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집에 머무는 동안,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10살 무렵 집 안에 걸려 있었던 십자가 상을 보게 되었다. 원래는 천주교에 다녔던 할머니가 벽에 걸어 놓았던 것을 누나가 가져가 걸어놓은 것 같다. 이 십자가 상은 적어도 6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상을 교회 정면에도 걸어놓는다.
이 고난의 십자가 상을 주목하다 보면, 주님의 십자가 고난이 가까이 느껴진다. 특이한 사실이다. 이 십자가 고난 상을 집으로 가져왔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를 죄와 형벌, 영원한 심판에서 건지기위해, 성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자신을 십자가 대속의 제물로 내어 주셨다.
우리 창조주 하나님 예수님이 피조물 인간들의 버림을 받고, 인간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수치와 형벌을 그 몸에 짊어지고 달리셨다. 이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 보면, 사람들에게 무엇이 근본 문제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죄와 그로 말미암는 심판이 문제임을 생각하게 된다.
지난 날 부끄러운 모습으로 한밤 중 교회를 찾아가 회개의 기도를 하면서, 나를 위해 십자가 높이 달린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기도했던 때가 있었다.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수치와 조소 속에 높이 달린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한편은 죄송스러운 마음, 다른 한편은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 속 죄책을 씻어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된다. 양심을 짓누르는 죄책에서 자유할 때, 그 마음은 얼마나 가볍고 상쾌한가! 그때 마음의 결단은 평생 그 십자가 밑을 떠나 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십자가를 멀리 하는 것은 생명 길을 떠나, 유혹과 죄의 길로 나아가는 길이 될 것이다. 우리가 평생 머물러야 하는 곳은 바로 주님 달리신 십자가 밑이다.
죄책이 사라지는 곳,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이 빛나는 곳, 그 십자가 밑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머물러 살아야 하는 생명의 처소일 것이다. 사람들의 문제는 죄의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용서와 양심의 평강의 가치를 모르는 것 아닌가, 싶다. 사람이 두려움 속에 빠지는 것은 사실 내심 죄책에서 비롯되는 것을 알까?
양심의 자유와 평안은 두려움을 쫓아 내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가까이 의식하고, 행복을 말하게 해 준다. 왜 서구 문명과 오늘날 사람들은 이 하나님을 멀리하며 살고 있을까? 한 가지 이유는 사람들은 죄의 문제를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라 믿는다.
그 대신 이 세상의 성취와 영광을 쫓아가는 것 아닌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말씀을 기억한다. 노년으로 수척하여 마지막 길을 가는 사람을 옆에서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이었다. 아름다운 것, 고운 것도 헛되고 거짓되다는 말씀을 기억하게 된다. 모두가 그 노년의 쇠약함을 행해 걸어가면서, 사람들은 아주 오래 살 것처럼 착각하는 것 아닌가?
살아 계신 하나님과 인생을 가까이 연결시켜 주는 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로 내려 오셔서, 거기서 사람들을 부르고, 거기서 사람들과 교제하며, 생명의 삶으로 이끌어 주신다. 십자가는 "즐거운 교환"의 장소라 하였다. 하나님을 잃어 버리고 떠나 사는 이 세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가까이 모실 곳은 바로 이 십자가 밑이라는 것을 새삼 고백하게 된다.
지난 날 형벌과 심판의 수단이 구원과 생명의 수단으로 변화되었다. 하나님은 가장 저주스러운 것을 가장 축복의 수단으로 삼는 기이한 창조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거기서 무가치한 죄인도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의 신분으로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한 때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찬양과 경배의 근거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