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를 하면서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씁니다. 목회 삼십년 하면서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교회의 부흥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고 각자 나름대로 주어진 재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참된 충성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이십 오장에 보면 우리가 아는 대로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오래전에 이 말씀을 보면서 목회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목회는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재능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칭찬 받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이 십 오장을 보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들 나름대로 자기에게 주인이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맡겨주었던 재능 따라 최선을 다했을 때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에게 칭찬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목회를 하면서 많은 성도를 모으고 나름대로 어께에 힘주고 목회 하고 싶지 않은 목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방법대로 오늘도 세계 각지에서 최선을 다하여 사역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충성과 주님이 원하시는 충성의 방향이 같을까? 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두 달란트 받았는데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살고 싶은 것은 우리들의 욕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기도한다고 다른 사람처럼 큰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내가 간구한다고 해서 다 응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일찍 주제파악을 한 것 같습니다. 내게 주신 재능이 얼마인지 알기에 욕심을 내기 보다는 내 능력에 맞게 주님 보시기에 최선을 다하다 주님께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매일 매일 기도하며 살고 있습니다.
목회라는 것이 수십 년 해왔으면 쉬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짐스럽게 느껴지고 제 자신이 한 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언제 부터인가 예배 때 마다 교회에 오시는 교우들을 볼 때 마다 그저 고맙게만 느껴집니다. 저보다 더 훌륭한 인격을 갖추셨고 학벌도 더 좋으시며 더 훌륭한 메시지를 전하시는 목사님들이 계시는 교회로 가지 않으시고 한 없이 부족한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배에 나오는 교우들을 볼 때 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예상치 못하는 일들이 많음을 목회하는 분들이나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은 알 것이라 믿습니다. 함께 믿음생활 잘 하다가 아이들이 커 버리면 아이들의 신앙교육 때문에 큰 교회로 옮겨 가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교우를 볼 때 한 없이 절망하기도 하고 제 자신이 너무나 무능한 사람처럼 느껴져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을 추스르기 힘든 적도 있었고, 마음을 다해 사랑을 주고 속 있는 이야기 까지 진실하게 나누었던 분들이 오해 아닌 오해를 통해 편지 한 장 남기고 교회를 떠났을 때는 솔직히 사람이 싫어져 목회를 그만 두고 싶은 절망의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고 다른 교우 보다 더 마음을 주고 그들이 말한 대로 은퇴하는 그날 까지 함께 가자는 말을 마음에 두고 살았는데 변명 아닌 변명을 통해 교회를 떠났을 때는 두 번 다시 교우들에게 마음을 주지 말자는 다짐까지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주님 앞에 조용히 나가 어떻게 목회 하여야 하는지 마음에 남은 상처를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를 오랫동안 기도를 통해 물었던 일이 생각이 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아픔을 통해 깨달은 것이 그래서 오래전 부터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이런 찬송을 불렀던 것이었구나 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 분을 볼 때 나는 만족하였네” 불러도 불러도 은혜가 되는 것 같습니다.
행복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을 추스르고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 무엇이고 내 능력의 한계가 어디쯤인가를 깨닫게 될 때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절망하고 좌절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남하고 비교하는 비교의식에서 시작됩니다. 다른 사람은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우리들의 행복을 빼앗아가기도 하고 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축복 받고 사역에 은혜를 입은 것 같은데 왜 나는 그런 은혜가 없을까라는 비교의식 때문에 절망감을 갖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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