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새벽 시간 갈라디아서를 읽고 묵상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특이한 사람이었다. 한 때 예수님과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을 왜 예수님이 찾아가 불러 자신의 일꾼을 삼으셨을까?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대답해 주고 있다.
바울은 유대 종교에 대햔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구약의 종교에 대한 열정은 있었지만 정작 구약 속의 구세주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없었다. 구약의 중요한 주제는 바로 구세주에 대한 증거 아닌가? 그러나 구약을 읽으면서도 구세주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갖지 못했다.
그 까닭은 구약 율법은 구원을 위한 법이 아니라,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는 정죄를 위한 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구약의 율법을 읽거나 전하면서,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으리라 믿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 그것은 율법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구약 율법은 마치 거울과 같이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증거한다. 그 거울 앞에서 자기 실상을 보고 깨닫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제공하는 다른 구원의 수단, 제사 제도로 나아간다. 그 제사 제도의 완성이 우리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구약은 인간의 죄상을 드러내고 그 죄를 깨닫는 사람을 회개와 용서의 길로 안내하는 "몽학 선생"과 같은 것이다.
사도 바울도 구약 속에서 구원을 찾았던 사람이었으나, 주님의 계시로 실상을 깨닫고, 복음의 바른 뜻을 전하는 사도로 쓰임 받고, 순교로 마감한 사람이다. 이런 사도 바울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 보게 된다. 정말 우리는 율법의 바른 의미를 알고 있는지? 더 나아가서 우리가 믿는 이 신앙 생활의 동기와 목적은 무엇일까? 대답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여전히 율법에 갖혀 사는 사람들이 있고, 더 나쁘게는 신앙 생활을 자기 성취나 만족의 통로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자기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얼마나 누추한 죄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진정한 회개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고 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상을 깨닫게 된다. 이 땅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삶으로 들어갈 것이고, 회개 없이 살면서 현실의 유익과 만족을 좇아 갔던 사람들은 심판의 길, 수치와 형벌의 길로 끌려갈 것이다. 복음의 특이한 점은 회개와 믿음과 생명의 삶은 오직 이 땅에서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 땅, 이 세계를 떠나가면 회개와 용서의 기회가 다시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을 아는 일에 중요한 것은 "시간성"이다, 제 때 알지 못하고 뒤늦게 아는 일은 후회가 따를 뿐이라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얼마나 커다란 놀람과 두려움에 빠질까, 미리 생각하는 것도 지혜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메시지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