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갈수록 산다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80의 나이에 제대로 걷지 못하는 누나를 볼 때 마음이 착잡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젊어서 그렇게 활발하게 다녔던 분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다리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예전 30대 나이에 한국에서 어느 기도원을 찾아 갔다가, 중풍으로 겨우 겨우 걷는 어느 50대 후반 남자분 말씀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걸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할 줄 몰라요." 우리들은 불편을 모르고 살면, 불편없이 살고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잊어 버리고 살고 있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 의하면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붙드심으로 보존되고 유지된다고 한다.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하고, 만물이 주에게서 나와서 주로 말미암는다고 한다. 우리 피조물들은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그 손안에서 보존됨을 증거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달라진 것은, 하루 하루 나의 생명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손 안에서 보존되고 있다는 생각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 하루 불편없이 살고, 부족함 없이 살고 있는 것이 큰 은혜로 다가온다. 그렇게 붙들어 주신 뜻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우리 생명의 보존자 하나님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고, 이 생명을 붙들어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사는 것임을 믿는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우리 스스로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나, 마치 이 생명을 우리가 지켜 사는 것처럼 사는 태도, 더 나아가 스스로 자랑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의 작음을 고백하고, 겸손과 믿음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는 것이 합당한 삶의 자세라 생각한다. 우리 존재의 순간 순간은 하나님의 성실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옛날 고등학교 시절, 몸이 약했던 나는 나 자신을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루 하루 삶은 내 손 안에 있지 않았고,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음을 알아, 기도하며 살았다. 하루 밤을 편하게 자 본 적이 없었다. 기도조차 효력이 없었다. 거의 매일 악몽을 꾸었다. 대학 시험 보러 가는 전날 밤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 자신이 이 나이에 이르도록 어려움 없이 살아 왔다는 것이 신기하고, 하나님의 긍휼의 열매라는 생각이 가득하다.
이런 자신의 경험이 나 자신의 독특한 신앙과 영성을 형성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자랑하는 것, 스스로 높아지는 것을 몹시 꺼려한다. 내가 전하는 신앙과 신학은 인간의 작음을 강조하고, 그런 인간을 붙드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강조한다. 복음주의 신학이란, 바로 그런 것 아닌가? 소망없는 인간을 찾아와 붙드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역사!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역을 복음서에서 가장 뚜렷하게 읽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