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대학교에 들어가 처음 배운 철학 시간에 독일 철학자 Heidegger의 실존주의에 대해 배웠다. 그때 들었던 말이 바로 "Geworfen Dasein (내 던저진 존재)"라는 말이었다. 지금부터 100년전 유럽 사회에 유행했던 실존주의를 설명하는 중요한 말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요즘의 현실을 볼 때, 그 말이 다시 되살아 난다. 유럽 땅에는 2년 가까이 전쟁이 계속되어 죽고 다치고, 집을 잃고 떠도는 유랑민이 수 백만에 이른다. 일부는 한국에 와서 살고, 정착해 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과 눈물믈 머금게 된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인지 갈등인지, 그 결과로 인해 날마다 폭탄과 파괴의 소식을 듣는다. 한 때는 이스라엘이 유럽 땅에서 핍박과 수난을 격었지만, 이제는 이스라엘이 주변 약속 민족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다. 적당히 응징하면 안될까?
미국 남부에는 살 길을 찾아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로 인해 대안을 찾지 못하는 것 같다. 가까이 뉴욕에도 삶의 터전을 찾으려는 유입인들의 이야기가 그치지 않는다. 며칠 전 뉴욕 지하철 비닥, 노숙자의 담요를 들추었을 때, 수 십마리의 쥐 떼들이 담요 밑에서 나와 달아났다. 이 세계 속에 오늘도 지속되는 눈물과 고통의 사연을 누가 다 알 수 있을까?
세상 어디에나 악인들이 있어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일이 중단되지 않고 있다. "고아와 과부," 요즘 머리 속에 떠도는 말이다. 성경에서 종종 인용되는 고아와 과부, 이들은 스스로 살 수 없고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 속의 "내던져진 사람들을" 일컷는 말이다. 멀쩡하게 보이는 우리들도 내심 고아와 과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산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 생명을 부지하는 일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Youtube에는 아이를 낳고, 그 갖난 아이를 들여다 보면서 웃고 기뻐하는 부모의 얼굴이 나온다. 보기만 해도 기쁘고, 생명을 다해 돌보려는 부모의 의지가 보인다. 이 광막한 우주 속에 그 눈으로 우리를 보아주는 이는 없을까?
어떤 아이는 그렇게 부모의 돌봄 속에 살고 있지만, 이 땅에는 고아와 과부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른, 아이들을 가리지 않고, 스스로 보호받지 못하고, 스스로 살지 못하는 외로움과 왜소함을 느끼며 사는 사람을이 있다. 그들은 누가 돌볼아 줄까?
"내던져진 존재"라는 말이 생각나는 것은 이런 세상의 현실이 마음에 오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 들고 스스로 돌보지 못하는 이 고아와 과부들은 누가 돌보아 줄까? 그걸 생각하면 산다는 것이 참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악스런 사람들은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신의 이름을 팔아 개인과 가족의 일락을 추구하고 있다.
100년전 유럽 땅에 유행했던 실존주의 철학은 전쟁과 파괴 속에서 내던저진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유행하지 않았던가? 사람이 스스로를 돌보지 않으면 누가 돌볼까? 불행하게도 사람은 스스로 돌보지 못한 체 살아간다. 사회도 국가도 생명을 다 돌보아 줄 수 없는 것이 냉엄헌 현실이다.
사고와 재난에 내던져지고, 가난과 궁핍에 내던져진 삶을 사는 외로운 인간들의 부모와 이웃은 누구일까? 함께 일하고 함께 살자는 공산주의 사상과 혁명도 실패로 돌아갔고, 개인의 이익과 성취를 지향하는 자본주의 제도도 답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적자생존의 정글을 지나고 있다.
이 시간에도 이 땅의 고아와 과부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존 그것만을 추구하는 삶이 아떤 의미가 있을까? 이땅에 태어난 아기들은 이런 운명을 알고 울음으로 생존을 시작했을까?
우리에게 어린 아이를 바라보듯 웃고 기뻐하는 그 부모는 어디 있을까? 우리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그 아픔에 동참하고, 그 아픔을 이겨 나가기까지 함께 해주는 분이 살아 있다면 그는 사람의 진정한 친구요, 어버이라 할 것이다. 그 분이 기다려지는 실존주의 제 2 세대를 사는 것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