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들에게 기도는 호흡이라고 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귀에 익숙한 말씀이고 약속이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구하라" 하신다. 신자들은 불시에 경험하는 위기의 순간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전에는 기도에 앞서 염려와 근심과 원망의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힘들고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기도하게 된다. 기도는 마음의 두려움과 근심을 덜어주곤 했다.
우리는 무슨 근거로 기도 속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우리가 기도해서가 아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고, 우리의 삶과 고난에 동참하시고, 돌보신다는 약속 때문이다. 그 약속을 믿기에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기도하고, 마음을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때론 캄캄함이 지배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혼돈이 계속될 때도 있다. 그때도 우리는 마음의 평정과 위로를 찾을 수 있을까? 기도자의 마음에는 두려운 마음도 있다. 과연 이 기도를 들으실까? 사고와 재난과 악 속에 삼키우는 것 아닐까? 두려운 의문도 들기 때문이다. 당장 빛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캄캄함 속을 지나야 할 때, 응답대신 차거운 침묵이 마음에 느껴질 때 기도자는 몹시 외로움과 함께 멀리 광야에 홀로 버려진 느낌도 갖는다.
사람이 힘들고 괴로운 현실 속에서 갖는 큰 고통은 외로움일 것이다. 홀로 부딪히는 상황 속에, 사람도 보이지 않고, 하늘의 침묵만이 흐를 때, 기도자는 어디 기댈 곳을 찾지 못하고, 외로움과 답답함 속에서 흔들리게 된다. 그때 욥의 고독을 느낄 것이다. 더 나아가, 십자가에서 홀로 죽어가는 예수님의 절규를 느낄 수도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런 저버림을 의식하고 체험하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고뇌와 외로움에 참여한다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는 구주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외로움에 동참하신다 할 것이다. 십자가는 그렇게 버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저버림에 참여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라 할 것이다.
그 저버림을 아는 자들은, 세상의 맨끝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도 들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두려워 말라. 너는 나의 것이니라." 성경의 메시지는 가볍게 듣고 가볍게 응답하는 메시지가 아니다. 일찌기 개혁자 루터의 말대로, "죽고 저주 받은" 경험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원래는 "theologian")으로 부르심을 받는다고 한다.
일찌기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창조하시고, 텅빈 공간에 생명들로 채우신 하나님, 캄캄함 속에서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캄캄한 절망 속에서 소망과 기쁨을 창조하심으로, 그 창조의 능력을 드러내신다고 할 수 있다. 며칠 전 읽은 말씀,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30: 11).
다윗의 경험과 고백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이루어 지리라. 신앙 생활은 우리 삶을 주관,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삶의 드라마에 참여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신실하심, 구원의 능력을 배워가는 살이라 할 것이다. 이런 삶의 결국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와 경배라 생각한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