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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신앙의 훈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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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신앙의 훈련들

본문 : 창세기 14장 1-24절

설교 : 백의흠 목사 (엘림교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의 싸움을 싸우면서 저 천성에 들어 갈 때까지는 늘 우리에게 시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 뜨리려고 발악을 합니다.

그래서 크고 작은 함정들을 우리 앞에 놓아 두고 우리를 빠뜨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 모릅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주의해서 살펴보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가 쳐 놓은 올무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앞에 마귀가 쳐 놓은 함정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우리가 같이 읽으시면서 이 본문 가운데서 아브라함의 담대하고 훌륭한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저도 본문 말씀을 수없이 읽으면서 아브라함의 훌륭한 믿음들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네 나라의 왕들과 싸워서 이겼죠, 조카 롯을 구했죠. 십일조를 드렸죠. 남의 물건을 조금도 그냥 가지려고 안했죠.

얼마나 훌륭한 모습입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는 본문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본문 속에서 아브라함 앞에 마귀가 파 놓은 함정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 함정들을 멋있게 극복하면서 믿음의 훈련을 쌓아나가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모습들을 우리가 이 시간 살펴보면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잘 눈에 띄지 않는 마귀의 함정들을 피하면서 이기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려면, 아브라함 앞에 놓여진 함정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인간 관계의 함정입니다.

성경에서 전쟁이라는 사건이 제일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이 바로 오늘 본문의 창세기 14장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둘러싸고 있는 아홉개의 부족국가들이 다섯나라와 네 나라가 서로 동맹군을 형성하여 오대 사로 나누어져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이 패하면서 거기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전쟁 포로로 끌려 갑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자기의 집에서 데리고 있는 개인적인 사람 319명을 거느리고 이 전쟁에 가담하여 적을 쳐부수고 롯과 그 외의 사람들을 구출하고 돌아 옵니다.

사실, 이 전쟁은 아브라함과 전혀 상관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전쟁에 가담하지 않을 수도 있었고 이 전쟁에 가담치 아니하면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평안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 가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조카 롯 때문입니다.

롯이 어떤 사람입니까?

아브라함과 물질 문제로 다툰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이긴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준 사람입니다.

땅을 나누자고 할 때도 아브라함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는데 그는 양보하지 못하고 염치없이 제일 좋은 땅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전쟁 포로로 사로 잡혀 갔습니다.


만약, 이 때 우리가 아브라함이라면 이 소식을 듣고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 것 참 고소하다.  샘통이다"   

"욕심만 부리더니 잘 됐구나"

"자기가 판 웅덩이에 자기가 빠진 건데 뭐!"라고 말하면서 통쾌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제의 고난과 아픔을 보고 자기의 목숨을 내걸고 싸움터로 나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적으로 롯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가 비록 나를 유익하게 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내 골육이다"

조카의 고난을 이대로 방관할 수 없다고 하는 그 조카에 대한 사랑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 전쟁에 가담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나도 나에게 손해 끼치고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보통 어떤 나쁜 사람이 혹은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그것 참 고소하다. 그것은 내 죄값이야" 사람은 심은대로 거두는 법이야"하면서 그 사람이 고통을 보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마귀가 파 놓은 함정입니다.

나의 원수가 잘못된 것을 보고 좋아하는 것은 마귀가 파놓은 함정입니다.

나를 못살게 굴고 괴롭게 구는 사람이 잘 안되기를 바라는 것은 믿음의 훈련에서 지는 것입니다.

나의 라이벌이, 나의 경쟁자가 잘못되고, 그가 잘 안 되는 것을 은근히 바라고 그가 어려움 당하는 것을 보면서 흐믓해 하는 것은 마귀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나요?

하나님과 원수인 우리들이 마귀가 하라는대로 다 하면서 죄를 짓다가 결국에는 마귀 뒤를 쫄쫄 쫓아 지옥에 가는 것을 하나님이 보고 하나님이 "그것 참 고소하다"라고 말하셨나요?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져 있는 우리를 보고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다.

원수 마귀를 쫓아 다니는 것을 그냥 놔 둘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친히 개입하셔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나를 살려 이제는 지옥 가지 않고 천국가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주고 받는 시대입니다.

나에게 잘 해 준 사람을 잘해 주고, 나에게 못해 준 사람은 못 해 줍니다.

그리고 나에게 해 준 것만큼 나도 그에게 해 줍니다.

옳고 그른 것은 분명히 따져 정당한 일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혼 청첩장을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먼저, 이 사람이 우리 집 결혼식에 왔나? 안 왔나?부터 따집니다.

그리고 축의금을 얼마 했나 봅니다.

그래서 안 왔으면 나도 안 가고, 우리 집에 축의금을 만원했으면 나도 만원하고 이만원했으면 이만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옳고 그름만 따져 그 원리에 의해서 반드시 모든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간혹 올바르고 정당한 일이라 할찌라도 반드시 그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유명한 중국 선교사 '월치만 니'의 간증 가운데 이런한 대목이 있습니다.

중국에 가뭄이 들었을 때 일입니다.

이 때 예수 믿는 한 성도가 있었는데 다른 곳에는 물이 없어서 쩔쩔 매는데 이 성도의 논에는 물이 풍성하게 고여 있습니다. 그런데 한 밤이 지나고 나면 이상하게 자기 논에 고여 있었던 물이 다 빠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성도의 논과 가까이 붙어 있는 이웃집의 논에서 밤새도록 그 성도의 논에 고여 있었던 물을 다 빼 가버린 것입니다. 그 물은 본래 자기 논에 고여 있었던 물이어서 당연히 그 물이 내 논의 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당당한 권리가 그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그 성도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으 이웃에게 가서 따집니다.

"왜 나의 눈에 고여 있는 물을 당신이 다 빼어서 가는 것입니까?"

그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해서 이겼습니다. 그래서 물은 다시 빼왔습니다.

그런데 이튼날에는 또 다시 물이 빠져 나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그러면 또 다시 가서 빼오고 이런 일을 몇 번 거듭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물을 빼와도 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도무지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제가 정당한 일을 하는데 왜 저의 마음 속에 평안이 없습니까?"

주님의 음성이 들여 옵니다.

"너는 정당한 일만 하려고 하느냐?  정당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은 할 수가 없겠느냐?"

다시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제가 정당한 일보다 그 이상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때 주님이 그에게 "내가 너에게 베풀어 준 것처럼 그 사람에게 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침내 그의 마음 속에 깨달아 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날 밤에 위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튿날 새벽녕에 되어서 이웃집 사람이 자기 논의 물을 빼내어 가기 전에 자기 논의 물을 때서 이웃의 논에 물을 대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 속에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다시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 날 이웃집 사람이 찾아와서 그에게 잘못을 빌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옳고 그름보다 더 위대한 원리에 의해서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나에게 대하신 은총과 용서의 원리입니다.  은총과 용서의 원리!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옳고 그른 것을 따져서 나를 대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중에 아무도 주님 앞에 설수 있는 소망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주님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나를 조건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 주셨습니다.

불순종의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죄에서 구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옳고 그름을 따져 처리했다면 우리는 벌써 지옥에 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옳고 그름을 따져 우리를 처리하지 않고 은총으로 대하셨습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보다 더 위대한 원리, 바로 은총의 원리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다루신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대하겠다"

"주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겠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인간관계에서 마귀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고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비록 그에게 서운하게 했지만 그가 고난 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그는 도와 줍니다.

그래서 마귀가 요구하는 인간 관계의 함정을 멋있게 극복해 나갑니다.


둘째로, 아브라함 앞에 놓인 함정은 물질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을 데리고 네 왕을 쳐부수고 돌아 옵니다.

어떻게 돌아 옵니까?

16절,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빼앗겼던 물건들은 모두 찾았습니다.

그러나 소돔왕이 마중 나오면서 너무 고마와서 아브라함에게 물건을 모두 가지라고 합니다.

21-23절,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소돔왕이 '그건 당신이 가지시오'라고 하니까 아브라함은 '나는 결코 이 전리품을 가지지 않겠소' 하면서 되돌려 줍니다.

물질 문제에서 욕심을 부리지 않고 깨끗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연히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내걸고 싸워서 이겨서 빼앗고 되찾은 것입니다.

소돔 사람들은 자기들의 목숨만 구해 준 것만 해도 고맙습니다.

생명을 구해 준 댓가로 전부 아브라함에게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은 자기가 얻은 것의 1/10을 멜리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1/10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것과 자기 것을 구별할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찌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였고 원래 물질 문제에는 강한 사람이 아닙니까?

롯과 재산 문제로 다툴 때도 기꺼이 양보하며 물질 문제의 시험에 이기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부자라도 돈은 더욱 더 모으고 싶고 많이 갖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부자들이 돈에 대한 욕심이 더 많습니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89세 난 노인이 있었는데 구두쇠입니다.

TV도 없고 냉장고, 전화도 없습니다.

겨우 히타 하나 켜 놓고 살다가 그 히타가 돌아가는 것이 아까와 히타는 끄고 자다가 얼어 죽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이 사람의 예금 통장을 보니가 45억원 예금이 있습니다.

침대 밑에만 현금만 1억 8천만원입니다.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돈을 모았습니까?  죽으려고 돈을 모았습니다.

마귀는 돈이라는 함정을 우리 앞에 파 놓고 이 돈 때문에 우리의 신앙을 팔아 먹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돈 좀 벌고 예수 믿을께요' '집 사고서 예수 믿을게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다가 영 예수 못 믿게 됩니다.

특별히 마귀가 우리를 공격할 때 때로는 어떤 강한 부분을 계속 공격합니다.

12장에서도 롯과 헤어질 때 아브라함은 물질 문제를 가지고 시험합니다.

아브라함은 이겼습니다.

그런데 또 시험합니다. 물질로 시험합니다.

우리는 가끔 '어떤 면에서 나는 강하다'고 자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강하다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의 약점만을 공격하지 않고 강점도 공격합니다.

모세를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그 시대에 가장 온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세가 그 땅에서 가장 온유가 승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무엇에 넘어졌습니까?

화를 냈기 때문에 넘어졌습니다.

모세는 그 문제에 있어서는 '나는 자신만만하다'고 생각했을 지 모릅니다.

사단은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압니다.

여러분, 인간의 아무리 고상한 것도, 아무리 위대한 것도 사단의 강한 유혹을 이겨 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니을 신뢰하지 않고는 그 어느 누구의 강한 성품도 사탄의 유혹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삶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내가 강하다고 생각할 때가 사실은 가장 무서운 함정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해서 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까?

"누구든지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이 강한 것이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탄을 이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내가 참으로 강한 것은 주님을 신뢰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입니다만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신뢰했던 하나님이 위대하십니다.

모세와 바울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었던 우리 하나님만이 위대합니다.

그래서 나의 강한 것은 너무 믿으면 안 됩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나를 약한 나에게 맡기지 않고 하나님이 맡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나의 길을 자주 넘어지는 나의 손에 이끌지 않고 능력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이 이끌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쁩니까?

우리는 자주 넘어 집니다.  좌절합니다.  후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붙잡아 주셔서 또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우리 손에 맡기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부탁합니다.

아브라함은 물질 문제의 함정을 또 멋있게 이기고 나갑니다.


세째로, 마귀가 아브라함에게 파놓은 함정은 명예심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광을 자기가 취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 올 때 아주 이상한 한 인물을 만납니다.

그는 멜기세덱 제사장입니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멜기세덱은 처음도 없고 나중도 없고 부모도 없고 조상도 없는 괴상한 인물로 나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 멜기세델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는 하나님의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인물입니다.  즉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멜기세델이 아브라함을 만나 뭐라고 말합니까?

18-20절,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떨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제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에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리세덱에게 주었더라"

20절,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아브라함이여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아 이 승리는 네가 얻은 승리가 아니야.  하나님이 도와 주셨어.

하나님이 네 승리의 원인이야.

오늘 네가 승리하고 네가 성공한 원인이 네 자신의 노력과 땀흘림 때문이라고 착각하지 말아라.

하나님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그런 착각을 자주 합니까?

장사해서 돈 좀 벌게 되면 지나간 세월동안 땀흘려 노력했던 내 모든 노력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합니까?

그 때부터 우리는 이상하게 이 물질 앞에 묶이기 시작하니다.

그리고 오늘 나의 이 번영이 하나님 때문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어 버립니다.

내가 성공하고 대학 입시에 합격하고 승진하며 그것이 나의 똑똑함 나의 노력의 댓가라고 우리는 자주 착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주께서 나에게 건강을 주시고 주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시고 주께서 나에게 이 환경을 주시고 도와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내 축복의 근원이고 내 성공과 승리의 원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그 사실을 자주 잊어 버립니다.

하나님께 올려야 할 영광을 자기가 가로 챕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어떻게 합니까?  얻은 것이 1/10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승리하게 만드셨으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하나님께 외치는 것입니다.

그는 영광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했도 하나님을 찬양 했습니다.

이 승리 앞에서 아브라함은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지기의 영광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23절을 보세요.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깨끗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부귀는 오직 하나님의 축복으로 되어진 것임을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부귀를 통해서도 오직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싶었습니다.


오늘날 가끔 교회에서 문제가 생기는 사람들은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들을 다른 성도들이 보고 "참 열심입니다. 잘하십니다"라고 칭찬하면 까딱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같이 덩달아 우쭐해 집니다.

때로는 내가 열심히 봉사하는데도 나를 알아 주지 않으면 '내가 이런 일을 했는데" "내가 어떤 봉사를 했는데"하면서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봉사의 촛점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우화 가운데 '연못가의 개구리' 이야기가 있습니다.

연못가에 있던 개구리 중 한마리가 하늘에 날아 다니는 새들을 보고서 부러워 하기 시작합니다.

"나도 날고 싶다"

그래서 IQ 높은 개구리 한마리가 어느 날 하늘을 날고 있는 새 한마리에게 협상을 시작합니다.

"야 여기 나뭇가지가 있는데 맨 끝을 네가 입으로 물고 나를 이쪽 끝을 물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을 날게 해 달라"

그래서 이 개구리는 하늘을 날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도 있던 연못가의 다른 개구리들이 부러움과 선망의 개구리로 쳐다보면서 "야, 그런 기발한 생각을 누가 생각해 냈니?"라고 묻습니다.

이 하늘을 날고 있는 개구리는 자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누가 하긴 누가 했니 내가" 라고 말하는 순간 개구리는 땅에 떨어져 배가 터져 죽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봉사의 생활에 내가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봉사는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께 돌려야 할 그 영광을 가로챕니까?

우리가 조심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종이 주의 사역을 감당하는데 그 사역에 성공했다고 부추기면 우리는 그것이 그 종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도둑으로 만드는 격입니다.

물론 때로는 격려와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 하나님의 종이 자만에 빠지면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영웅이 필요치 않습니다.

영웅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아 갑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오로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죽도록 충성을 다한 후에 자신의 무익성을 통감하면서 '나는 마땅히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겸손하고 정직한 청지기가 필요할 뿐입니다.

내가 어떤 불쌍한 사람을 도와 주고 구제 했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와서 나의 구제를, 나의 봉사 생활을 칭찬합니다.

그 때 이렇게 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셔서 한 것 뿐입니다. 나의 재산도 , 건강도, 능력도, 시간도 다 주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청지기 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광을 다 하나님께 돌림 따름입니다.

마귀가 파놓은 명예심이라는 함정을 극복한 아브라함을 보세요.

그는 승리에 도취하지 않고 승리의 결과를 자랑하지도 않았고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송을 기꺼이 드렸습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온 믿음의 훈련은 아브라함이 승리했을 때에 왔습니다.

승리한 후에 아브라함 앞에 마귀는 함정을 파 놓았습니다.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극적인 성과를 거두고 성공했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번영을 누리고, 축복을 받고, 인생이 순풍에 돛 단듯이 잘 미끄러져 갈 때, 그 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가장 깨어 있어서 조심할 때는 고통의 때가 아니라 일이 잘 되어 나아갈 때입니다.

아무쪼록 항상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언제나,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마귀가 파 놓은 올무에 걸리지 말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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