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의 반 이상을 쓴 바울의 편지를 보면서 어느 날 제 나름대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 바울이 예수 믿고 부르심 받아 사역한 초기에는 자신의 사도 권에 대하여 힘들게 하고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싸움닭처럼 지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열심을 다해 해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자신의 학벌이나 살아온 삶의 배경을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 무시당할 사람이 아닌데 예수 믿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당시 유대인들의 태도에 분개했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하버드대학 같은 수준의 가말리엘 교수 밑에서 학문의 지식을 쌓은 자신을 무시한다는 것이 자존심 강한 바울에게는 용납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구에게 견주어 봐도 종교적인 열심 역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자신은 자부심을 같고 살았고 남들이 쉽게 가질 수 없었던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신을 향해 사람들이 여러 모양으로 비난의 이야기를 했을 때 쉽게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사역 초기에 썼던 편지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항변하고 변명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를 생각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시간이 흐르고 죽음이 가까울수록 바울의 모습이 이런 형편 저런 형편으로 다듬어지고 깎이어 온유한 자로 변해가면서 마침내 디모데를 향한 마지막 편지를 통해 자신이 죄인중의 괴수라고 까지 표현할 정도의 겸손한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가장 많이 표현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은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쉽게 사용해서는 안 될 단어 중의 하나 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고 믿는 다면 삶의 자세가 은혜를 깨닫기 전의 삶과 완전히 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삶이 예수를 만나기전 과 만난 후의 삶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나기전에는 바울의 삶은 안하무인적인 삶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타협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하나님을 제외한 예수라는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이단적이요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데반의 죽음의 현장에서도 증인으로 서는 것을 주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라면서 알아온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대로 아나니아를 통해 안수 받는 순간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정죄하고 용서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을 용납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고 긍휼히 여긴다는 말의 의미가 새롭게 그에게 다가 왔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려 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예전에 자신 역시 예수 믿는 수많은 사람들에 고통을 주었던 기억 때문에 그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만나고 나서는 자신의 기득권과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았고 어떤 형편과 사정 속에서도 자신을 구원해 주시고 충성스럽다고 믿어주셔서 사도라는 직분을 맡겨주신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삶을 살다갔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와 후서를 읽을 때 마다 제게도 삶의 마지막 끝자락에 이런 은혜를 주소서 라는 기도를 늘 드립니다. 젊었을 때는 어떻게 살았든지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향해 달려가는 삶의 자세가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내게 맡겨주신 사역의 분량을 최선을 다해 감당해야 갰다는 생각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삶의 치부를 누구엔가 고백한다는 것은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옴을 느낀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끄럽지 않게 고백하면서 단호하게 자신처럼 살다가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권면해 주는 용기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 내가 살아온 삶처럼 살라고 권면한다는 말은 자신 역시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음을 보여주는 말이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에 관하여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살았던 것처럼은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기에는 너무도 희생해야 할 것이 많고 내려놓아야 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살려고 한다면 내가 손해 보는 것이 많은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목사답게 성도답게 사는 길이요 주님 앞에 언젠가 서는 날 책망 받거나 버림받지 않는 축복된 삶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나온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마다 어려움은 있었고 믿음의 갈등과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의지 하고 말씀을 붙잡은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 자리에 웃으며 주님 곁으로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환경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의지하고 말씀 붙들고 살았던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추수의 계절이라고 말하는 가을의 끝자락에서 나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알고 사는 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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