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뉴욕장신에서 첫 수업을 마치고 돌아왔다. 학생 중에는 멀리 니카라과에서 zoom으로 수업을 듣는 선교사도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줌을 통해 수업을 들을 수 있어 다행한 일이다. 나는 수업 중, 학생들의 질문을 환영할뿐 아니라, 질문을 자주 하는 학생에게 기말에 좋은 점수를 준다고 학기 시작에 미리 광고를 한다.
오늘은 이 니카라과 선교사 학생의 질문이 있었다. 중남미에서 선교 사역을 하다 보니, 개신교가 소수의 종교로 취급을 받는다는 것과 함께, 교회를 다니면서 현지 교인들이 다수인 카톨릭 교회에 대해 위축된 느낌을 갖는다고 한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은가? 질문을 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중남미 국가에서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곳은 오랫동안 카톨릭이 대세인 전통 속에 살아 왔기 때문이다. 여러 해 전에 방문했던 코스타 리카의 도시 중심에 있는 카톨릭 성당의 크기는 과연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크기도 크지만 내부 장식이 보통 정성이 아니었다.
그런 성당과 개신교 교회당을 비교하면, 정말 열등감을 느낄만도 할 것이다. 그러나 바르게 믿는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소수의 몫이었던 것을 말했다. 예수님도 소수의 믿는 무리를 앞에 두고,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라," 말씀하셨다. 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은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들어가는 자가 적다"고 하셨다.
교회의 정통성은 그 크기나 교인 수에 있지 않다. 또한 역사적으로 카톨릭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일탈하여, 비성서적이고, 비윤리적인 교회 지도자들의 행위로 인해 종교 개혁자들은 성경의 바른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펼쳤고, 개신교가 태어나게 되었다.
참 교회의 정통성은 그 교회가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교리와 삶을 실천하는 데 있다. 교회는 그 거룩성과 사도적 가르침에 충성된 자가 참 교회로 인정을 받기 마련이다. 그 크기가 대변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숫자가 많고 외모가 크다고 주눅들지 말고, 말씀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일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이런 말은 개신교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믾은 교인들이 출입한다고 그 교회가 거룩한 교회, 사도적 교회라는 뜻이 아니다. 참 교회의 표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중심에 두고, 자신을 비우고 드리고 섬기는 삶에 있다. 이런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이 결코 환영하는 가르침이 아니다. 대부분 사람들, 교인들은 자기들의 소욕을 만족시켜 주는 교회를 좇아가기 쉽기 때문이다. 은혜를 구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은 것 같다.
사도 바울의 질문처럼,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묻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요, 참 교회의 표지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목록을 가지고 교회를 출입하는 것은 참 신앙의 표가 될 수 없다. 참 교회는 모든 사람이 마음 편하게 출입하는 유람선이 아니다. 경건함과 두려움, 감사와 경배의 마음으로 출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요구는 오늘날 세대의 사람들이 영 듣기싫은 요청일 것이다. 우리는 종교 개혁자들의 외침을 다시 들어야 하지 않을까, 안타까운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