇게 말하는 권위, 자신의 선언을 구약성경의 선언과 같은 위치에 놓도록 하는 이 권위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예수가 주장하는 이 권위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선지자들도 권위를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예수가 주장하는 권위는 단순히 선지자의 권위였을까요? 아닙니다. 거듭 강조해서 말씀드리지만 단순히 그런 권위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들도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말했지만 그것은 부여된 권위입니다. 일시적으로 그들에게 부여된 권위였다는 말입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대언자였던 때가 있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대언자였던 것은 그 순간에 그들이 성령의 통로였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들은 총체적으로 무오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영구적으로 그런 권위를 소유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선지자로 나서야 할 때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 위해서 조심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이 말할 때 사용했던 특징적인 표현은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할 때 그들은 "나는 지금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을 하는 분은 하나님이고 나는 하나님의 대언자일 뿐입니다"를 의미했습니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예수는 선지자였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배웠던 소요리문답에서 예수가 선지자요 제사장이며 왕이라고 한 말은 틀림없이 맞는 말입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23문). 예수는 선지자였지만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 그분은 선지자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산상수훈에서 선지자들이 사용했던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노니"라고 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권위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 권위를 구약성경의 표현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위와 동등한 위치에 둡니다. 물론 인간 예수가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는 복음서의 구절들을 간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복음서인 요한복음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는 요한복음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장 분명하게 증거한다고 말하기보다는(다른 모든 복음서도 아주 분명하게 증거하니까요) 다른 복음서보다 좀 더 온전하게 표현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무튼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본 그대로 하고, 하나님이 말하라고 하신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 예수가 하나님께 복종하셨음에도 그분의 권위가 선지자들의 권위 이상의 것이었다는 사실에는 달라진 게 없습니다. 그 권위는 단순히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게 속한 그분 고유의 권한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의 말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산상수훈에서 "내가 말하노니"라고 한 이 엄청난 말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말은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산상수훈의 끝부분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 구절은 불신자들이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만일 산상수훈 전체가 그들이 좋아하는 구절이라면, 산상수훈 중에서도 이 구절을 아마 가장 좋아하는 구절로 꼽을 겁니다. 불신자들이 이 구절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구절의 실제 의미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오해 때문입니다. 그들은 만일 누구든지 그를 세상이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불러 준다면 예수에 대한 그의 입장과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의미로 이 구절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는 본문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본문은 어떤 사람이 예수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든 부르지 않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에게 "주여 주여”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에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아닌 입술로만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의 삶으로 증거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으로 말하지 않았음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애석하게도 잘못된 이유로 이 구절은 불신자들이 선호하는 구절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구절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고, 우리도 그들과 함께 이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예수에 관한 정말 엄청난 선언이 내포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 구절은 예수가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한 가지 신기한 경우를 제공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그냥 아버지나 우리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내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지난 강연에서 다룬 대로, 이는 성전에 계셨던 열두 살 된 예수의 대답에 나타나고 복음서 전체에 걸쳐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여기 산상수훈에서도 다시 나타나지요. 피해갈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구절이 너무 익숙해서 읽으면서도 주목하지 못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엄청난 중요성이 상실되지는 않습니다. 사실은 점점 더 확장됩니다. 곳곳에서 예수는 아주 독특한 의미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십니다. 이제 이 구절 자체가 말하는 내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그 다음에 나오는 두 절과 연결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 구절들도 오늘날 불신자들이 좋아하는 구절이지요.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제 짐작에 불신자들은 이 구절이 기적을 폄하하고, 종교를 능동적으로 고백하는 행위를 폄하한다고 해석할 것입니다.
만일 세상에서 도덕적 삶이라 부르는 대로 산다면 그 사람은 어떤 신조를 받아들이거나 구체적인 신앙고백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르침으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당연하게도 이 해석은 잘못되었습니다. 바로 전 구절을 이와 비슷하게 풀이한 해석이 잘못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지요. 이 구절들은 사도 시대(아직 기적이 일어났을 때)에 기적들이 중요하지 않았다거나, 그 당시에 정통이 중요하지 않았다거나 또는 지금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구절들은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그래서 그 변화된 마음이 선한 삶을 통해 나타나지 않는 한,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뿐입니다. 이 구절들은 정통이 불필요하다거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능력의 역사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삶이 없는 정통은 엉터리이고 진정한 정통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 구절이 불신자들이 선호하는 구절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에 따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반적으로 도덕적 삶이라 불리는 대로 사는 것이 전부라고 믿습니다. 좋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인기 있는 이 구절들을 한번 보십시다. 이 구절들이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고 가르칠까요?
여러분! 정반대입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이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엄청난 주장을 하고, 예수가 하신 다른 말씀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인 스스로 엄청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묘사하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인 역사의 과정 가운데 나타난 장면입니까? 아니면 어느 지역에서만 또는 일시적으로만 나타난 장면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장면이 아닙니다. 이는 마지막 심판 때의 장엄한 장면, 더 이상의 항소가 불가능한 법정에서 인류의 영원한 운명을 정하는 최후의 결정이 내려지는 장면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는 하나님의 심판석(judgment seat)입니다. 여기서 누가 하나님의 심판석에 앉아 있다고 소개되었습니까? 누구입니까? 어떤 이들의 생각대로 상냥하고 순전하게 윤리적이며 실제적이고 초현대적이고 신학적이지 않은 이 산상수훈에서, 어떤 이들의 생각대로 단순한 의의 선생으로서 메시지에서 자신의 인격을 제거하고 더 이상 고귀한 주장을 펼치지 않으려고 신중을 기한 이가 여기서 소개한 이 사람은 대체 누구입니까? 어떤 이들의 생각대로 순전하게 윤리적인 이 가르침에서 이 겸손한 예수가 소개한 사람,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석에 앉아 온 세상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리라 소개한 이 사람은 대체 누구입니까? 이런저런 답들이 있겠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이 답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석에 앉아 계신 분은 바로 예수 자신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주여 주여 …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여기서 말하는 '나'는 누구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인가요?
아닙니다. 예수입니다. 바로 이 말을 하고 있는 분입니다. 예수의 결정에 모든 인간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그 운명이 무엇인가요?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내린 '떠나가라'는 예수의 판결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산상수훈이 답을 주고 있으니까요.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마 5:29).
그 답은 예수의 가르침 전체에 나타나고 우리가 지금 다루는 구절에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떠나가라고 하신 예수의 의미는 의심의 여지없이 떠나가라는 형을 선고받을 사람들이 지옥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마찬가지로 지옥에 대한 생각은 예수의 가르침 전체를 관통합니다. 그분의 윤리적인 가르침에도 그분의 현저한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엄청난 진지함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지옥이 뭐라고 불렸을까요?
지옥에 대한 묘사는 복음서 곳곳에 있는데, 거기에 쓰인 언어가 비유적이든 아니든 지옥이 영원하고 끔찍한 형벌, 끝이 없는 형벌을 의미한다는 것을 잊지 못하게 합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는 지옥을 어떻게 불렀을까요? 어떤 사람에게는 그 답이 생소할 수 있겠지만 아주 명료합니다. 이 구절에서는 예수에게서 추방된 존재(being banishment)를 지옥이라고 불렀습니다(Hell is designated in our passage as being banishment from Jesus.).
이것을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사렛 출신 예수는 끔찍한 심판의 날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석에 앉을 것임을 믿었고(좋은 역사가라면 이를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자신의 말이 최종적이며 자신과 함께 있는 삶은 천국이고 자신을 떠난 삶은 지옥임을 믿었습니다. 현대인들이 재구성한 약하고 감성적이고 순전히 인간적이고 순전히 윤리적인 예수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더 이상 자신을 하나님이라 선언하지 않고 단순히 의의 교사가 된 여러분의 예수는 도대체 어떤 예수입니까? 여러분은 전적으로 인간인 예수를 발견하신 겁니까? 요한복음에 항소하여 산상수훈에 상고함으로써 신조에서 고백하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에서 달아나신 겁니까? 친구 여러분! 그럴 수 없습니다. 성경의 예수는 어디서나 같습니다. 이 예수를 이제 어쩌시렵니까? 그냥 적당히 인정하는 정도로 취급하시겠습니까? 아!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에게 애정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해 친절하고 공손하게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윤리가 사회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말합니다.
또한 예수가 제퍼슨의 자기관리 십계명(Jefferson's ten rules)보다 탁월한 금언을 말했으며 소크라테스나 공자나 부처보다 훨씬 낫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들은 인생의 몇몇 방면에 철저하게 예수의 영향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구세주(Saviour)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분이 흘리신 대속의 보혈(atoning blood)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그분의 현존(presence)에 만족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그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그냥 공손하게 애정어린 인정만을 예수께 보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종교적 천재나 세상의 여러 종교 창시자 중 하나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의심하던 도마(doubting Thomas)처럼 예수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 20:28)이라고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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