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신학생들과 창세기 공부를 시작하면서, 주목했던 것은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요, 그 창조는 무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무(nothingness)"란 무가치함, 소망 없음, 텅빔과 혼돈으로 체험된다.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은 그런 무의 상태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성경 속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구주 예수님의 사역도 무에서의 창조의 연속이었다. 소경, 귀신들린 자, 죄인들을 찾아가 그들을 빛으로, 자유와 생명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의 삶으로 불러 들이셨다. 예수님이 찾아가신 분들은 공통적으로 이 세상에서 소망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또 자신이 "무의 존재"임을 아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구하였다. 반면, 스스로의 만족을 찾고, 세상 것으로 배부르는 자들을 "화 있다"하셨다(눅6: 24).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무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창세기 서두 공부의 중요한 주제였다. "혼돈, 공허, 흑암"은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이 시작하는 배경이고 시작이었다. 그런데 무릇 혼돈과 공허, 흑암을 아는 자들 속에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사역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런 혼돈과 캄캄함 속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절망적인 시간을 맞고 보내야 하는가?
지난 1월 초 교통 사고, 누나를 돌보는 기관에서 못하겠다고 손을 들고, 교통 사고 후 이동이 불가능한 나에게 수시로 전화를 해서 내려 오라고 했을 때, 정말 혼돈, 캄캄함 그것을 체험하였다. 돈을 받고 돌보는 사역을 하는 Health Care 관계자도 힘들다고 물러나고 말았다. 내 일생 중 가장 캄캄한 때를 보내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그런 사고 중에 다행한 것은 내 몸이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차는 뒷부분이 왕창 부서지고 지금도 소송 관계로 정비소에 내버려 둔 체 있다. 내 잘못이 아닌 사고지만, 상대방 유대인은 자기 잘못을 시인하지 않아 소송으로 들어갈 예정이다. 다행히 경찰 보고서에는 상대방의 과실로 기록되어 있다.
멀리 웨스트 버지니아를 왔다 갔다 해서 부득히 차를 구입하지 않을 수 없고, 집 사람에 새로 산 차를 좋아한다. 몸의 회복을 위해 일주일에 두번 clinic center를 다니고 있다. 우리 신앙인들은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난 경험들은 흑암과 혼돈 속에 몰어 넣는 경험이었지만, 그 흑암과 혼돈은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이 시작하는 배경이 된다는 것이 마음 속 위로가 되었다.
"너희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하셨다.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신다"고 말씀하신다(시 37: 5). 하나님이 이 모든 일들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 기대의 마음으로 기다린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안에 우리가 있고, 우리 존재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에베소서 1장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된다. 바울의 서신서에 자주 사용되는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이 표현은 참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광스러운 위치를 설명해 주고 있다.
우리의 존재와 삶은 우리 구주 예수님 안에서의 삶이고, 모든 일은 하나님 안에서 어떤 선한 목적을 위해 허락된 것이며, 하루 하루 우리 존재와 삶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보호받으며, 그 안에서 양육을 받으며, 그를 위해 살아가도록 창세 전에 택하심과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세상을 살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은혜는 가장 낮은 자리, 곧,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타난다는 성경의 메시지는 참으로 오묘할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어둠 속을 살아야 하는 백성들로 큰 소망을 갖게 한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마4: 15-16). 이 말씀은 우리 마음이 항상 하나님 안에서 낮은 자리에 머물러 살 것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