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위스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신학자는 바로 Karl Barth와 Emil Brunner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신정통주의 신학자들로 알려졌지만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하여 대립적인 입장에 있었다. 부룬너는 자연 속에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접촉점(point of contact)가 있다고 주장했고, 바르트는 단호히 거절했다.
역사와 자연 속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계시가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우리 기독교 신앙 생활에 있어 중요한 논쟁이 아닐 수 없다. 그전 종교 개혁 시기 Luther와 Erasmus에게도 이런 유사한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능력이 인간 안에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아는 일이나 순종의 힘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에 의존하는가? 이런 논쟁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전자의 지지자로, 루터의 후자의 지지자로 유명하였다.
어제 어떤 귀한 목사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내 머리 속에는 이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의 논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분은 노자. 장자 사상까지를 언급하시면서 기독교 사상을 열강하셨다. 기독교 밖에도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 또는 기독교를 변증할 수 있는 진리가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마 어제 그 목사님은 감리교 신학을 품고 있는 분으로 추정된다. 정통 장로교 신학을 지지하는 분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 안에도 이런 질문이 존재하고, 성경 안에는 두 가지 주장을 모두 지지하는 구절이 있어 논쟁의 명확한 답을 찾는 일이 쉽지 않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 1) 라든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사람)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 속에 보임이라" (롬1: 19). 이런 말씀은 자연과 사람 속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계시가 존재한다는 것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전1: 21).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함이니라"(고전 2: 14). 그 결정적인 증거는 이 세상의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이 공모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인 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무한한 간격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창조주, 구원자 하나님을 얼마나 몰라 보았으면, 그 하나님을 벌겨멋겨 십자가에 매달았을까? 하나님을 아는 일은 사람의 구원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요17: 3).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능력이 자연과 역사 속에 또는 사람의 인지 능력 속에 있는가, 하는 문제는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논쟁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과 성경을 증거하는 목회자는 이 중요한 질문에 대답을 가지고 교회 사역을 담당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 질문과 관련하여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사이에도 뿌리갚은 간격이 존재한다. 그런 질문이 예정론과 자유 의지론으로 나타난다. 각자는 다만 자기 신학에 근거해서 성실하게 가르칠 뿐이다.
나의 경험과 신학에 근거하여 나는 철저히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성경을 읽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우리 심령을 밝혀 주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나 성경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나는 사람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이요,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가를 경험하고 알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과 입장은 목회 현장에서 또한 나의 삶의 경험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된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주장과 믿음은 성 어커스틴, 마르틴 루터, 칼빈에게 일괄된 사상이기도 하다. 나의 신앙은 이들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자연 계시의 유용성을 말하기도 했지만, 그 자신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계시를 주장하는 하나님의 사도였다. 그래서 사도 바울-성 어거스틴-루터-칼빈의 연속성이 오늘날 개혁(장로교} 신학의 뿌리라고 말하게 된다.
수 십년 성경을 읽고 살아 오면서 느끼는 것은, 이 성경이야 말로 하나님의 계시의 산물이요, 성령의 계시가 아니면, 이 성경의 참 뜻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 단순히 읽고 배워서 알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어, 성경을 대할 때 마다, 성령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신앙의 전통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겸손하지 않을 수 없고 사람을 자랑하는 일이 얼마나 두렵고 어리석은 일인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에 처절한 모습으로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 내 모습,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를 그렇게 처형함으로 인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셨다. 그것을 고백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야 하고, 이런 우리를 위해 자기 독생자를 희생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경배할뿐이다.
전도, 선교도 중요하지만, 목회 현장을 통해 경험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만 가지 설교를 들어도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경험이 하나님의 계시의 우월성과,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을 더 지지하고 붙잡게 된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이 더욱 새롭다.